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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의 후손, 법무부 수장이 되다

미국 상원, 로레타 린치 장관 인준…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수석

김원식 미국 통신원 ㅣ 승인 2015.05.04(Mon) 16: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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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23일 미국 워싱턴 D.C. 의회 상원 본회의장 방청석에 베이지색 중절모를 쓴 흑인 노신사가 등장했다. 그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6시간 동안 차를 몰고 이곳에 왔다. 이유는 하나였다. 미국 첫 흑인 여성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된 로레타 린치(55)에 대한 인준 투표를 지켜보기 위해서다. 그는 린치 지명자의 아버지 로렌조 린치(83)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장관으로 지명하고 나서 무려 166일이나 끌어오던 딸의 인준안은 이날 찬성 56표, 반대 43표로 가결됐다. 로렌조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감격을 숨기지 않았다. 노신사는 “노예제도 폐지 때부터 우리는 일곱 발짝 전진하고 세 발짝 후퇴하는 식으로 천천히 전진해왔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이 미국 시스템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인 린치 장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남북전쟁 이후 해방된 흑인 노예의 후손이라는 점을 말해왔다. 이런 노예의 후손이 장관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지켜봤으니 로렌조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4월27일 흑인 여성 최초로 미국 법무장관이 된 로레타 린치(오른쪽)가 미국 법무부에서 조 바이든 부통령과 그녀의 아버지, 남편(왼쪽부터)이 지켜보는 가운데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 AP연합

“법과 원칙에 따른 분명한 일 처리로 명성”

흑인 인권운동이 막 촉발하던 1960년대 초에 유년기를 보낸 린치였다. 그래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흑인 차별의 경험을 그대로 간직하며 성장했다. 할머니가 회초리를 들어가면서 매일 배운 내용을 복습하도록 한 덕분에 초등학교 시험에서 최고 성적을 냈다. 그러나 당시 백인이었던 학교 교장은 이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고 재시험을 보게 했다.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린치는 고등학교에서도 최우수 졸업생으로 선정됐지만 흑인이 단독으로 최우수 졸업생 연설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당시 학교 당국자의 조치로 백인 학생과 공동으로 시상과 연설을 해야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은 4년 전액 장학금을 제시했다. 하지만 린치는 이를 거절하고 하버드 대학으로 갔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하버드 대학 앞을 지나가며 ‘나는 최고가 될 것이고 저 학교에 꼭 들어갈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해서였다. 학부에서 영미문학을 전공한 후 하버드 로스쿨로 진학했고 월가의 명문 로펌에 취직했다. 하지만 보장된 고액 연봉을 포기하고 재판 경험을 쌓겠다는 이유로 뉴욕 주의 동부 연방검찰청 검사가 됐다. 불철주야 노력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찰스 슈머 당시 뉴욕 상원의원은 그녀를 1999년 연방 검사장에 추천했고 빌 클린턴 대통령이 임명했다.

정권 교체로 부시 행정부 시절에는 잠시 로펌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당선과 동시에 린치를 다시 뉴욕 동부 연방검사장으로 지명했다. 그녀의 평판과 실력은 정평이 나 있던 상황이었다. 40대 중반인 2005년이 돼서야 결혼을 할 만큼 ‘일벌레’라는 평가를 늘 받아왔던 원칙주의자였다.

흑인 목사 집안이었던 린치의 집안은 흑인 인권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탄압받는 흑인들을 교회에 숨겨준 일이 부지기수였고 흑인 인권 향상을 위한 여러 활동들을 조직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조인 린치는 ‘법과 원칙에 충실’하다면 흑인 차별이 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원칙적인 법 집행을 강조했다.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1997년 뉴욕에서 발생한 ‘애브너 루이마의 성고문’ 사건을 다루면서다. 당시 아이티 이민자 출신이었던 루이마는 뉴욕 경찰관 저스틴 볼페에 의해 부당하게 경찰서로 연행된 후 빗자루 손잡이를 항문에 집어넣는 폭행 등 모욕적으로 구타당했다. 당시 이 사건은 흑인들에게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켰는데, 사건을 맡은 린치는 엄정하게 수사를 지휘하며 볼페에게 법정 최고형을 구형했고 결국 징역 30년형이 선고됐다. 이 사건 이후 린치는 흑인 인권을 대변하는 검사로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인종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라며 분노한 흑인사회를 진정시켰다. 사건 처리 역시 ‘인권’ 차원에서 중립적으로 처리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장관에 지명됐으나 인준 과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상·하원의 다수를 장악한 공화당은 쉽게 인준안을 처리해주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법무장관에 지명됐지만 오바마 정부의 이민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는 공화당은 지난 2월 들어서야 겨우 청문회를 열었다. 하지만 공화당이 인신매매처벌법 처리를 법무장관 인준안과 연동시키면서 또다시 지연됐다. 공화당은 인신매매처벌법에 ‘정부가 임신중절을 지원해선 안 된다’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주당은 여기에 반대하면서 시간이 지체됐다. 5개월여의 줄다리기 끝에 가까스로 중재안이 통과되면서 166일 만에 린치의 취임 일성을 들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와중에도 “강한 신념과 노력으로 우리가 믿는 가치를 살아 숨 쉬게 하겠다”는 린치지만 하필이면 취임에 맞춰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 흑인 폭동이 발생하며 강력한 시험대와 맞닥뜨려버렸다.

흑인 폭동 처리 따라 대망 꿈꿀 수 있을 듯

4월27일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에서는 경찰 구금 중 사망한 흑인 프레디 그레이(25)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시위대가 경찰 폭력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날 폭동으로 경찰관 15명이 다쳤고 200여 명이 체포됐다. 건물 15채와 차량 144대가 불타는 등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경찰 1000여 명과 주 방위군 1500명을 폭동 현장에 파견하는 등 사태 진화에 나섰다.

4월29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린치 법무장관이 방송에 등장했다. 그녀는 “지역사회를 중대한 위험에 빠뜨리는 무분별한 폭력 행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며 강력히 대처하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물론 미국 시민들의 눈은 린치가 흑인 청년의 사망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집중되고 있다. ‘법과 원칙에 따른 집행’이라는 그녀의 소신은 지금 흑인 사망과 폭력 사태라는 두 가지 폭풍과 그대로 맞서고 있는 모양새다.

듀크 대학의 마크 닐 교수는 최근 퍼거슨 사태를 비롯한 흑인 시위 사태를 두고 “흑인 대통령 아래서 최근 8개월간 발생한 폭동 사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이러니하다”고 말했다. 일련의 사건들에 관해서는 “결국 흑인들은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경찰과 사법권에 대해서도 계속 시위를 이어갈 것”이라며 앞으로도 시위와 폭동 사태가 빈발할 것임을 지적했다.

흑인 차별을 온몸으로 경험하며 성장한 린치가 이 어려운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만약 그녀가 오바마 임기 말기까지 이 문제를 잘 해결해나간다면 민주당에서 새로운 차기 주자로 떠오를 수도 있다. 미국 첫 흑인 여성 법무장관 취임이라는 소재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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