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남자는 캐주얼화를 신는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5.04.16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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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함과 패션으로 무장…허시파피 등 매년 10% 이상 성장

외국계 기업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직장인 김상민씨(41)는 외부 미팅이 많다. 늘 정장 차림으로 다니는 그는 신발만큼은 볼이 죄지 않고 굽이 고무로 되어 있어 발이 편안한 캐주얼 구두를 신는다. 이런 캐주얼 구두의 상판은 드레스 슈즈와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밑창과 굽 부위가 조금 다르다. 하지만 비즈니스 미팅용 드레스코드에 어긋나는 게 아니다. 그의 신발장에는 캐주얼 슈즈 또는 컴포트 슈즈라고 불리는 발이 편한 구두가 4켤레나 있다. 슬림한 밑창에 구두 앞코 부위가 날렵한 ‘정통 드레스 슈즈’는 특별한 날을 빼고는 신지 않는다. 캐주얼 구두의 편안함을 못 따라오기 때문이다. 김씨 같은 직장인이 요즘은 드레스 슈즈 고수파보다 훨씬 많다. 이는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통상적으로 구두라고 불리는 정장용 구두가 대표 상품인 제화기업의 매출은 줄어들고 캐주얼 슈즈, 컴포트 슈즈라고 불리는 신발을 만들어 판매하는 기업의 매출은 연평균 10% 이상씩 늘어나고 있다.

ⓒ 시사저널 우태윤
지난해 9월 패션산업연구원이 발표한 ‘2014 패션 시장 규모 조사’에 따르면 매출액 1000억원 이상의 신발기업 중 정장 구두의 대명사인 금강·이에프씨(에스콰이어)·소다는 3년 평균 매출 성장률(CAGR)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반면 캐주얼 브랜드 구두이자 유통 채널인 레스모아나 캐주얼화와 운동화 편집 유통매장인 ABC마트코리아는 CAGR이 각각 24.30%와 16.30%를 기록했다. 캐주얼화 시대의 도래는 매출 500억원대 이하 기업군의 통계 자료를 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캐주얼로 바뀌는 직장인 드레스코드

컴포트 슈즈의 선두 주자인 허시파피(HPK)를 비롯해 가버(동승통상), 바이네르(안토니) 등은 소매가 기준으로 500억원 안팎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허시파피와 가버는 3년 평균 매출 성장률이 10%를 넘기고 있다. 캐주얼화 유통기업을 빼고는 가장 큰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드레스 슈즈와 캐주얼 슈즈로 영역을 나눠 조사한 자료는 2012년 한국섬유산업연합회가 조사한 기록이 유일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캐주얼 슈즈 시장 규모는 2009년 3632억원에서 2012년 6002억원으로 급증했다. 이후 관련 통계조사 업무를 맡고 있는 패션산업연구원에서는 업체별 통계 자료를 내놓고 있다.   

어떤 통계를 보더라도 구두 시장이 빠르게 캐주얼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업계에서는 직장인의 드레스코드가 정장에서 캐주얼 쪽으로 바뀌면서 이런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장류의 옷이나 드레스 슈즈가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과거 성인복 시장의 메이저가 정장류였다면 요즘은 출근복도 캐주얼로 바뀌었다. 덩달아 신발 시장에서도 드레스 슈즈의 퇴조와 함께 캐주얼 신발이 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캐주얼 신발에서 특히 돋보이는 곳은 컴포트 슈즈 분야다. 흔히 세미 캐주얼이라고 불리는 정장과 캐주얼에 모두 신을 수 있는 신발군, 그중에서도 착용감이 편한 캐주얼화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허시파피코리아에 따르면 컴포트 슈즈는 최근 10년간 판매량이 매년 20% 이상 성장하고 있다. 컴포트화 시장으로 분류될 수 있는 시장의 규모가 연 5000억원대에 달한다. 이는 헬스적인 기능성을 강조한 기능화와는 또 다른 시장이다. 특히 중·장년층에 집중됐던 컴포트 슈즈 소비층이 최근 몇 년간 패션성이 더해지면서 30대와 40대를 전후한 여성들에까지 확대되고 있다고 한다.

‘캐주얼-컴포트’란 두 단어로 대표되는 라인업을 확보하지 못한 기업은 시장에서 도태되고 선점한 신흥 강자들이 커가면서 구두 시장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 시사저널 우태윤
정윤수 허시파피코리아 대표는 국내 컴포트 시장 성장을 끌어낸 주인공이자 산증인이다. 2004년 화승의 구조조정으로 허시파피를 들고 독립한 그는 분사 당시 100억원 안팎이던 매출을 10년 만에 500억원대로 끌어올리며 허시파피를 국내 대표적인 컴포트화로 성장시켰다. 미국 3대 캐주얼화 브랜드인 허시파피는 국내에서는 라이선스로 생산·출시되고 있다. 국내 신발산업이 사양길이라지만 미국 본사의 라인업을 수입한 물량 25%를 뺀 나머지는 국내 생산품이고 모두 가죽 제품이다. 이는 국내 소비자의 취향과 관련이 깊다. 정 대표는 “국내 소비자는 디테일에 대해 깐깐하다. 중국이나 동남아산에 비해 국내 생산품의 디테일이나 완성도가 높다.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도는 엄청나다. 국내 트렌드에 발 빠르게 대응하려면 국내에 생산 라인이 있어야 가능하다. 수입을 하면 주문-생산-운송 기간만 3~4개월이 걸려 수요에 제대로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밝혔다. 허시파피는 국내 소비자 취향에 부응하기 위해 디자이너를 따로 두고 제품 기획·생산·유통까지 자체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화승 시절 상품 기획을 담당했던 정 대표는 “1990년대에는 아웃도어에 초점이 맞춰져 허시파피도 무겁고 아웃도어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분사하면서 원래 미국 본사의 허시파피 콘셉트인 ‘컴포트 캐주얼’로 방향을 바꿨다. 국내의 복장 흐름도 캐주얼로 가면서 우리 신발과 흐름이 맞아떨어졌다”고 설명했다.

분사 전 모기업이 흔들리면서 브랜드 이미지가 하락한 상태였고, 분사 몇 년 후에는 금융위기로 어려웠지만 허시파피는 착실한 성장세를 보였다. 정 대표는 어려움을 넘길 수 있었던 이유로 “직원과 생산을 맡은 협력업체의 원활한 협업”을 꼽았다. 분사할 때 8명으로 시작한 인원이 현재는 15명으로 늘어났지만 원년 멤버 중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둔 직원 외에는 그대로 있다. 대신 인력 운용은 타이트하게 가져가 비용 발생 요인을 최소화하고 있다.  

허시파피의 매출 구조를 보면 여성화보다는 남성화가 강세다. 정장 느낌의 시티캐주얼 라인의 매출 비중이 크지만 최근 들어 젊은 층을 겨냥한 데크 슈즈 스타일의 퍼피러브 시리즈가 잘 팔리고 있다. “과거와는 달리 패션에 민감했던 1990년대의 20~30대가 40대에 편입되면서 검은 정장 구두 고수파가 퇴조하고 있다. 남자도 10가지 정도의 화장품을 쓴다는 조사 결과처럼 요즘 40대는 패션에 민감하고 캐주얼화를 고르는 안목도 까다롭다.”

그는 캐주얼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만큼 당분간은 성장 목표를 높게 잡기보다는 소비자 선호도나 브랜드 인지도에 더 신경 쓸 예정이다. 한 번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내실을 다져야 할 타이밍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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