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 그 자체인 235억짜리 그림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5.04.02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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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보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 “눈이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전시가 서울에서 열린다. 마크 로스코를 떠올리면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 나오는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이 생각난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이 에니그마라는 방식을 도입해 단어 하나로 1해5900경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가짓수의 암호를 만들어내자 튜링은 “기계가 만드는 암호는 기계가 해결해야 한다”며 2년에 걸쳐 암호 해독기 ‘봄(Bombe)’을 개발해 독일군 암호를 해독했다.

많은 사람은 로스코의 작품을 암호처럼 대하고 있다. 10년 전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그림이 2240만 달러(약 235억원)에 낙찰되자 세상 사람들은 ‘비싼 그림 값’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면서 대개의 사람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도대체 ‘나도 그릴 것 같은’ 아니면 ‘아무것도 그린 것 없이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그림을 왜 큰돈을 주고 사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로스코의 그림에 1해5900경에 달하는 마음의 경우의 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면 이해가 갈까.

① 로스코 Untitled 1970 ② 로스코 Untitled 1949 ③ 로스코 Antigone 1939-1940 ⓒ 1998 Kate Rothko Prizel and Christopher Rothko / ARS, NY / SACK, Seoul
1해5900경의 경우의 수  

사실 그의 그림은 모호함 그 자체다. 어떤 것을 재현하거나 제시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그림을 보는 사람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는 관람객의 마음속에 무언가 움직임이 일고 이것이 신체적으로까지 반응하기를 원했다. 그의 그림이 갖는 모호함이 보는 이들에게 각각의 생각과 느낌, 아는 만큼 반응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 반응은 누구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라는 자존감을 부여한다. 

얼마 전 ‘파검 vs 흰금 드레스’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이 논쟁으로 인해 우리는 함께 똑같은 것을 봐도 각자의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우리는 사회 통념상 기호화된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함으로써 소위 ‘소통’이 된다고 생각해왔지만 그 소통의 이면에는 서로 다른 것을 자기 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이번 논쟁으로 드러났다.

‘나처럼 남들도 그렇게 볼 것’이라는 자신감의 근거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모두 독재에 가까울 만큼 자기중심적이다. 또 사회적, 공동체적 소통의 중압감 때문에 같은 것을 다르게 보고도 말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큰 흐름이나 대세에 묵시적으로 따름으로써 자신이 공동체에서 이탈하지 않는 ‘개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고, 그렇게 되는 게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사회는 그 존속을 위해 묵시적인 파쇼가 존재하고 그런 점에서 폭력적이다.

우리가 그동안 보고 공부했던 그림도 폭력적이다. 무엇을 그렸는지 그리고 그 대상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 작가의 의도는 무엇인지에 대한 공식이 있었다. 이것도 사회적인 합의를 중시하는 계몽주의 시대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로스코의 작품은 민주적이다. 누구라도 그 그림 앞에 서면 소위 소통을 위한 기호화된 언어를 떠올릴 수 없기 때문에 사회적 소통 의무에서 자유스럽다. 그의 그림은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가 아닌 그만의 독창적인 기호이자 언어이기 때문이다.  

좋은 스피커 앞에 서면 그 파동이 몸에 전달되는 것처럼 로스코의 작품은 어쩌면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감상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면서 느껴진 느낌에 몸이 반응하는 그런 그림이다. 사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보면서 당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체적인 것 또는 익숙한 기호를 떠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기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아는 것만 본다’는 것인 동시에 ‘모르는 것은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낯선 것에 대해서는 당황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처음 보는 것에 대해 확신에 차서 말하기도 한다. 그러다 판단을 그르치기도 한다. 이것이 일상이다. 우리는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르는 낯선 물건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거울을 처음 본 사람은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이내 그게 자신의 얼굴이라고 확신한다. 처음 보는 거울 속의 이미지를 자신의 얼굴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아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 처음 보는 것도 스스로 기호화하여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앨런 튜링이 경우의 수를 대입해서 하나의 결론을 향해 가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로스코의 작품 앞에서 느껴지는 모든 가능한 떨림과 반응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그가 유대인이고 러시아 태생이며 신비주의자인 동시에 신화와 심리 분석서를 탐독했고, 렘브란트의 그림, 모차르트의 음악, 니체의 철학에 심취했으며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등의 ‘지식’은 몰라도 된다. 이런 선입견은 그의 그림을 보는 것을 방해할 뿐이다. 

새로운 것, 다른 것들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고 분석해서 스스로 기호화하는, 즉 새로운 기호로 만들어 입력하는 일이야말로 창발의 과정이자 창조 그 자체다. 이렇게 창조된 새로운 낯선 것, 모르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창조적 기회를 제공한다. 로스코를 통해 세속적 관심이나 사회적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소통의 의무감에서 벗어나 창발적인(Emergence) 그림보기를 시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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