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도 서러운데 도서관 이용료 내라고?
  • 제희원 인턴기자 ()
  • 승인 2015.03.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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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대학 졸업생 연회비제 도입…자리 놓고 선·후배 갈등

“지금까지 학교에 낸 등록금이 얼만데 취업도 안 된 학생들한테 돈을 더 뜯어가겠다는 건지….” 지난해 고려대를 졸업하고 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박 아무개씨(28)는 3월11일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려다 제지를 당했다. 고려대가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도서관에 출입하려면 연간 10만원을 내야 하는 연회비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직장인에게 10만원은 큰돈이 아닐 수 있지만, 백수 처지엔 큰 부담이 된다”며 “재학생 후배의 학생증을 빌릴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새 학기를 맞아 일부 대학 캠퍼스에서 재학생과 졸업생 사이에 갈등이 일고 있다. 졸업생들 때문에 도서관 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재학생들의 불만이 커지자, 일부 대학에서 졸업생의 모교 출입 통제에 나선 것이다. 서울대는 최근 600억원을 들여 개관한 제2중앙도서관 ‘관정관’에 졸업생 출입을 금지시켰다. 이 같은 조치에 재학생과 졸업생 간에 논쟁이 뜨겁다. 대학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다수 대학은 졸업생의 도서 대출에 ‘학교발전금’ 형태의 연회비 혹은 예치금을 내도록 하고 있다. 이에 더해 졸업생이 도서관을 출입하는 데도 돈을 내야 하거나 아예 출입을 봉쇄당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재학생 전용 도서관’으로 졸업생 출입이 금지된 서울대 제2중앙도서관 ‘관정관’, 위 작은 사진은 최근 SNS에서 유행한 졸업생 풍자 인터넷 유머들. ⓒ 시사저널 임준선
취업 준비나 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도서관 이용이 필요하지만, 졸업생에게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취업을 못해 졸업하고도 모교 주변을 맴도는 청년들에게 너무 가혹하게 구는 것 아니냐는 ‘미취업’ 졸업생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서울 시내 한 사립대를 졸업하고 구직 활동을 하고 있는 최성웅씨(28)는 “스스로 취업 양성소를 자처하고 있는 대학이 학생들의 고시 합격 여부나 취업률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졸업생의 고통을 외면하려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학부 마지막 학기에 재학 중인 김현희씨(22)는 “기업에서 요구하는 스펙을 만드는 비용을 마련하는 데도 등골이 휜다. 도서관 출입에까지 돈을 내야 하는 것은 너무한 것 같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내고 다녔던 모교가 이제는 졸업생을 상대로 장사하겠다는 심보”라고 비판했다.

재학생들은 이런 ‘선배’들의 불만이 마땅찮은 눈치다. 졸업을 하고도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화석 학번’에 비유하며 조롱하는 풍자도 등장한다. 학교에 오래도록 머무르는 선배들을 풍자하는 인터넷 유머 그림인 ‘짤방’이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유행하고 있다. ‘중도 지박령(중앙도서관에 붙어사는 귀신)’이란 표현도 등장했다. 15학번 새내기인 이현승씨(19)는 “취업 준비가 어렵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졸업생이 재학생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학에 입학한 14학번 조혜선씨(20)는 “도서관 이용 비용은 등록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인데 졸업생이 무료로 이용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밝혔다. 실제로 각 대학 도서관에는 이른 아침부터 자리를 잡고 있는 졸업생을 향한 재학생의 민원이 자주 접수된다.

‘졸업유예제’ 폐지로 상황 더 악화

일부 재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래도 선배인데, 너무 이기적인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사정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재학생을 탓할 것만도 아닌 듯하다. 그 안에 우리 대학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학생 정원의 20%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열람실을 설치해야 한다는 교육부의 ‘대학 설립·운영 규정’을 지키는 대학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대학의 약 60%가 ‘좌석당 학생 수 5명 이하’라는 규정을 지키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휴학생과 졸업생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대학 열람실 좌석 상황은 훨씬 열악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작 대학은 슬쩍 뒤로 빠진 형국이다. 수도권의 한 대학 관계자는 “졸업생이 몇 만 명에 달하는데, 이들의 도서관 이용에 제약을 두지 않으면 재학생들의 불만이 쏟아져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토로했다. 졸업생이 ‘후배’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면서도 모교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졸업유예제’가 폐지되면서 나타난 후유증이 크다. 그나마 재학생 신분을 유지하려면 등록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떠밀려나듯 졸업생 신분이 된 경우도 많다. 이들이 학교를 떠나서 공부할 곳이 마땅찮다. 우리나라 공공도서관 수는 미국의 절반, 독일의 6분의 1 수준에 불과해서 공공도서관을 이용하기도 편치 않다. 학교에 취업 정보나 취업 관련 스터디가 많은 것도 대학 도서관을 찾는 이유다. 무엇보다 길어진 구직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각종 취업 준비를 위한 비용을 마련하고 있는 이들에게 카페와 독서실 비용 역시 큰 부담이 된다. 대학교육연구소 임은희 연구원은 “기존에는 책 대출 등 일부에만 적용되던 게 도서관만 들어가려 해도 무조건 돈을 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사회뿐만 아니라 대학 안에서도 미취업 졸업생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진국들이 대학 도서관을 시민들에게 개방하는 흐름과 대조적으로 모교 졸업생까지 대학 출입에 제한을 두는 것은 과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도서관 개방’ 문제를 두고 재학생과 졸업생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 대학이 너무 쉬운 방법을 택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졸업 이후에도 학교 도서관을 이용하기 위해 종종 모교를 찾는다는 이준영씨(28)는 “대학의 기능은 단순히 기술로서의 학문을 가르치는 데만 있지 않다. 국가와 지역사회의 지적 성숙을 담당하고 있는 대학이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시민들, 특히 졸업생을 가로막는 것은 대학의 본령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밝혔다.

실제로 경희대의 경우, 졸업생은 도서관 열람은 물론 도서 대출도 신청 서류만 작성하면 별다른 비용 없이 가능하다. 졸업생과 재학생 간의 도서관 이용에 큰 차이를 두지 않는 것이다. 경희대 도서관 관계자는 “도서관 이용자 수 자체가 늘어나면서 학교 입장에서 부담되는 게 사실이지만, 경제적 비용 문제로만 볼 것이냐 아니면 대학 구성원의 범위를 더 넓혀 졸업생 역시 서비스 대상자로 규정할 것이냐 하는 관점의 차이라고 본다. 멀리 내다보았을 때 모교에 대한 애교심을 높일 수 있다”며 “시험 기간엔 재학생 우선으로 좌석을 배정하고, 졸업생에게는 책 대출 권수에 제한을 두는 방법으로 재학생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갈수록 깊어지는 취업난이 캠퍼스 안까지 황량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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