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과 집중'으로 위기 정면 돌파
  • 박혁진 기자 (phj@sisapress.com)
  • 승인 2015.05.13 15:1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재용 시대 삼성의 키워드는 소통과 실용

질문 하나.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병상에 누운 지난 1년 동안 삼성그룹 내부에서 가장 주목받은 계열사는 어디였을까. 갤럭시S6 시리즈를 출시한 삼성전자? 지주회사 전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던 제일모직? 아니면 이부진 사장의 호텔신라? 셋 중 하나를 꼽았다면 틀렸다. 정답은 삼성 스포츠단 소속 프로야구팀 삼성 라이온즈다. 손익 기준으로 본다면 삼성그룹에서 유일한 적자 회사라고 할 수 있는 삼성 라이온즈에 삼성그룹 임직원들의 눈과 귀가 쏠린 이유는 포스트 이건희 시대를 이끌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스타일을 이해할 수 있는 코드이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이 프로야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자녀들을 데리고 야구장을 방문한 그의 모습을 언론사 카메라가 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 부회장은 삼성 라이온즈가 지난해 프로야구 4연패를 결정짓던 경기도 대구까지 내려가 관람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연합뉴스
이 부회장은 부친인 이건희 회장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지난 1년 동안 자신의 취미를 좀 더 적극적으로 경영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자동차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직접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던 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이러한 이 부회장의 경영 철학은 지난 1월13일 사내 방송에서 방영된 프로그램에 잘 녹아들어 있다. 프로그램 제목은 ‘삼성 라이온즈에게서 배우는 소통의 힘’.

이 프로그램은 삼성 라이온즈가 4연패하는 과정을 그렸다. 삼성이 1등이라는 것은  다 아는데 얄미운 1등이란 꼬리표가 항상 붙어 다니는 것이 현재 삼성의 현실임을 꼬집는 게 주요 내용이다. 이런 삼성그룹의 이미지가 가장 잘 투영된 것이 3년 동안 정규 리그와 플레이오프 통합 우승을 해온 삼성 라이온즈였고, 2014년 초반 한때 정규 리그 순위가 7위까지 밀리는 등 고전을 했지만 결국 모든 위기를 극복하고 우승하는 과정을 그렸다. 프로그램은 이 과정에서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이 어떻게 소통했는지 주목했다. 또한 4연패의 주역이 2군에서 꾸준히 키워낸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돈으로 선수를 산다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벗어버릴 수 있었고, 그 결과 팬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프로그램은 이 부회장이 제작에 큰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삼성 내부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삼성그룹은 최근 발간된 사보에서도 ‘삼성 라이온즈로부터 배우는 승리의 공식’이란 주제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이에 대해 삼성그룹 관계자는 “보는 관점에 따라 별것 아니라고 여길 수도 있지만 스포츠를 통해 내부와 외부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삼성 계열사의 임원은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 라이온즈 얘기를 자꾸 꺼내는 것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과 소통에 대해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삼성 라이온스에서 배워라”

이건희 회장이 와병 중이었던 지난 1년 사이, 삼성그룹은 본격적인 ‘이재용 시대’를 맞이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고 했던 ‘파격’과 ‘속도’가 이건희 시대의 코드였다면, 이재용 시대의 삼성에서는 ‘소통’과 ‘실용’이 키워드가 됐다. 이 부회장 역시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가지 가치를 삼성 라이온즈를 통해 내부 임직원들에게 강조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내부 임직원들만 볼 수 있던 오프라인 사보를 외부에서도 공유할 수 있도록 온라인 형태로 바꾼 일도 이 부회장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삼성전자 주요 사업장을 대학 캠퍼스처럼 꾸미고 삼성의 내부 인트라넷 게시판에 삼성의 조직문화를 비판하는 글을 가감 없이 올리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때문일까, 삼성그룹 임직원들은 지난 1년간의 변화를 얘기할 때 이 두 가지를 빼놓지 않는다.

삼성그룹 임직원들이 소통보다 더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실용이다. 이건희 회장이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임직원들이 공항에 총출동하고, 홍보실 직원들이 취재를 나오는 기자들을 관리하는 것은 이제는 보기 어려워진 풍경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리는 수요사장단회의 분위기도 좀 더 자유스러워졌다. 예전에는 사장들이 들어서면 보안요원들이 90도 각도로 인사를 했으나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지난해까지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이었던 한 인사는 “아무래도 이 부회장이 격식을 차리는 것을 꺼리다 보니 딱딱한 분위기가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회장 때부터 시행한 자율 출퇴근제도 예전에는 회사 분위기상 활용하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훨씬 수월해졌다고 한다. 이런 변화는 이 부회장 스스로 주도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시간이 촉박하지 않은 공식 일정이나 별도의 개인 일정이 있을 경우 전용기 대신 민항기를 애용하고 있다. 중국·일본 같은 가까운 출장은 수행원 없이 혼자 다녀오고 있다.

지난해 재계를 들썩이게 했던 삼성테크윈을 비롯한 화학·방산 계열사 매각도 ‘실용적 판단’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다른 회사의 사업 영역과 겹치면서 1등이 어려운 계열사를 굳이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게 이 부회장의 생각이라는 것.

2011년 4월21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삼성 서초사옥 집무실 첫 출근 때 동행한 이재용 부회장(왼쪽). ⓒ 연합뉴스
글로벌 CEO들과 잇따른 만남

내부적으로는 소통과 실용을 앞세우며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면서, 외부적으로는 유력 인사들을 두루 만나는 광폭 행보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다. 이 부분 역시 이건희 회장과는 다른 점이다. 사실 이 회장은 꼭 필요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외부 인사와 만나는 것을 자제해왔다. 또한 외부 인사를 만나도 삼성그룹 영빈관인 ‘승지원’으로 불러 조용하게 만남을 가졌다. 그래서 외국 언론에서는 그를 ‘은둔의 경영자’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부회장은 외부 인사와의 접촉을 거북해하지 않는다. 장소도 한 곳으로 한정하지 않고, 세계 곳곳을 무대로 하고 있다. 삼성그룹 측이 시사저널에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이 회장이 쓰러진 지난해 5월 11일 이후 현재까지 이 부회장이 만난 유력 인사는 17명이다. 지난해 7월에는 세계적 IT 기업 구글과 애플의 CEO인 래리 페이지와 팀 쿡을 잇따라 만났다. 9월에는 마이크로소프트 CEO인 사티아 나델라, 10월에는 페이스북 CEO인 마크 저커버그를 만났다. 그 밖에도 삼성그룹 주요 사업장이 있는 중국과 베트남 등의 유력 인사와도 만남을 갖는 등 활발한 외부 활동을 펼쳤다. 이를 통해 글로벌 CEO로서의 위상을 다져나갔다. 국내에서도 삼성그룹을 대표해 각종 행사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체육 분야 후원 활성화 방안 논의를 위해 재계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청했을 때, 이 부회장은 박 대통령 오른쪽 옆자리에 앉은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나란히 앉기도 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이런 행보를 삼성그룹 안팎에서 신선하게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실제적인 변화도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하지만 좀 더 선명한 비전을 제시한다거나 실적이 눈에 띄게 개선됐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물음표라는 것도 이재용 부회장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부회장이 주력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올해 1분기 잠정 실적은 매출 47조원, 영업이익 5조9000억원으로 이 회장 입원 직전인 전년 동기에 비해 각각 12%, 30%씩 줄어들었다. 주력 사업인 스마트폰 부진이 결정적인데, 최근 출시한 갤럭시S6 시리즈도 초반 흥행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부회장 입장에선 스마트폰을 대신할 차세대 먹거리 발굴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가 근래 들어 잦은 인수·합병(M&A)에 나서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9월 모바일 클라우드 솔루션업체인 ‘프린터온’을 인수한 데 이어, 올 1월에는 출력 관리 서비스업체 ‘심프레스’, 2월에는 모바일 결제 서비스업체 ‘루프페이’ 등을 잇따라 인수했다. 지난해 5월 이후 M&A 건수가 총 8건에 이른다.

이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은 다소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벌써부터 실적을 논의하는 것은 이르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업은 결국 실적으로 말하는 만큼, 회사의 체질 개선이 실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경영 능력에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글로벌 기업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리더가 갖는 숙명인 셈이다.

한편, 와병 중인 이 회장은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년간 이 회장의 상태는 꾸준히 호전돼 심장 기능을 포함한 신체 기능은 안정적인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인지 기능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