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스모그 돔에서 인체실험 당한다”
  • 모종혁│중국 통신원 ()
  • 승인 2015.03.1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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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CCTV 전 앵커 고발 다큐…파장 크자 정부에서 언론·인터넷 차단

3월8일 낮 중국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시 중심가 종루의 한 백화점 앞에 시민 10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곧 마스크를 쓰고 ‘스모그는 암을 유발하고 사람에게 위험하다’ ‘스모그 퇴치는 정부에 책임이 있다’는 팻말을 든 채 침묵시위에 들어갔다. 같은 시간 산시성 정부 청사 앞에서도 5명의 시민이 기습 시위를 벌였다. 10여 분 만에 달려온 경찰에 강제 해산당하고 주도자 2명은 연행됐으나, 이들의 시위 소식은 이미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전송됐다. 이날 시위는 ‘스모그 위험에 관심 있는 엄마들’이라는 인터넷 모임이 계획했다. 공안 당국은 체포한 2명을 다음 날 풀어줬으나, 시위 관련 사진이나 글은 인터넷에서 모두 삭제했다.

매년 3월5일부터 양회(兩會·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가 개최되는 10일간 중국에서는 모든 집회가 금지된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시민이 용감히 나선 데는 한 다큐멘터리의 영향이 컸다. 2월28일 오전 중국 내 모든 동영상 사이트는 일제히 ‘돔 지붕 아래서 함께 호흡하는 공동운명체(穹頂之下同呼吸共命運)’라는 제목의 103분짜리 다큐를 공개했다. 제작자는 중국 국영 CCTV의 전직 앵커인 차이징(39·여)이었다. 그는 전문대 과정을 마친 뒤 후난TV 앵커로 일하면서 중국미디어대학을 졸업했다. 1999년 CCTV에 입사한 후 기자로 근무하다가 앵커로 발탁됐다. 2003년 중국에서 사스(SARS)가 창궐했을 때 취재기자로 맹활약해 주목을 받았다. 2006년부터는 매년 양회 기간 동안 ‘차이징의 양회 관찰’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정치인과 인터뷰를 했다. 2013년 차이징이 기자와 앵커로 일하며 겪은 일들을 엮어 펴낸 자서전은 100만부 이상 팔려 베스트셀러가 됐다.

중국의 살인적인 스모그로 인한 조기 사망자 수는 2014년 50만명에 달했다. ⓒ 연합뉴스
지난해 초 돌연 CCTV를 떠난 차이징은 다큐멘터리 제작에 매달려왔다. 자서전 출판으로 벌어들인 인세 100만 위안(약 1억7800만원)을 들여 중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국무원·발전개혁위원회·공업정보화부·환경보호부 등 정부 부처 고위 관리와 실무자를 인터뷰했고, 스모그로 고통받는 시민들을 취재했다. 지난해 베이징에서 스모그가 175일이나 발생했고, 해마다 중국에서 스모그로 인해 50만명이 조기 사망한다는 등 통계 자료도 구했다.

다큐, 48시간 만에 조회 수 2억회 돌파

차이징의 다큐는 공개되자마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방영된 지 단 하루 만에 9939만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고, 48시간 만에 조회 수 2억회를 돌파했다. 중국 내 SNS에서는 다큐 퍼나르기와 코멘트 남기기가 들불처럼 번졌다. 특히 차이징이 다큐를 제작하게 된 동기와 배경을 자세히 밝히면서 사회적 반향은 더욱 커졌다.

차이징은 “2013년 10월 말 출산하기 전 의사로부터 태아에게 양성 종양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갓 태어난 딸은 전신마취를 한 뒤 대수술을 받아야 했다”고 밝혔다. 그는 “베이징에서 스모그가 매우 심각했을 때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며 “과거에는 어디를 가든지 오염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딸을 낳은 뒤에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사실 차이징이 갓 출산했을 때 중국인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원정 출산’을 했기 때문이다. 차이징이 CCTV를 사직한 이유도 그런 비난 여론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차이징은 “아픈 딸을 충실히 키우고, 자라는 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사직 이유를 밝혔다. 차이징에 대한 오해는 순식간에 풀렸고, 그의 용기와 노력에 찬사가 쏟아졌다. 신화통신·인민일보·CCTV 등 중국 관영 매체도 주요 뉴스로 이 다큐를 조명했다. 3월1일 천지닝 환경보호부 부장은 취임 후 처음 가진 기자회견에서 “차이징의 다큐는 환경 보호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을 뒤바꾼 레이첼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에 비견할 만하다”며 “차이징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다큐는 중국 최고의 환경 전문가들이 증언하고, 다양한 통계를 공개해 신뢰도가 높았다. 특히 환경 보호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대형 국유 에너지 기업들을 정조준해 비판했다. 이들 기업을 단속할 힘조차 없는 환경보호부처 공무원들에 대한 인터뷰도 실었다. 또한 베이징 주민들이 마치 거대한 스모그 돔 안에서 인체실험을 당하며 사는 것처럼 묘사해 충격적이었다.

“환경 상황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 비판도

그러나 3월3일부터 에너지 기업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그들은 “우리는 국가에서 정한 표준에 맞춰 석유화학제품을 생산한다”며 “오염 방지 시설을 강화했고 청정 에너지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고 반박 성명을 냈다. 일부 대학교수와 지식인은 “경제 성장에 따른 부작용은 어느 나라든지 겪었던 성장통”이라며 “지금의 환경 상황을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비판했다.

사회적 파장이 점점 커지자, 3월6일 중국 정부는 차이징의 다큐를 삭제했다. 모든 동영상 사이트에서 다큐가 사라졌고 언론사 홈페이지에서는 관련 기사가 차단됐다. 3월12일 현재 중국 최대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에 차이징 다큐에 대한 설명은 나와 있어도, 관련 영상은 ‘이미 삭제되어 존재하지 않는 영상’이라고 나온다. 3월7일 천지닝 부장의 기자회견에서는 차이징 다큐에 대한 언급이나 질문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이런 중국 정부의 조치는 예상된 결과다.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환경오염과 스모그 문제를 꾸준히 부각시켜온 그린피스 중국지부의 홈페이지는 지난해 초부터 차단당했다. 그린피스는 금세기 초 중국 정부에 조사와 연구만 진행하겠다고 약속하고 베이징에 사무실을 열었다. 지난 10여 년간 환경보호부나 각 대학 연구소와 다양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해 광범위한 데이터를 구축했다. 차이징이 다큐에서 제시한 적지 않은 통계는 그린피스 중국지부가 발표했던 보고서를 기초로 했다.

중국 정부가 차이징의 다큐를 삭제한 이유는 간단하다. 예상보다 사회적 파급력이 컸기 때문이다. 차이징의 다큐가 차단되던 날, 베이징에는 올해 들어 가장 심각한 스모그가 뒤덮였다. 세계보건기구(WHO)의 PM 2.5 기준치(25㎍/㎥)보다 7~8배에 달하는 수치다. 지금도 베이징 시민들은 여전히 거대한 스모그 돔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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