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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 한국의 가벌] #24. 박용만, 처가 통해 노태우 집안과 연결

창립 119년 역사 따라 혼맥 ‘쭉쭉’…LG·SPC그룹과도 인연

소종섭│편집위원 ㅣ | 승인 2015.04.30(Thu) 18: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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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성 중앙대 이사장이 지난 4월21일 중앙대 이사장과 두산중공업 회장,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등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박용성은 이날 “최근 중앙대와 관련해 빚어진 사태에 대해 이사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 대학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이 과정에서 논란과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학내 구성원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말했다.

지난 3월24일 박용성은 이용구 총장과 보직교수 등 20여 명에게 “인사권을 가진 내가 법인을 시켜서 모든 걸 처리한다. 그들(대학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비상대책위 교수들)이 제 목을 쳐달라고 목을 길게 뺐는데 안 쳐주면 예의가 아니다. 가장 피가 많이 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내가 쳐줄 것이다”라는 메일을 보냈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대한체육회장,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두산그룹 회장 등을 지낸 이력과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막말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회적으로 파문이 커지자 사퇴한 것이다.

   
2005년 6월 박용만의 장남 박서원의 결혼식에 두산가 사람들이 참석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창업주 이름 딴 ‘박승직 상점’이 모태

박용성은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의 손자다. 박승직과 그의 형 박승완은 1882년 경기도 광주군 임의실(현 성남시 분당구 이매동)에서 포목 판매업을 시작했다. 1896년 8월1일에는 종로4가 15번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포목상이었다. 종로4가에는 당시 조선 후기 3대 시장의 하나인 배오개 시장이 있었다. 박승직 상점은 영국산·일본산 등 다양한 직물을 취급했다. 그 후 업종 다양화를 추구해 미곡·식염 등의 위탁업도 겸하고, 소매뿐만 아니라 도매업도 했다. 1922년 영업세 실적에서 경성(서울)에 있는 한국인·일본인 포목상 134명 중 6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거상으로 성장했다. 박승직에게는 승완·승기 두 명의 형과 누나, 두 남동생과 두 여동생이 있었다. 박승직과 사업상 인연이 깊었던 큰형 박승완은 1889년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고향 광주에 전답을 사고 종로4가 집을 박승직과 함께 구입할 정도로 사업에도 성공했으나 일찍 운명을 달리했다. 오늘날 두산그룹의 효시가 바로 박승직 상점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두산의 역사는 올해 창립 119주년을 맞았다. 기업 가운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

창업자 박승직은 17세에 보부상으로 시작했다. 조선말에는 관직에도 진출해 정삼품인 중추원의관을 지냈다. 1905년 한국 최초의 경영인단체인 한성상업회의소가 설립되자 이듬해 상임의원에 피선되는 등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렸다. 일본으로부터 얻은 1300만원의 차관을 갚기 위해 펼쳐진 거족적 국민운동인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해 당시 이 운동을 주도했던 대구 광문사에 70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1915년에는 배오개 자택에서 부인 정정숙 주도로 ‘박가분’이란 화장품을 내놓아 큰 인기를 끌었다. ‘박가분’은 국내 화장품의 효시다. 1922년부터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정식으로 박가분을 생산·판매했다. 동그란 통 안에 분을 담고 겉면에 ‘박(朴)’이라는 글자를 써넣었다. 박승직은 종종 큰아들 박두병에게 “네 어머니는 장정 열 명 몫은 하는 분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1930년까지 전성기를 누리던 박가분은 분에 포함된 납 성분의 유해성이 발견돼 생산을 중단했다. 최근 한국산 화장품이 국제 시장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박가분’의 품질을 개량해 계속 생산했다면 두산그룹의 오늘날 위상도 달라졌을 것이다.

박승직은 고종과 순종이 승하했을 때는 상인봉도단을 앞장서 결성해 단장으로 활동했다. 1933년 일본인이 설립한 소화기린맥주회사에 주주(한국인은 박승직과 인촌 김성수의 동생인 삼양그룹 창업자 김연수 등 두 명에 불과했다)로 참여해 맥주회사와 인연을 맺었다. 이것을 8·15 광복 후인 1948년 박두병이 인수해 두산의 모기업인 동양맥주를 설립하며 대표 취체역(이사의 옛말)에 취임했다. 당시 직원들이 일제의 잔재인 ‘소하기린’ 대신 새로운 이름으로 생각한 것은 ‘신라’ ‘계림’ ‘동양’ 등이었다. ‘동양’이 직원들로부터 제일 인기를 얻어 상호를 ‘동양’으로 정했다. 상표도 기린에서 OB(Oriental Brewery·동양맥주)로 바꿨다. 1946년에는 박승직의 처 정정숙과 박두병의 처 명계춘이 두산상회라는 이름으로 운수업을 시작했다. 사무실은 종로 연지동에 있던 박승직의 집이었고, 밑천은 구형 포드 승용차 1대, 트럭 1대였다. 박승직 상점은 1938년 승용차를 처음 구입했으며 1944년에는 2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박두병은 외자관리청으로부터 14대의 트럭을 불하받았다. 1951년 10월에는 주식회사 두산상회를 발족시키고 사장에 취임했다. 박승직 상점은 6년 만에 주식회사 두산상회로 재탄생했다. 1960년까지 궤도에 오른 동양맥주는 이후 계열사를 늘려 ‘OB그룹’으로 발전해갔다. 박두병은 1952년 이후 63세로 세상을 떠나는 1973년까지 13개 회사를 설립 또는 인수했다. 이것은 1952~1995년 사이에 설립 또는 인수된 46개 기업들의 3분의 1에 해당된다. 당시 박두병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경영에 임했는지, 두산그룹이 당시 얼마나 급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OB그룹은 21년 동안 연평균 91.4%의 매출액 증가율, 68.4%의 자산 증가율, 7.7%의 매출액 순이익 증가율을 기록했다.

박두병은 1972년 동양맥주 창립 20주년을 맞아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사업을 대하는 태도는 무슨 일이든지 그 일을 택하였으면 그 일이 완성될 때까지는 한눈을 팔지 않고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20년 동안 유혹과 권고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끝까지 내가 택한 한 가지 일에 골몰해왔다. 돌이켜보면 후회를 할 만한 이유가 없다. 큰 욕심 없이 제 힘에 알맞게 일해왔기 때문에 도리어 기업의 근기(根基)가 견고해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두산그룹’이 정식 출범한 것은 1978년이다. 1973년 박두병이 세상을 떠난 후 49세였던 장남 박용곤이 회장이 되는 1981년까지 7년 6개월간은 정수창이 경영했다. 정수창은 박두병의 경성고등상업학교 9년 후배다. 만주의 흥업은행에서 근무하다 동양맥주에 20년 동안 근무한 뒤 삼성에 4년간 몸담았던 그는 박두병이 동양맥주 회장을 맡으면서 다시 돌아와 사장을 맡았다. 두산은 이후 ‘형제 경영’ 순서에 따라 박용곤-박용오-박용성-박용현-박용만 순으로 경영권이 옮아갔다.

창업주 박승직은 정정숙과의 사이에 2남 6녀를 뒀다. 내리 딸만 여섯을 뒀다가 40대 중반이던 1910년 첫 아들 박두병을 얻었다. 이후 우병·기병·규병 등 아들이 더 태어났지만, 둘째인 우병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다.

박두병은 경성고상(현 서울대 상대)을 졸업했다. 졸업생 84명 가운데 한국인 학생은 17명에 불과했다. 박두병은 졸업 후인 1932년 조선은행에 입사했다. 박두병에게 은행 입사를 권한 사람은 아버지 박승직이었다. 박승직은 박두병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의 밑에 가서 밥을 먹어봐야 땀의 귀중함을 알 것이다. 이것은 윗사람이 되는 첫걸음이다. 기왕에 남의 밥을 먹을 바에야 은행이 좋지 않겠느냐? 상업을 하자면 은행이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고서야 성공하기 어려울 거야. 3년쯤 지나고 나서 다시 상점으로 돌아오거라.”

   
2009년 9월 두산가 가족들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박두병 초대 회장의 부인 명계춘 여사 빈소에 도열해 조문객을 맞고 있다. 오른쪽부터 박용곤·박용오·박용성·박용현·박용만·박용욱·박정원. ⓒ 시사저널 포토
창업주, 장남 이름 따 ‘두산’ 상호 지어

박두병은 광복을 맞은 뒤 동양맥주(현 OB맥주)를 인수해 본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창업주 박승직은 장남 이름 가운데 자에 ‘산(山)’을 넣어 ‘두산’이란 상호를 지어줬다.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올려 재화가 산같이 커져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박두병은 1960년대 들어 코카콜라를 제조하던 한양식품과 윤한공업사,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등을 설립해 대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박두병은 명계춘과 결혼했다. 두 사람은 6남 1녀를 뒀다. 경성운동장에서 숙명고녀(현 숙명여고) 정구 대표 선수로 활약하고 있던 명계춘을 보고 한눈에 반해 결혼에 이르렀다. <박두병처럼>의 지은이 박시온은 “명계춘의 별명은 ‘서독식 기계’였다. 그녀의 손을 거치면 모든 것이 정확하고 군더더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 며느리를 들이면 아들의 생년월일이 적힌 조그만 상자에 돌 때 입었던 옷, 신발, 앨범 등을 꼼꼼하게 챙겨 건네주기도 했다”고 전한다.

박두병의 장남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은 사업가 이관제의 딸 이응숙과 결혼했다. 이관제는 임문환 전 농림부장관과 사돈인데 임문환의 딸 임경미가 국회 부의장을 지낸 홍사덕 전 의원의 아내다. 박용곤-이응숙의 장남인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은 공군 참모총장과 제13대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김인기의 딸 김소영과 결혼했다. 두산가 4세 경영인을 대표하는 박정원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MBA)을 마쳤다. 1994년 오비맥주 이사 대우, 1999년 두산 대표이사 부사장, 2001년 두산 대표이사 사장을 거쳐 2009년부터 두산건설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다. 장녀인 박혜원 두산매거진 전무는 의사인 서경석과 혼인했다. 차남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회장은 평범한 집안 출신 서지원과 혼인했다.

박두병의 맏딸 박용언은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광주고검 검사장, 대검 차장검사, 서울고검 검사장을 지낸 김세권 법무법인 케이씨엘 고문변호사와 혼인했다. 박용언-김세권의 첫째 아들인 김형일 일경산업개발 부회장은 1970년대 봉제업으로 성장한 태흥의 창업주 권태흥의 딸 권혜경과 결혼했다. 김형일은 1990년대 초반 국내에 게스·폴로 등을 수입해 유명세를 탔던 기업가다. 딸 김희정의 남편은 최원현 케이씨엘 대표변호사다.

박두병의 차남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미국 유학 중 이화여대를 졸업한 최금숙을 만나 연애결혼을 했다. 당시 박두병은 자신이 정해준 사람이 아니라 연애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었다. 장남인 박경원 전 성지건설 부회장은 서상철 전 동력자원부장관의 딸 서미경과 결혼했다. 서상철은 서상목 전 보건복지부장관의 형이다.

3남 박용성 전 두산중공업 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 시절 삼성물산 사장을 지낸 김선필의 딸 김영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경기여고 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김영희는 1966년 이화여대 불어불문과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여자테니스연맹 부회장이며 장애 아동 교육을 위한 ‘사랑심기’ 공동회장이자 사단법인 글로벌 커뮤니티 ‘함께 우리’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박용성은 박진원 두산 사장과 박석원 두산엔진 부사장 등 아들을 뒀다. 이들은 평범한 집안 출신과 결혼했다.

4남 박용현 두산그룹 연강재단 이사장은 이화여대 음대를 나온 엄명자와 결혼했다. 박태원 두산건설 사장, 박형원 두산인프라코어 부사장, 박인원 두산중공업 전무 등 세 아들을 뒀는데 모두 평범한 집안 출신과 혼인했다. 박용현은 2009년 서울대 의대 동문 윤보영과 재혼했다.

5남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의 아내 강신애는 1980~90년대 증권업계의 대부였던 강성진 전 증권업협회 회장의 딸이다. 1970~80년대 업계 1위 증권사였던 삼보증권을 경영했던 강성진은 지난해 10월 자신과 증권업계의 역사를 담은 자서전 <증권 반세기 강성진 회고록> 출간기념회에서 “삼보증권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단 한 명의 직원도 내쫓지 않았다”며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헤쳐나가야지 기업이 살기 위해 직원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두산그룹 계열사인 비엔지증권 명예회장을 맡기도 했다.

박용만, 처가 통해 다양한 혼맥

박용만은 처가를 통해 다양한 혼맥과 연결된다. 강신애의 오빠인 강흥구 전 금강여행사 대표의 아내 김미희는 김복동 전 국회의원의 장녀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인 김복동은 육군사관학교장 등을 역임하고 대구에서 제14대 민자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내 김옥숙 여사가 김복동의 동생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아내다. 김복동의 둘째 딸 김미경은 한일그룹 창업주인 김한수의 5남 김중명 전 한효건설 전무와 혼인했다.

박용만 회장의 장남 박서원 오리콤 부사장은 이력이 독특하다. 세계 광고인들의 등용문인 미국 뉴욕 스쿨오브비주얼아트를 나왔다. 아버지의 도움 없이 2006년 독립 광고회사인 빅앤트를 설립해 운영했다. 지난해 10월 오리콤에 합류했다. 차남 박재원 두산인프라코어 부장은 미국 뉴욕 대학 경영대를 졸업한 후 보스턴컨설팅그룹을 거쳐 2013년 말 두산인프라코어에 입사했다. 박재원은 지난해 치과의사인 이철민의 딸 이현주와 결혼했다. 이현주의 조부는 이원달 전 코오롱상사 사장이다. 이원달은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의 육촌동생으로 코오롱그룹의 모태인 한국나일론의 창립 멤버로 활약했다.

박두병의 막내인 박용욱 이생그룹 회장은 이건 전 대호그룹 회장의 딸인 이상의와 결혼했다. 장녀 박효원은 2008년 허영인 SPC그룹 회장의 장남 허진수 파리크라상 전무와 결혼했다. 차녀 박예원은 지난 2012년 최진민 귀뚜라미그룹 명예회장의 차남 최영환과 혼인했다.

박두병의 동생 박우병 전 두산산업 회장의 장남 박용훈 전 두산건설 부회장은 LG 창업주 구인회의 첫째 동생 구철회 전 LIG그룹 회장의 4녀 구선희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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