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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늘 똑같은 것 같아도 마음 흔드는 순간 있다”

<스틸 앨리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받은 줄리언 무어

허남웅│영화평론가 ㅣ 승인 2015.03.02(Mon) 14: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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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22일 열린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는 극적인 시상의 순간들로 전 세계 영화 팬들의 관심을 끌었다. <보이후드>의 강세가 점쳐지던 가운데 알레한드로 G. 이나리투 감독의 <버드맨>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석권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변이 속출했던 이번 시상식에서 무혈로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간 이도 있었다. <스틸 앨리스>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언 무어였다.

<스틸 앨리스>는 리사 제노바가 쓴 <내 기억의 피아니시모>를 원작으로 한다. 앨리스(줄리언 무어)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리는 50세의 여교수다. 남편은 연애 시절처럼 그에 대한 애정이 넘쳐나고 자식 셋은 장성해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중이다. 무엇보다 앨리스 자신이 컬럼비아의 언어학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에 몰두하는 생활에 만족하던 터다. 생의 절정에 맞이한 벼락같은 소식. 너무 이른 나이에 찾아온 조발성 치매 앞에서 그는 인정하기 싫은 결과를 받아들이지만 빠르게 무너진다.

   
2월22일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언 무어. ⓒ AP연합
생의 절정에 찾아온 조발성 치매

잔잔한 수면 위에 몰아닥친 파문에 대한 연기에서라면 줄리언 무어는 스페셜리스트다. <스틸 앨리스> 이전 그는 네 차례나 아카데미 연기상 부문 후보에 올라 모두 낙마한 경험이 있다. 남편이 실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목격하고 무너지는 <파 프롬 헤븐>(2003년)의 ‘아내’, 단조로운 일상에 염증을 느껴 자살까지 생각하는 <디 아워스>(2003년)의 ‘주부’(두 영화로 각각 주연과 조연 부문 후보로 동시에 올랐다),  고위직 남편을 찾아온 소설가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 <애수>(2000년)의 ‘부인’ 등 <부기 나이트>(1999년)의 포르노 배우를 제외하면 그의 역할은 평범함의 정체성을 벗어난 적이 없다.

보통의 삶에 찾아온 충격적인 변화 앞에서 줄리언 무어의 연기는 선이 굵은 행동보다 미세한 표정의 결에 의존한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년)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에디 레드메인의 경우에서 보듯 아카데미는 전통적으로 기예(?)에 가까운 연기에 높은 점수를 부여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줄리언 무어가 뛰어난 연기를 선보이고도 걸맞은 성과를 얻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틸 앨리스>가 미세한 연기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이전과는 다른 결과를 낸 배경에는 온전히 그의 캐릭터에 주목한 영화의 내용에 있다.

<스틸 앨리스>는 앨리스의 치매 증세를 노출한 후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과 그에 대응하는 그의 반응에 주목한다. 연출 과정에서 감독이 배우에게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치매와 같은 장애 연기는 사랑과 같은 일반적인 연기와 달라서 감독은 배우에게 해당 장면의 동선 설명과 연기를 지켜본 후 호오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게 전부다. 이 영화를 연출한 리처드 글랫저 감독은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이다. 배우가 직접 자료를 조사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줄리언 무어는 치매로 아내를 잃은 지인을 찾아가 사례를 들으면서 앨리스의 연기를 준비했다.

   
영화 <버드맨>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제공
줄리언 무어의 미세한 표정 연기

그야말로 외로운 작업이었던 셈이다. 이는 극 중 앨리스가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남편이 있고 병을 걱정하는 자식들이 있지만 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건 오로지 앨리스의 몫이다. 언어를 전공했으면서 언어를 잃어가는 기막힌 현실 앞에서 대학교수이자 아내이자 엄마로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은 극복할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 하지만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고백하면서 끝까지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지 못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어쩜 좋아”라며 찰나의 감정을 드러낼 때 앨리스가 겪는 고통은 고스란히 관객의 가슴으로 전이된다.

이런 연기가 바로 줄리언 무어의 전매특허다. “삶이란 게 늘 똑같은 것 같아도 마음을 흔드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 포착해 연기로 승화하는 것이 배우의 의무다.” 그는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고립된다는 느낌을 받고 있을 치매 환자들이 더 많은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배우에게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다.” 앞으로도 줄리언 무어는 그 자신만의 영광이 아닌 모두를 위한 연기를 선보일 것이다.

<위플래쉬>의 J.K. 시몬스와 <보이후드>의 패트리샤 아퀘트는 아카데미 전초전의 성격을 띠는 골든글로브에서 각각 남우조연상과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오스카 트로피를 예감케 했다. J.K. 시몬스는 광기의 연기로, 패트리샤 아퀘트는 마음을 흔드는 생활의 연기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위플래쉬>에서 시몬스가 맡은 역할은 천재 드러머를 갈망하는 학생을 제자로 맞아 최고 능력을 뽑아낼 때까지 몰아치는 폭군 선생 플레처다. 드럼 빠르기를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며 수많은 연주자 앞에서 학생의 따귀를 날리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는 플레처는 섬세한 손놀림이 요구되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폭군과 피아니스트,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을 하나로 섞은 건 시몬스의 공이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 피터 파커를 귀엽게 괴롭혔던 악덕 편집장과 비교하면 획기적인 연기 변신이다.

그에 반해 6세 소년이 대학생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보이후드>에서 싱글맘 역할을 맡은 패트리샤 아퀘트는 자연스러운 연기로 주목받았다. 12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머금은 이 작품에서 살이 찌고 노화하는 외모를 노출하는 그에게는 치부를 감추려는 태도가 없다. 일반인의 태도로 영화에 임한 것인데 그래서 <보이후드>의 인상 깊은 장면은 그에게서 나왔다. 자식을 모두 독립시킨 엄마는 홀가분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허탈한 심정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많은 관객의 공감을 샀다. 누구나 겪을 법한 상황에서 더없이 특별한 연기를 뽑아낸 그는 아카데미에서 처음 연기상 후보로 올라 상까지 받는 영예를 안았다.

다른 부문과 다르게 예상이 갈렸던 남우주연상 수상자에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의 에드 레드메인이 선정됐다. 이제 고작 33세인 그가 제친 후보자의 면면은 화려하다. <버드맨>의 마이클 키튼, <폭스 캐처>의 스티브 카렐,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브래들리 쿠퍼, <이미테이션 게임>의 베네딕트 컴버배치 등 누가 수상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명단이었다. 그중 연기 경력이 가장 짧은 에디 레드메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펄쩍펄쩍 뛰며 무대에 오른 것도 무리는 아니다.

뛰어난 후보들 가운데서도 그의 연기는 주목받을 만한 것이었다. 사실 스티븐 호킹 박사로의 변신은 무모한 도전에 가까웠다. 인공 목소리 연기를 위해 촬영 내내 코에 연결된 호스를 끼고 있어야 했던 건 차치하고 함께 후보에 올랐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호킹>이라는 TV 드라마에서 스티븐 호킹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던 전력이 있어서다. 호킹 박사가 숱한 장애를 극복하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처럼 에디 레드메인 역시 여러 난관에 정면으로 맞서 최고 배우의 위치에 섰다. 에디 레드메인에게는 연기가 그의 모든 것이 된 순간이었다.


‘엄마들의 포르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열풍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 bodostill upi코리아 제공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드디어 영화로 나왔다.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수식을 달고 다니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동명 원작 소설은 성인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 무려 1억부를 팔아치웠다. 원작자 E.L. 제임스는 지금도 매주 우리 돈으로 12억원에 가까운 수입을 올리고 있으며 이 금액은 소설 속 젊은 억만장자 그레이보다 많다고 한다. 무엇이 ‘그레이’ 열풍을 이끈 배경일까.

영화는 총 6권으로 이뤄진 원작에서 1부 격인 1권과 2권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른다. 대학생 아나스타샤(다코타 존슨)는 감기에 걸린 친구를 대신해 학보신문에 실을 그레이(제이미 도넌)에 대한 인터뷰에 나선다. 생전 처음으로 하는 인터뷰 진행인지라 실수를 연발하지만 차갑다고 알려진 그레이는 뜻밖에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 그의 따뜻한 면모에 아나는 순식간에 마음을 뺏기고 그레이 또한 순수한 그의 매력에 빠져든다.

영락없는 ‘백마 탄 왕자’ 스토리다. 돈 많고 매력적인 젊은 남성이 대학 공부하랴, 아르바이트하랴 미래가 불투명한 여성을 구원하는 테마가 아닌가 말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는 하나가 더 있다. 바로 SM, 즉 가학·피학성 성욕이다. 손을 넥타이로 감아 침대에 묶은 채 섹스를 나누는 건 기본이고 채찍으로 몸을 학대해 성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묘사가 넘쳐난다.

성적 관계에서만큼 그레이는 주인으로 군림하고 아나는 조건 없는 복종을 감내한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설정인데 원작자는 물론이고 영화감독까지 여성이다. 존 레논의 젊은 시절을 묘사한 <존 레논 비긴즈-노웨이 보이>(2009년)로 연출 데뷔했던 샘 테일러-존슨 감독이다. 이 영화에서 함께했던 23세 연하의 애런 존슨과 부부 인연을 맺어 화제를 모았던 감독은 어떤 면에서 판타지 같은 사랑을 실현한 장본인인 셈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선택한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이야기가 맘에 들었다.” 파격적인 섹스가 전부인 영화가 아니라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E.L. 제임스의 평가도 마찬가지다. “섹스 묘사로 화제를 모았지만 많은 독자를 매료시킨 건 진솔한 사랑 이야기였다.” 파격적인 로맨스의 이면에 놓인 이상적인 남녀 관계에 대한 고찰. 이에 주목했기에 샘 테일러-존슨 감독은 “두 주인공의 섬세한 심리 변화에 중점을 두고 연출에 임했다”는 소감을 밝혔다.

그래서 이 영화의 섹스는 과격한데도 카메라의 움직임은 첫 경험을 맞은 여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조심스럽게 몸을 훑는 신사의 태도와 닮았다. 이는 곧 아나와 그레이의 관계다. 사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섹스 장면보다 흥미로운 건 SM을 두고 이 둘이 벌이는 협상 과정이다. 입에 담기도 힘든 행위를 내용으로 한 계약서를 받아들고 가부를 결정짓는 아나의 태도는 오히려 그레이를 리드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레이를 사랑해 SM을 받아들였지만 그 뒤에 감춰진 아픈 과거를 목격하고 그를 치유하기 위해 벌이는 노력은 단순한 볼거리 이상의 여운을 남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영화를 향한 관객들의 반응은 혹평 일색이다. 소설보다 못하다는 둥, 성적 수위가 예상만큼 높지 않다는 둥 말이 많지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전 세계 56개국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다. 누가 뭐라든 극장에서 확인하겠다는 태도는 많은 사람이 극 중 그레이와 아나의 관계처럼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s·죄의식을 동반하면서도 즐거운 일)로서 이 작품을 즐기고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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