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호남 텃밭 천정배에게 내주다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5.05.0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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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재보선 참패로 차기 대권 주자 위상 급속히 흔들려

지난 1년간 모두 3번의 크고 작은 선거가 치러졌다. 그중 새정치민주연합이 승리한 선거는 단 한 번도 없다. 특히 야당에 이번 선거가 뼈아픈 것은 강력한 대권 잠룡 문재인 대표의 상승가도에 빨간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파할 시간도 없다. 호남을 중심으로 새로운 야권 세력이 태동하고 있다. 야권 분열이 현실화된 것이다. 다 안고 함께 갈 것인지 따로 갈 것인지, 문재인에게 주어진 잔인한 선택지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또 졌다. 최근 1년 사이 세 번의 선거가 있었는데 모두 패배했다. 3전 3패다. 세월호 참사, 성완종 게이트 등 여권에 불리한 악재가 넘쳤다. 그런데도 맥없이 무너졌다. 새정치연합으로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참혹한 결과다. 새누리당이 이기는 것에 익숙해지는 사이 새정치연합은 패배가 몸에 밴 듯하다. 그 때문인지 이번 재보선 참패 이후에도 위기의식이 그리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해졌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나온다. 원내 130석에 달하는 거대 야당의 현주소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반 전의 일이다. 문재인 대표가 2·8 전당대회에서 당선된 직후, 기자는 대한민국 정상급 정치 전문가 10인에게 향후 문재인 대표 체제의 앞날을 물었다. 당시 정치 전문가들이 내놓은 공통적인 의견은 “이번 4·29 재보선은 문재인 대표에게 가장 중요한 선거이며 승리로 이끌지 못할 경우 큰 타격을 입고 당내 반발에 부닥칠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문재인의 선거’라는 것이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그렇게 중요한 재보선에서 새정치연합은 전패를 했다. 후폭풍의 속도는 빨랐고, 위력은 막강했다. 선거 결과가 나오자마자 문재인 대표의 위상이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 대표는 누가 뭐래도 차기 대권 주자 1위였다. 그것도 2, 3위와는 큰 격차를 보이며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여야를 통틀어 지지율 면에서 그와 견줄 만한 대권 잠룡은 없었다. 슬슬 대세론이 형성되고 있다는 섣부른 전망까지 나왔다. 그런데 4·29 재보선 결과가 나온 4월30일, 리얼미터와 JTBC가 전국 성인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긴급 차기 대선 주자 지지도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문 대표의 지지도는 전날 26.9%에서 23.6%로 떨어진 반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7.1% 상승한 23.4%를 기록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10.6%포인트나 되던 두 사람의 격차가 0.2%포인트로 좁혀진 것이다. 당내 입지나 여론 지지율 면에서 문 대표가 급격히 흔들리는 사이 선거를 승리로 이끈 김무성 대표는 ‘선거의 남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28쪽 딸린 기사 참조). 문 대표는 당내외의 거센 도전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대권 지지율 1위’라는 타이틀은 문 대표를 지켜주던 강력한 보호막이었다. 이번 선거에서도 새정치연합은 그의 차기 대권 주자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전략을 펼쳤다. 박지원 대표와 맞붙었던 2·8 전당대회 때도 ‘대권 주자 1위’라는 점이 그의 승리에 가장 크게 작용했다. 한마디로 이번 선거에서 이기거나, 최소한 선전만 했더라도 문재인 대세론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물거품이 됐다.

“문 대표, 아직도 상황 심각성 잘 몰라”

4·29 재보선에 참패하고 그에 따라 대권 주자로서의 위상마저 흔들리면서 책임론이 대두되고 있다. 특히 호남 지역 의원들에게서 그런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내년 총선에 대한 위기감이 이들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성완종 게이트’ 속에서 치러진 이번 선거는 야권에 유리한 구도였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선거 결과가 나온 후 문 대표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물러서면 사실상 대권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는 선거가 끝난 후 “책임질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제가 책임지겠지만 그렇게 하면 당 지도부가 표류하게 된다. 당을 더 크게 개혁하고 더 크게 통합할 것이며, 더 강하고 더 유능한 정당으로 혁신해 국민의 삶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비노 진영에서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김한길계로 분류되는 한 비노 측 인사는 “아직도 상황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다”며 문 대표의 기자회견 내용을 혹평했다. 비노 측의 이러한 반응은 예전 같으면 그냥 내부 불만으로 넘기고 말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이런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천정배 의원이 호남을 중심으로 야권을 재편하겠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이번 재보선에서 광주 서구 을 지역구를 꿰찬 천정배 의원은 당선되자마자 곧바로 “김대중 대통령처럼 큰 정치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한데 모아서 내년 총선에 30석 정도에 모두 후보를 내 새정치연합과 경쟁할 것”이라며 사실상 정치 세력화 의사를 밝혔다. 새정치연합의 정치적 기반을 차지한 천 의원은 원내 진입이라는 소득 외에 야권 내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위상까지 단박에 거머쥔 형국이다.

4·29 재보선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한 무소속 천정배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두 손을 들어 환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새정치연합에서는 위기 때마다 계파 갈등 문제가 대두됐고, 그 뒤로 ‘분당(分黨)’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제기됐다. 그런데 이번엔 뒤에서만 논의되던 과거와는 다르다. 비노 진영에서는 물론, 친노 진영 안에서도 “이대로 대선까지 같이 가기는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내부 분위기도 심상찮다. 분당 문제는 이제 당내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됐다.

천정배 의원이 이렇게 다소 급해 보일 정도로 드라이브를 거는 것은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 때문이다. 일단 총선이 1년도 남지 않아 향후 자신의 앞길을 장담할 수 없는 의원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이미 한 달 전부터 많은 의원이 지역구 관리에 들어가 당내에서 “시국이 시국인데 자신만 챙기려고 한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호남 민심이 확인됐고, 분위기도 탔다. 천 의원으로선 속도를 늦출 이유가 없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동력을 잃을 공산이 크다는 게 천 의원의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친노 진영에서도 호남 신당 창당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분위기다. 심지어 “차라리 (신당 창당은) 빠를수록 좋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대로 계속 싸우면서 가다간 대권도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그러나 신당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선 낮게 평가하고 있다. 친노 중진 A의원의 말이다. “천정배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곳에 갈 사람들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다. 어차피 여기서 공천을 못 받았던 사람들일 텐데 무슨 파괴력을 갖겠느냐”고 반문했다.

4·29 재보선 선거운동 마지막날인 4월28일 서울 관악구 삼성시장 입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의원이 정태호 후보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선거 패배 후폭풍 ‘천정배 신당’

A의원 말대로 천정배 의원이 구상하는 정치 세력화가 당장 힘을 발휘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인물이 합류하는가에 따라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예컨대 문 대표의 강력한 대권 경쟁자로 여겨지는 안철수 의원이 함께하게 된다면 문 대표는 3분의 1 이상의 지지 기반을 잃을 수 있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당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문 대표로선 신경 쓰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그만큼 문 대표의 현 상황이 취약하다는 뜻이다.

안철수 의원은 당 대표 때보다 언론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여러 의원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정치적 외연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당 대표에서 평의원 신분이 되자 오히려 활동 폭이 넓어졌다는 이야기를 주변에 털어놓기도 했다. 그래서 최근 들어 “안철수가 달라졌다”는 평도 나온다.

특히 당내 비노 측 인사들과 안 의원의 교류가 활발하다고 한다. ‘문재인’이라는 간판타자가 있는 친노와 달리 비노 진영에서는 아직 마땅히 내세울 ‘거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안철수 의원에게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비노 진영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호남’이다. 천정배 의원이 호남을 중심으로 한 야권 세력 재편에 성공하고 안철수 의원과 교감이 이뤄진다면, 안 의원으로서도 자신의 약점인 조직과 지지 기반을 갖게 된다. 안 의원 측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지금은 그가 움직일 이유가 없지만 앞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호남 지역에서 활동하는 안철수 측 한 인사는 “안철수 의원이 천정배 의원 쪽으로 먼저 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지원 등 비중 있는 비노 인물들이 움직여주고 새로운 세력이 동력을 받게 된 후 부른다면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안 의원이 지금 그대로 당 안에 있다간 대권 후보는커녕 의원직을 유지하기도 힘들지 모르기 때문에 당을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도 “친노가 당권을 쥔 상황에서 안철수 의원은 다음 총선 때 공천을 받는 것 자체가 험난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안 의원은 선거 직후 문 대표와 비공개 회동을 통해 원내대표를 합의 추대하자는 의견을 냈는데 이날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포털 사이트 검색 순위 1위에 올랐다. 그만큼 안 의원의 몸값이 올라간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문 대표는 이번 선거를 통해 자신의 최대 경쟁자인 김무성과 안철수의 몸값을 올려놓았다. 선거 패배의 쓰라린 상처를 딛고 문 대표가 어떤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그의 다음 포석이 어느 때보다 주목받는 순간이다.

재보선에서 힘 못 쓴 ‘정권

새정치민주연합이 내건 4·29 재보선의 슬로건은 ‘정권 심판’이었다. 선거 초반엔 ‘경제’를 모토로 내세워 지지를 호소했으나, 성완종 리스트 사태 이후 ‘박근혜 정권 심판’으로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문재인 대표는 선거 유세 현장을 돌며 “박근혜 정권에 민심을 보여줘야 한다”고 외쳤다.

새정치연합은 늘 중요한 선거 때마다 정권 심판론을 들고나왔다. 지난해 6·4 지방선거 때는 세월호 참사를 내세워 심판론을 주장했고 7·30 재보선 때도 “세월호 참사 100일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투표로서 심판해줄 것을 호소했다. 당시 김한길 대표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도 시작되지 못하고 있는 참담한 상황이다. 정부·여당을 표로 심판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결과는 늘 참패였다.

세월호 참사와 성완종 리스트 사태는 누가 봐도 여권에는 큰 악재였다. 그럼에도 표심은 그와 무관한 결과를 보였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이번 재보선 후 새정치연합 내부에서는 “선거를 정권 심판론으로 밀고 나갔던 것이 실수였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양승조 사무총장도 선거일 전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성완종 파문이 없었다면 끝까지 ‘경제 심판론’ 기조를 유지했을 것이다. 당의 기조가 많이 흔들린 점이 참으로 아쉽다”고 토로했다. 이른바 ‘정권 심판 무용론’이 제기되는 것이다. 정치세력을 대표하는 후보들끼리 맞붙는 대선과 달리 지역 일꾼을 뽑는 선거에서는 정권 심판론이 선거에 미치는 영향이 거의 없다는 분석이다. 선거 때마다 반복하는 정권 심판론에 유권자들이 피로감을 보인다는 점을 문재인 대표와 새정치연합은 간과한 셈이다.

문재인 발목 잡는 ‘참여정부

문재인 대표는 결정적 순간마다 참여정부와 관련한 논란에 휩싸이며 고전하고 있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문 대표가 참여정부에 갇히는 프레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참여정부 이야기만 나오면 문 대표가 당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선거를 앞둔 시점의 성완종 리스트 사태는 누가 뭐래도 야권의 호재였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경향신문 인터뷰를 통해 김기춘·허태열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현 정권 실세들에게 돈을 줬다는 점을 폭로한 것이 사태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갑자기 참여정부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누리당이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참여정부의 성완종 특사 의혹으로 비화시키며 맞불을 놓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혈세 수십조 원을 낭비한 MB 정부 자원외교 논란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초 자원외교 논란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따져보기 위한 것이었으나 “자원외교는 참여정부 시절부터 시작됐다”는 새누리당의 주장에 거꾸로 야당이 쩔쩔매는 모양새가 됐다. 2012년 대선 때도 당시 문재인 후보는 여당이 제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 논란을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중요한 순간마다 새누리당이 쳐놓는 ‘참여정부 프레임’에 문 대표가 당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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