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곽 길을 걸으며
  • 김인숙 소설가 ()
  • 승인 2015.04.16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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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날씨 좋은 날, 지인들과 함께 서울 성곽 길 일주를 했다. 성곽 길 일주는 10시간가량이나 걸리는 대장정이다. 안내지에 의하면 성인 남자 기준으로 3500칼로리 이상을 소비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10시간 내내 성곽 길은 오래 걷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여행객을 참으로 소박하게 감싸준다. 앞서서 불러주고 뒤에서 따라와준다. 짐짓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도 하고, 도심의 허접한 풍경 속에 문득 도도히 숨어 있기도 하다. 성곽 길은 조선 500년 역사의 풍경이기도 하되 지난 몇 십 년 동안의 근대화의 풍경이기도 하고, 도시의 풍경이기도 하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풍경이기도 하다. 사실 이 성곽은 너무나 많은 얘기를 품고 있어서 일주를 끝마친 후에는 아픈 다리보다 머리가 울리는 느낌이 더 크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걸 다 담지 못하는 머리의 울림이다. 그 이야기들을 분간하느라 집에 돌아와 성곽 길 자료들을 찾아본다.

서울 성곽에 관련된 전설과 설화, 문화유적 등은 짧은 글로는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끌었던 것 중 하나는 흥인지문, 즉 동대문에 관련된 이야깃거리다. 흥인지문에서 종각까지는 전기수들이 활약하는 공간이었다고 전해진다. 전기수, 즉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이다. 책을 읽을 수 없고,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전기수에게 몰려들어 이야기를 들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이야기는 사람을 불러 모은다. 전기수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던 사람들 중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이 왔다가 인생이 바뀌어 돌아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참회도 있겠으나, 그동안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이 나라와 사회와 구조로 인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가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선동하지 않았어도 그리 되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의 힘이고 문화의 힘이다.

서울 성곽 길은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대상이다. 10시간 돌아보니 이 길, 세상 사람들에게 목청껏 자랑해도 좋겠다 싶었다. 그러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새겨봐야 할 것도 있다. 성곽 길을 가던 중에 글자가 새겨진 성곽의 돌을 발견한다. 어느 구간의 어느 공사를 누가 맡았다고 글자로 뚜렷이 남겨놓은 돌이다. 그가 누구든 책임을 졌다는 소리고, 또한 그 돌이 삭아 사라질 때까지 책

임을 지겠다는 소리다. 그 돌은 600년이 넘도록 삭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 한 인간의 책임은 그 인생과 함께 사라질지 모르지만 한 사회의 책임은 역사와 함께 남는다. 이야기로도 남고 기록으로도 남는다. 이 아름다운 유산과 함께 그 돌이 전하는 소리를 우리 마음속에 새겨야 하지 않겠는가.

성곽 길에서는 자주 서울 한복판이 내려다보인다. 오래전 임금이 살았던 궁궐만 보이는 게 아니라 청와대도 보이고 관청들도 보인다. 좀 더 많이, 보통 사람들 사는 곳이 보인다. 그 한가운데에 책임을 지는 돌이 있다. 새기고 또 새겨봐야 할 일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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