[新 한국의 가벌] #14. 창업주 구인회, 열넷에 두 살 연상 이웃집 딸과 혼례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2.0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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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허씨 대대로 사돈 관계 맺으며 함께 사업

재벌가 중에서 LG가만큼 혼맥이 화려한 곳도 드물다. 삼성, 한진, 대림, SK, 태광, 두산그룹 등과 직접 또는 한 다리 건너 연결되고 정계, 관계, 학계로도 연결된다. 방계인 LIG금융그룹과 LS그룹, 사돈 간인 GS그룹의 혼맥까지 더하면 더욱 화려해진다. 효성, 벽산, 신동방 등과 연결된다. ‘재계의 모든 혼맥은 LG가로 통한다’ ‘통혼경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렇게 된 데는 LG가가 우선 자녀들을 많이 낳았고 혼사에도 특별히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1947년 창업 이래 57년간 동업 관계를 유지했던 구씨가와 허씨가는 2005년 1월 별도 그룹으로 분리됐다. 허씨가는 LG그룹 산하 15개 회사를 넘겨받아 지주회사인 (주)GS홀딩스를 창업해 GS그룹으로 거듭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LG그룹 창업주인 연암(蓮庵) 구인회는 1907년 8월28일 경상남도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승산마을)에서 태어났다. 만회 구연호 공의 외아들 재서(再書) 공과 진양 하씨 사이의 6형제 중 장남이었다. 지금도 생가가 보존되고 있다. 승산마을에 맨 먼저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룬 것은 허씨 가문이었다. 구씨가 옮겨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구인회의 8대조인 구반(具槃) 공 때다. 부친이 현풍 고을 원님으로 있을 때 구반 공이 이곳 허씨 가문의 딸과 혼인하여 처가마을에 살았다. 이후 부친은 한양으로 임지를 옮겼으나 구반 공은 그대로 눌러 살았다. 이후 구씨와 허씨는 대대로 사돈관계를 맺으며 살았다.

1961년 구인회 LG 창업주(가운데)가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자동전화기(모델명:GS-1)로 시험 통화를 하고 있다. ⓒ 뉴스뱅크이미지
구인회의 할아버지 구만회는 대과에 급제해 홍문관 시독이 되었으나 청일전쟁 등을 겪으며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절감하고 낙향해 창강정사에서 글을 가르쳤다. 구만회는 구인회의 아명(兒名)을 ‘정득(丁得)’이라고 지었다. ‘정미년에 얻은 옥동자’라는 뜻이었다. 구인회는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 결혼은 14살에 했는데 신부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에 사는 허만식 공의 딸 을수였다. 구인회보다 두 살 많았다.

“2000원이다, 네 생각대로 잘해보거라”

LG가 펴낸 <한 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 - 연암 구인회의 삶>이라는 구인회의 전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10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 온갖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다만 참고 따르는 것을 부덕(婦德)으로 삼고 살아온 허씨 부인이었다.’

한학을 배우던 구인회는 처남 허선구의 권유를 받아 1921년 4월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신학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보통학교에 다닐 때는 특히 축구에 재미를 붙였는데 훗날 효성그룹을 창업한 조홍제 등과도 이 무렵에 40리 길을 왕래하며 시합을 가졌다. 서울에 올라가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알게 된 처가에서는 사위를 밀어주었다. 1924년 4월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온 구인회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장인이 사망하자 평소 손자가 신학문을 공부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할아버지는 서울 유학을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오라고 명령했다.

고향에 내려와 지수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뽑힌 구인회는 각종 일용잡화는 물론 광목, 비단까지도 협동조합 구판장에서 싸게 팔면서 한편으로는 동아일보 지국도 운영했다. 그러나 25세 청년의 야망을 붙잡아두기에 고향은 너무 좁았다. 구인회는 진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에게는 이미 다섯 명의 아우와 3남1녀 자식이 있었다. 부친 구재서는 고향을 떠나 진주에서 포목상을 하겠다는 그를 앉혀 놓고 백지에 싸두었던 돈다발을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2000원이다. 더 못 주니 네 생각대로 잘해 보거라. 세상을 얕보지 말고, 남하고 화목하게 지내고, 신용을 얻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

그러나 막상 진주에 와서 수소문해보니 자본금 2000원은 든든하지 않았다. 구인회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큰집에 양자로 들어간 동생 구철회를 설득해 1800원을 모았다. 3800원의 자본금으로 구인회는 구철회와 함께 1931년 진주에 ‘구인회상점’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결국 전부터 안면이 있던 사람을 찾아가 상의하니 번창하고 있는 자신의 포목상 건너편에 포목상을 차리라고 했다. 그러나 1년 만에 구인회는 500원의 손해를 봤다. 당시 쌀 한 가마에 4원 50전 하던 시절이니 쌀 100가마가 넘는 금액을 1년 만에 날린 셈이다. 쓰린 가슴을 안고 구인회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땅을 저당 잡히고 돈을 융자받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땅문서를 내놓으며 구인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초반에 일이 잘 안 된다고 주저앉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봐야 되든 안 되든 결판이 나지 않겠느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면서 한 발 두 발 발전해나가도록 해봐라.” 구인회는 땅을 저당 잡히고 8000원을 융자 받아 재기에 나섰다. 죽기 살기로 일하니 점차 자리가 잡혔다.

포목점으로 재기에 성공, 진주의 유지 되다

1935년 3월, 다섯째 아들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구인회는 진주 봉산동에 새집을 마련하고 식구들을 데려왔다. 1936년에는 셋째 아우 구태회가 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구인회의 집에 합류했다. 그해 여름 대홍수가 일어나 상점이 모두 물에 잠겼다. 포목은 졸지에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그러나 구인회는 가을이 되면 오히려 포목 수요가 늘 것이라고 예측해 돈을 빌려 포목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예측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면서 구인회는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긁어 들였다. 포목점 주인 구인회는 진주의 유지가 됐고 그해 11월 진주상공회의소 의원 선거에 3위로 당선됐다.

1942년 5월 구인회는 장남 구자경을 장가보냈다. 맏며느리는 진주 대곡면 단목리에 사는 하순봉의 큰딸 하정임이었다. 구자경은 3년 뒤인 1945년 2월 초하루, 장손 구본무를 얻었다. 39세의 구인회는 8·15 광복 이후 진주를 떠나 ‘기회의 땅’인 서울로 와 조선흥업사라는 상호로 미군정청으로부터 무역업허가 1호 허가증을 받았다.

 구인회가 허준구(허창수 GS그룹 회장의 부친)를 만난 것은 해방을 맞은 이듬해인 1946년 정월이었다. 승산마을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만석꾼이었던 허만정이 셋째 아들 허준구를 데리고 부산으로 구인회를 찾아온 것이다. 당시 구인회는 목탄을 수입해서 팔기 위해 대마도를 목표로 배를 타고 갔다가 후쿠오카 근처로 표류해 그곳에서 농기구를 사다가 판 뒤 부산에 머물고 있었다. 허만정은 구인회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를 맡기고 갈 터이니 밑에 두고 사람을 만들어주소. 내 사돈이 하는 사업에 출자도 좀 하겠소.” 허준구는 구인회의 동생인 구철회의 맏사위여서 두 사람은 사돈관계였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구씨와 허씨의 동업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훗날 허준구는 LG건설·LG전선 회장 및 그룹 부회장을 지냈다. 허창수 현 GS그룹 회장, 허정수 GS네오텍 사장, 허진수 GS칼텍스 부회장, 허명수 GS건설 부회장, 허태수 GS홈쇼핑 부회장 등이 허준구의 아들들이다. 구인회는 또 당시 ‘조선통운’에 다니던 허준구의 동생 허신구도 끌어들였다. 허신구는 1966년 ‘하이타이’를 출범시킨 일등공신이다. 그는 금성사 사장, 그룹 부회장, 럭키석유화학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47년 나이 41세 때 구인회는 크림을 만들어 내놓으면서 처음으로 ‘럭키’라는 이름을 썼다. 구인회의 동생 구정회의 아이디어였다. “기왕에 모델로 서양 여배우를 쓰기로 했으니 상표도 영어에서 따 붙입시다. 럭키가 어떻겠습니까. 행운이라는 말뜻이니 의미도 좋고 우리말로 쓸 때는 한자로 즐거울 樂 , 기쁠 喜라고 쓰면 제대로 맞아 들어가는가 싶습니다.” 대히트를 기록한 <럭키크림>은 이렇게 시장에 나왔다. 당시 장남 구자경은 부산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차남 구자승은 미군부대에, 3남 구자학은 해군사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사실상 이 시점에서부터 LG그룹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구인회가 일궈낸 LG그룹은 1995년 손자인 구본무 현 회장이 취임한 뒤, 1999년부터 계열분리에 나서 4개 주요 그룹으로 분리됐다. 구본무가 전자와 화학으로 구성된 LG그룹을 이끌고 있고, 유통과 에너지 및 건설 부문은 사돈이자 동업자였던 허씨 일가가 맡아 GS그룹을 설립하며 분가했다. 구인회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 전 LG화재 명예회장 일가들은 LIG금융그룹을 맡아 경영하고 있다. 또 셋째 태회, 넷째 평회, 다섯째 두회 가족들은 LS그룹을 이끌고 있다.

구인회-허을수는 슬하에 모두 6남 4녀를 뒀다. 장녀 구양세(뒤에 구자숙으로 고침)는 15세에 경남 남해군수를 지낸 박해주의 아들 박진동에게 시집갔다. 박진동은 해방 후 좌우익 투쟁으로 일어난 학병동맹본부 피습사건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남인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1942년 5월, 대지주 가문인 하순봉의 장녀 하정임과 결혼했다. 결혼 당시 구자경은 17세로 진주공립중학교 4학년 학생이었다.

구자경 명예회장, 대지주 가문 하정임과 결혼

2남 구자승(1974년 작고)은 1956년 부산에서 금성방직 전무로 있던 홍재선의 딸 홍승해와 결혼했다. 홍재선은 전경련 회장과 쌍용양회 회장을 지냈다.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은 삼성 이병철 회장의 차녀 이숙희와 1957년 결혼했다. 구자학은 1964년 제일제당(현 CJ) 기획부장으로 삼성에 입사한 뒤 동양TV방송 이사, 호텔신라 대표이사, 중앙개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 등을 거쳐 LG로 돌아왔다.

4남인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은 이흥배의 딸 이의숙과 결혼했다. 홍재선이 중매했다. 이흥배는 1964년 동양TV 사장으로 일하다 삼성과의 동업 파기로 물러났고 이후 국제신보(현 국제신문) 사장에 취임했다. 이흥배의 장남인 이희종도 LG산전(현 LS산전) 사장과 부회장을 지냈다. 5남 구자일 일양화학 회장은 일찌감치 독립했다. 사업가 김진수의 딸인 김청자와 결혼했다.

차녀 구자혜는 대림산업 이규덕 창업주의 장남인 이재준 대림그룹 회장의 막내 아우 이재연에게 시집갔다. 이재형 전 국회의장의 동생이기도 한 이재연은 희성산업 사장, 금성통신 사장, 금성사 사장을 거쳐 LG카드 부회장을 지냈다. 국내에 패밀리 레스토랑 ‘TGIF’를 처음 들여온 주인공이다. 아시안스타 회장으로 있다.

3녀 구자영은 제일은행장을 지낸 이보형의 아들 이재원과 결혼했다. 구인회의 막내 처남인 허윤구의 아들 허남목의 소개로 만났다. 4녀 구순자는 류헌열 전 대전지법원장 아들이자 서울지검 검사였던 류지민과 결혼했다. 이 혼례도 사돈인 이흥배가 주선했는데 류지민은 43세에 세상을 떴다. 자녀 중 유일하게 구인회가 타계한 뒤 결혼한 6남 구자극은 이화여대 조필대 교수의 딸 조아란과 결혼했다.


구인회와 이병철의 방송 합작과 이별 


1963년 방송사 설치권을 손에 넣은 이병철은 구인회 회장을 찾아왔다. “금성사 라디오가 잘 팔린다고 들었는데 우리 둘이 협력해서 상업방송 한번 해보지 않겠나? 라디오뿐 아니라 앞으로 텔레비전 방송도 같이 해보자.” 구인회는 언론 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금성사는 라디오에 이어 텔레비전 수상기 생산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이병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50대 50의 비율로 삼성그룹과 럭키그룹이 공동 출자하고 방송사 개설 준비에 들어갔다. 1964년 5월, 태평로 국회의사당 건물 맞은편 안국화재보험 빌딩에서 라디오 서울 RCB는 개국 전파를 발사했다. 그해 12월에는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했다. 동양텔레비전이었다.

 그러나 같은 액수를 투자하고, 같은 수의 인원을 파견하여 공동 운영하자던 당초의 정신은 양측 직원들의 불화와 충돌로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텔레비전 사장에 럭키 측의 이흥배가 취임하고, 라디오 사장에는 삼성 측 홍진기가 취임하는 것으로 양측은 화해를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의견이 갈려 티격태격하는 일이 잦았다. 급기야 주주총회에서 삼성 측 이사들이 일방적으로 총회를 진행하려 하자 럭키 측 이사들이 항의하다 퇴장해버렸다. 그러자 삼성 측에서는 텔레비전국을 럭키가 인수해 단독으로 운영하라고 요구했다. 구인회는 이병철을 찾아가 텔레비전은 내가 인수하고 라디오는 삼성이 맡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떠냐며 의사를 물었다. 이병철은 “그게 좋겠다면 그렇게 해보지”라고 답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기다리던 구인회는 일본으로 이병철을 찾아갔다. 이병철은 “그냥 그대로 같이 해보지!”라고 말했다. 구인회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거절하겠네. 원한다면 양쪽 다 맡아 혼자 하게”라고 말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선 구인회를 이병철은 현관까지 배웅했다. 이병철은 “그렇게 결정해줘서 고맙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고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삼성그룹은 이렇게 해서 라디오, 방송, 신문 등 종합 매스컴 체제를 갖추게 됐고 럭키그룹은 언론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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