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죽음이란 꽃이 피었다 지는 것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5.03.1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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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사회 접어들며 ‘웰다잉’ 관심…새로운 임종 문화 만들어야

“일만 하다가 갈라고 허니 못 가겠소. 참말 원통해 못 가겠소.” 전남 완도 지역의 상엿소리 일부분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현실주의적인 한국인의 가치관이 드러난다. 외국인보다 죽음을 더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깔려 있다. 죽음학 전문가인 정현채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종교학자 최준식 교수에 따르면, 유교문화의 영향이 크기 때문으로 보인다. 내세관이 없어서 현세에 집착한다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1400명의 사상자를 남긴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일로 가보자. 1995년 6월 그날 오후 6시를 몇 분 남기지 않은 시각, 30대 여성 이승연씨는 빵을 사기 위해 그 백화점 지하에 있는 제과점에 들렀다. 사고 싶은 빵이 없어서 빈손으로 백화점을 빠져나온 순간 건물이 굉음을 내며 주저앉았다. 이씨는 “5분만 지체했다면 큰 변을 당했을지 모른다”며 “우리는 보통 70~80세까지 살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사실 죽음은 불현듯 내게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그 경험은 이씨의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짐 정리였다. 마치 여행 왔다 가는 것처럼 남은 삶은 단출하게 살기로 했다. 사고 이후 그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사소한 것에 욕심내지 않고 중요한 것에만 힘을 쏟다 보니 하루하루가 소중해졌다. 사회복지법인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에서 일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20년 전 일이라서 지금은 그때의 결심이 조금 무뎌졌지만,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해둬야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 시사저널 포토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죽음이 있지만, 우리는 평소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다. 죽음을 입에 담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느낀다. 20세기 이전 사람들은 성(性)과 성행위를 동물적인 욕망으로 보고 불경하게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섹시하다는 말이 칭찬일 정도로 인식이 바뀌었다. 죽음도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일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각이 퍼지고 있다. 특히 고령화 사회에서 죽음은 일상사가 될 전망이다. 최준식 이화여대 한국학과 교수는 “한국인은 평소 죽음에 관해 완전히 방치된 상태로 있다가 자신이나 가족의 죽음이 닥치면 속수무책”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옛날에는 천둥과 번개를 하늘의 노여움으로 여겨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 실체를 파악한 뒤부터는 공포심을 덜 느꼈듯이, 죽음에 대한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철학을 전공한 유호종 박사는 <죽음에게 삶을 묻다>라는 책에서 ‘죽음을 똥으로 볼 것인가, 된장으로 여길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임종 직전과 직후에 얼굴에 평화로운 표정이 깃드는 것을 보면 죽음은 똥보다는 된장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국에서 발간된 죽음학 책 <생의 마지막 춤>도 죽음을 벽으로 볼 것인지 문으로 볼 것인지를 묻는다.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임종을 맞는 일이 과거에는 다반사였다. 객사는 부정하다고 해서 임종을 앞둔 가족을 굳이 병원에서 집으로 옮겼다. 가족과의 눈맞춤은 삶을 마무리하는 의식이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손자는 자연스럽게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여겼다.

“한국은 가장 비참한 임종을 맞는 나라”

언제부터인가 역전 현상이 생겼다. 집보다 병원에서 임종을 맞으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병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실낱같은 삶을 부여잡느라 고통스럽고, 오랜 병치레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가족도 힘들다. 기적적으로 회복하는 사례가 극히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중환자실에서 온갖 고통을 받은 채 가족의 따뜻한 배웅도 없이 눈을 감는다. 윤영호 서울대의대 연구부학장은 “가장 비참한 임종을 맞는 나라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한국이라고 말할 것이다. 20년 동안 말기 암 환자와 가족들을 연구한 결과”라며 “임종을 앞둔 환자를 위한 병실은 늘 부족하고 응급실에서도 천대받으며 삶의 마지막을 맞는다. 환자는 생을 마감한 후에야 비로소 병원의 환영을 받는다. 수익성 좋은 장례식장으로 옮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5년 전쯤 40대 중반 남성이 구급차에 실려 서울대병원으로 들어왔다. 지방에서 십이지장암 수술을 받았는데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가족은 숨을 헐떡이는 환자를 살리고자 서울까지 왔던 것이다. 서울대병원에서 뾰족한 방법을 찾지 못한 가족은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환자는 곧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엔 간암 말기로 의식이 없는 남편을 위해 연명치료를 고집하던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 의학으로는 회복시킬 수 없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아내는 연명치료 중단을 결심했다. 의식이 없어도 청각과 촉각은 끝까지 남는다. 아내는 남편의 손을 잡고 귀엣말로 사랑을 속삭였다. 그제야 남편은 고통으로 찡그린 얼굴을 펴고 편안한 표정으로 생을 마무리했다.

이 두 사례는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이를 부정하고 의료의 힘으로 버티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가족은 끝까지 최선을 다해달라고 의사에게 요구하고, 의사도 인공호흡기로 대표되는 최신 의료 기기를 이용해 죽음의 시간을 늦추려고 애쓴다. 이런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자칫 환자에게 고통만 안겨줄 수 있다는 게 의료계의 목소리다. 서울대의대 윤영호 연구부학장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존엄사를 안락사처럼 죽게 한다는 의미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존엄하다. 살았을 때의 인간적인 모습을 깨면서까지 고통 속에 처참하고 비참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것은 존엄이 아니다.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고 고통 없이 영면에 드는 것이 존엄사다. 그런데 우리는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하느냐 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생명 경시 논란이 생긴다. 의학의 힘으로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도움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도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삶이고 그렇지 않다면 삶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연명치료 중단에는 소극적인 게 현실이다. 의사 출신인 안홍준 새누리당 의원은 “18대 국회에서 연명치료 중단을 골자로 한 존엄사법이 상정됐지만 논의조차 되지 못했다”며 “사회적 공론화가 이뤄진 후 법적인 지원이 마련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모파상·보들레르 등 유명 문학인과 일반인이 함께 묻혀 있는 몽파르나스 묘지는 프랑스 파리 도심에 있어 시민들이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공간이자 휴식처가 되고 있다. ⓒ 시사저널 포토
무의미한 연명치료, 환자에게 고통만

4년 전 위암이 온몸으로 퍼져 수술 등 어떤 치료로도 회복되기 어려운 환자가 있었다. 1년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문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작한 항암 치료였다. 면역력이 떨어지는 등 부작용으로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환자가 너무 고통스러워해서 막바지에는 항암 치료를 중단했고 고통을 줄이는 약을 사용했다. 환자는 가족에게 유머를 남길 정도로 편안하게 삶을 마감했다. 서울대병원 정현채 교수는 “당시 통증이 심해 마약성 진통제를 썼다. 연명치료 대신 고통을 덜어줘 생의 마무리를 편안하게 하는 편이 바람직하다”며 “그런데도 마약이라고 하면 중독 우려 때문에 거부하는 가족이 많아 안타깝다”고 전했다.

전 아무개씨(45)는 몇 년 전부터 매 연말이면 유서를 쓴다. 그는 “형식도 없이 내 생각을 정리하는 수준이지만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살지 선명해진다”며 “유산이 많지 않지만 남은 물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도 글로 남긴다”고 말했다. 평소 죽음에 관심을 두고 준비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사전의료의향서를 써두기도 한다. 말기 암이나 불치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기 위해 불필요한 심폐소생술 등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죽음을 준비한 사람은 삶을 보는 눈이 다르다. 문체부장관을 지낸 연극배우 유인촌씨가 그렇다. 그는 드라마나 연극을 통해 죽음을 숱하게 경험했다. 가까운 지인이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는 모습도 지켜봤다. 그는 “가족들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수명을 연장하려고 했지만 정작 본인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더 보내야 했을지 모른다”며 “나도 평소 가족에게 현대 의학으로 완치되지 않을 상태라면 차분하게 남은 시간을 잘 활용하겠다고 얘기한다”고 말했다. 그는 2006년부터 국립암센터 암퇴치백만인클럽 후원회장을 맡고 있다. 공직을 떠난 후 연극계로 돌아온 그는 되도록 따뜻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라고 했다. 유씨는 “죽음을 피하거나 젊음을 되돌리는 것에 매달리기보다는 어떻게 품위 있게 늙을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며 “세속적인 생활보다 타인을 위해 보람 있는 일을 하고자 해서 앞으로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 활동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삶을 보람 있게 사는 것은 웰빙(well being)이다. 웰빙은 웰다잉(well dying)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노성훈 연세의료원 암병원장은 “며칠 여행을 갈 때도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고, 가족에게 문단속 잘하라는 등의 당부도 한다. 하물며 다시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나면서도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 잘 준비하는 것이 웰빙이고 이는 웰다잉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도심에 공동묘지가 필요한 이유

미국의 한 심리학자가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공동묘지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각각 노트북을 떨어뜨렸는데, 묘지 안의 사람이 밖에 있는 사람보다 40%나 더 많이 도와줬다. 묘지를 산책하면 배려심이 더 커진다는 것이다. 프랑스·미국 등 서양의 경우, 도심에 있는 크고 작은 공동묘지가 시민들의 휴식처 노릇을 한다. 한국에서 공동묘지는 혐오시설로 퇴출당한 지 오래다. 자신의 미래를 멀리 내쫓는 셈이다. 건축가 승효상씨는 몇 해 전 강연에서 “우리나라 도시들은 다른 나라의 도시들과 다르게 시내에 묘지가 없다”며 “죽은 자와 공존해야 도시가 경건해진다”고 말했다.

2011년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노트>에서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죽음을 ‘꽃이 피었다가 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양에서는 아이들에게 집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사고나 늙어서 죽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으로 죽음을 접하도록 교육한다. 죽음에 대한 교육은 어릴 때부터 해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게 죽음학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 유은실 서울아산병원 병리과 교수는 “10대 이후부터는 나이 들어 병들고 죽는 것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해야 한다”며 “자동차 안전벨트 착용이 짧은 시간에 정착된 것처럼, 죽음 교육도 한 번 불이 붙으면 잘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병원은 환자를 살리는 곳이어서 늘 번잡스럽다.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적합하지 않다. 호스피스 병동이 따로 필요한 이유다. 병원은 존엄사 운운하지만, 이들을 위한 병동을 준비하는 데는 인색하다. 돈이 안 된다는 상업적 논리 때문이다.

정부는 2005년 암 정복 계획을 세우면서 2015년까지 호스피스 병상을 2500개로 늘리기로 했다. 그러나 현재는 1000개 남짓이다. 병상이 부족하니 일부 호스피스 병원은 ‘최장 한 달’ 하는 식으로 입원 기간에 제한을 둔다. 앙상하게 마른 말기 암 환자가 산소호흡기를 꽂고 구급차에 올라 병원 찾아다니는 일이 일어난다. 7월부터 호스피스 의료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기로 한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웰다잉 체크 리스트 


평소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하기

평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닥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고 품위 있게 마무리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사랑·감사·용서

완화치료 전문가인 아이라 바이오크는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으로 사랑, 감사, 용서를 들었다. 평소 생활에서 실천하면 임종 때에도 아름답고 인간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질환에 걸린 사실 환자와 가족이 공유해야

심각한 질환에 걸렸다면 환자와 가족이 그 사실을 공유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환자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삐뚤어진 관행이 있다. 국립암센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암 말기 환자 90% 이상이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고 싶어 한다.

 

의료진과 환자의 신뢰는 필수

의료진과 환자. 가족은 신뢰를 바탕으로 소통하며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무의미한 항암치료를 고집함으로써 환자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도 신뢰가 없어서 생긴 일이다.

 

시한부 삶 이해하기

시한부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의사가 3개월이라고 했다면 1개월부터 1년 이상까지 그 범위가 넓다. 몇 개월이라는 말에 함몰되기보다 남은 시간에 어떤 마무리를 할 것인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도움말=노성훈 연세의료원 암병원장·허대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정현채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교수·윤영호 서울대의대 연구부학장·안철우 강남세브란스병원 내분비내과 교수·유은실 서울아산병원 병리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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