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가 임성한 작가 ‘떠받드는’ 이유
  • 하재근│문화평론가 ()
  • 승인 2015.04.01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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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친엄마 며느리가 돼 복수...막장 논란에도 계속되는 임성한 드라마

“저 정도 드라마는 정말 나도 쓸 수 있겠다. 다만 창피해서 내 이름 걸고는 쓸 수가 없다.” 한 지인이 국내 최고 인기 작가의 드라마를 보면서 한 말이다. 바로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 얘기다. <오로라 공주>는 MBC에서 2013년 방영한 150부작 드라마로 당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가벼운 일일드라마임에도 사람들이 연이어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갑자기 하차하는 인물도 많아 ‘임성한 데스노트’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정말 드라마를 그때그때 막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퍼져 나갔다. 사람이 죽기 전에 꼭 유체이탈을 한다는 초자연적인 설정이 등장하기도 했다. 하도 황당하고 어이없는 설정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니, ‘저 정도라면 나도 쓰겠다’는 지인의 말에 공감이 갔던 것이다.

<오로라 공주>와 이를 방영한 MBC에 네티즌의 공분이 쏟아졌고, 임성한 작가는 한국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는 작가가 됐다. <오로라 공주>를 그해 최악의 드라마로 꼽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MBC는 최근 들어 임 작가에게 다시 일일드라마를 맡겼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압구정 백야>다. 임 작가가 그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방송사에서 그에게 계속 작품을 맡기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진다. MBC는 심지어 <압구정 백야>의 연장 방영을 결정하기도 했다. 도대체 방송사는 왜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임 작가를 ‘받들어 모시는’ 것일까.

ⓒ MBC 제공
종편·케이블 도전에 ‘시청률 지상주의’ 빠진 지상파

2010년만 해도 KBS 미니시리즈인 <제빵왕 김탁구>가 49.3%의 시청률을 올렸다. 2011년엔 SBS의 <싸인>이 25.5%를 기록했다. 2012년엔 MBC <해를 품은 달>이 42.2%, 2013년엔 SBS <별에서 온 그대>가 28.1%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시청률 20%를 넘는 미니시리즈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14년엔 SBS <너희들은 포위됐다>가 14.2%로 그해의 미니시리즈 중 최고 시청률 소리를 들었다. 2014년 방영된 총 35편의 지상파 미니시리즈 중에서 8편이 시청률 10%의 벽을 넘지 못한 상황이다. 최근엔 저 유명한 현빈을 내세운 <하이드 지킬, 나>마저 3.9% 시청률로 애국가와 경쟁하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어려움을 겪는 사이 tvN·JTBC 등 케이블TV와 종편 방송사들은 약진했다. tvN은 <미생> <응답하라 1994> 등 드라마 히트작과 <삼시세끼>

<꽃보다 할배> 등 예능 히트작을 잇달아 내놓았다. JTBC는 <썰전> <비정상회담> 등 정보성 토크쇼로 지상파 예능을 위협했다. 최근엔 개그계의 철옹성이었던 <개그콘서트>마저 위상이 흔들리면서 일부 젊은 층이 tvN의 <코미디 빅리그>를 더 선호하는 양상까지 보인다. 이런 배경에서 지상파 방송사들의 위기감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젠 무조건 시청률이다. 시청률이 그 무엇보다 우선되는 가치가 됐다. 과거 지상파 방송사는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이 아닌 ‘방송기관’으로서 공공기관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요즘 들어선 자신들의 이익만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듯한 분위기다. 단막극을 폐지한다든가, 신규 프로그램을 잇따라 신설했다가 조급하게 퇴출시킨다든가, 타사에서 성공시킨 설정 베끼기 등이 나타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그래서 임성한 작가다. 임성한 작가에겐 현빈도 못해낸 시청률 10% 돌파를 기본으로 해내는 괴력이 있다. 물론 국민 드라마나 엄청난 한류 드라마를 터뜨릴 정도의 파괴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기본은 한다. 성과에 집착하는 방송사 경영진에 이보다 ‘효자’는 없다.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 말이다. 시청률 걱정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선 정말 속 편하게 해주는 존재다. 일일드라마는 상대적으로 미니시리즈보다 시청률이 잘 나오는 부문이지만, 전반적인 고전으로 위축된 심리가 일일드라마에서조차 검증된 작가만 쓰도록 하는 것이다. 상황이 안 좋을 땐 모험 회피가 최우선 가치가 된다. 특히 임성한 작가는 스타 캐스팅 없이도 실패하지 않기 때문에 방송사 입장에선 더욱 요긴하다. 방송사도 임 작가에게 편성을 내줄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가 논란과 안티를 몰고 다닌다 해도 말이다. 중요한 건 오직 수치뿐이다.

ⓒ MBC 제공
자극적인 드라마 범람으로 영상문화 퇴행

방송사 경영 차원에선 시청률 수치가 절대적 가치일지 몰라도 우리 드라마 전체로 볼 땐 그렇지 않다. 기업이 오직 점유율 성장을 위해 화학첨가물로 뒤범벅된 음식을 팔았을 때 그것이 과연 우리 음식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질까? 그 반대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극적인 드라마가 범람했을 때 우리 영상문화는 퇴조할 가능성이 크다. 바로 이 점이 문제다.

임성한 작가의 <오로라 공주>가 ‘저런 드라마는 나도 쓸 수 있겠다’는 탄식을 불러일으킨 건, 극의 전개가 정말 막 나간다는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치밀한 구성과 개연성 있는 전개, 깊이 있는 캐릭터 등 창작의 고뇌가 느껴지는 완성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인물들의 성격이 이유 없이 바뀌고, 주요 인물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극의 방향이 틀어지고, 러브라인이 뜬금없이 연결됐다. 심지어 남자 주인공이 후반부에 바뀌기까지 했다. 원래 소설가가 주인공이었는데 갑자기 매니저로 변한 것이다. 얼마나 무계획적으로 극이 흘러가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난맥상이었다. 그러니 ‘나도 쓰겠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이런 드라마의 승승장구는 한국 드라마의 수준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압구정 백야>에서도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여주인공의 신랑이 결혼 당일에 조폭과 시비가 붙어 한 대 맞고 죽었고, 죽기 전에 귀신을 본다는 등 초자연적 설정이 여전하며, 임 작가의 조카인 연기자 백옥담의 과도한 부각으로 드라마 사유화 논란까지 일었다. 하지만 문제는 인기가 있다는 점이다. 귀신이 나오고, 딸이 친엄마의 며느리로 들어가 복수하고, 신혼 첫날밤에 ‘위아래’ 춤을 추더니 네쌍둥이를 낳는다는 식의 자극적인 설정에 시청자들이 빨려든다. 그 시청자들이 시청률을 올려주니 방송사는 임성한 작가 카드를 버릴 수가 없다. 결국 방송사가 진정으로 ‘받들어 모시는’ 건 임 작가가 아닌 시청자들이었다. 바로 시청자가 임 작가에게 편성 철밥통을 헌납한 장본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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