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판성 반성할 때 치욕과 고통의 역사에서 벗어나”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4.0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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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10권 완간한 역사학자 김기협

“지금 우리 사회는 보통 사람의 의견을 인정하지 않고,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진보나 보수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입장에서 얘기하면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를 비판하더라도 ‘진보의 이름으로’ ‘보수의 입장에서’ 비판한다는 전제부터 내세우니, 상식의 기준에서 비판하는 얘기조차 나올 발판이 없다.”

서울대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역사 연구에 뜻을 두고 사학과로 전과해 평생 역사학자로 살아온 김기협씨(65)가 최근 역작 하나를 완성했다. 3년 걸려 쓴 10권짜리 <해방일기>다.

김씨는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지난 3월25일 오후 그는 해방 공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덕수궁 정동길을 찾았다. 독자 초청 강연에 앞서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참이었다. <해방일기>를 완성하면서 그가 던진 메시지가 눈길을 끈다. 해방 공간을 채웠던 좌익과 우익을 떠나 ‘중도’를 앞세워 한국 사회의 미래까지 전망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중도’에 대해 물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니까 중도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안타깝다. 부정적인 정의에 그치게 된 건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맞물려 있다. 해방 공간에서 중도는, 원칙과 상식에 입각해 보통 사람이라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을 뜻했다. 원래는 중도가 사회의 정치적 태도의 주체이고, 극좌와 극우는 거기에 기생하는 주변적 존재였다. 해방 시점에는 그렇게 시작했다. 그런데 점차 극우·극좌가 비대해지면서 중도의 입지가 사라져버렸다. 유신 시대, 양극화가 극단적인 시대에 중도 얘기가 나왔을 때도, 중도는 단지 폼 잡는 데만 쓰였다. 지금도 진보 대 보수라는 대립적 인식에 너무 치우친 면이 있다.”

“지금의 문제 해방 공간에서 답 찾을 수 있어”

김씨가 해방 공간에서 ‘중간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은 민족주의-민주주의-사회주의를 배합하려 한 그들의 노력이 정당한 것이었으나 외세의 개입 때문에 좌절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경제 조건이 각박하고 문화 조건이 척박하던 해방 공간 속에서도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여운형·김두봉·김규식·안재홍·홍명희 같은 이들의 노력과 뜻을 전하고 싶었다.”

김씨는 20세기 민족 비극의 주된 원인을 세계 정세의 변화와 외부 세력의 작용에 있다는 ‘외인론’에 둔다. 어떤 상황이든 내인과 외인이 어우러져 빚어지는 것이지만 외인론의 관점에 더 기울고 싶어 한다. 그가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데 도입하는 상황의 틀로 ‘서세동점(西勢東漸)’을 내세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세동점의 상황에서 중간파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세력이 있었다. 김씨는 이 악당들의 정체를 ‘매판(買辦) 세력’이라고 밝혔다.

“친일파의 형태로 존재를 시작한 이 세력은 외부의 힘을 발판으로 내부 권력을 장악하고 외부 세력의 이익에 봉사하면서 ‘떡고물’을 주워 먹는, 이 사회의 기생충이다. 자기의 조그만 이익을 위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것이 이 세력의 속성이다. 덩치가 커진 기생충 중에는 스스로 ‘외부 세력’이 돼 과거의 경쟁자들을 매판 세력으로 부려먹는 일도 있다.”

김씨는 ‘국가주의’를 싫어한다.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하는 제도’로 기능하는 국가가 힘없는 백성에게 독점한 폭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꼴을 너무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내가 민족주의를 중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국가주의에 대한 미움이 더한 면도 있다. ‘상상의 공동체’니 ‘발명된 전통’이니 하며 민족주의를 폄훼하는데, 그런 말을 쓴 사람들이 실상 겨냥한 것은 ‘내셔널리즘’이다. 서양식 근대 민족주의를 가리킨 것인데, 민족주의라기보다 국가주의라고 봐야 할 것이다.”

‘사이비 국가’ 기원도 해방 공간에서 찾아

그렇다고 국가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살아오는 동안 국가주의의 폐해를 너무 많이 겪다 보니 국가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은연중에 갖게 된 것이다. “공자님도 말씀하셨다. ‘그냥 아닌 것(非)’보다 ‘비슷하면서 아닌 것(似而非)’이 더 나쁘다고. 해방 후 이 나라의 역사에서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국가가 아예 없던 식민지 시절에도 겪지 않던 참혹한 전쟁을 이 땅에서 치러야 했다. ‘한민족의 국가’를 자칭하는 두 개 정권 아래 민족사회가 동강 나 서로가 서로를 괴물처럼 싫어하고 원수처럼 미워하는 수십 년 세월을 겪어야 했다.”

김씨는 우리가 왜 이런 ‘사이비’ 국가를 갖게 됐는지 해방 공간의 역사 속에서 이유를 살폈다. 그리고 이 사이비 국가의 특성을 알아봤다. “이 특성 중 상당 부분이 지금의 대한민국에 남아 있다. 민족 분단의 이유를 흔히 냉전으로 생각해왔는데, 냉전이 끝나고도 아직까지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이 사이비 국가의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외세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쥔 자들만을 ‘성공’한 자로 받들며 좋은 뜻을 갖고도 좌절당한 이들을 무시하는 이 사회의 풍조가 바로 매판 세력의 속성이다. 남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나 자신의 매판성을 반성할 때 치욕과 고통의 역사를 벗어나는 길이 열릴 것이다.”

김씨는 <해방일기>에 이어 ‘냉전 이후’ 연구에 들어갔다. 이 작업에서는 1990년대 남북 관계에서 드러난 사이비 국가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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