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퍼터로 122억 움켜쥐다
  • 안성찬│골프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5.14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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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퓨릭 짜릿한 ‘잭팟’…박인비도 퍼터 바꾸고 우승

‘드라이버는 쇼, 퍼팅은 돈’이라고 했던가. 300m의 드라이버와 1m 퍼트가 같은 1타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골프 경기는 그린에서 승자가 갈린다. 

박인비(27·KB금융그룹)가 바꿔 갖고 나온 ‘퍼터’로 우승하며 다시 한 번 퍼팅의 중요성을 입증했다. 박인비는 5월4일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노스텍사스 슛아웃(총상금 130만 달러)에서 정상에 올랐다. 그는 지난 3월 HSBC 위민스챔피언스 우승 이후 퍼트 때문에 속앓이를 했다. 4월19일 열린 롯데 챔피언십에서도 2m 이내의 짧은 거리 퍼트를 몇 개 빼더니 우승 문턱에서 김세영(22·미래에셋)에게 발목이 잡혔다.

퍼터의 기능은 드라이버·우드·아이언 등 14개 클럽 중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18홀 72타를 기준으로 할 때 홀당 2퍼트만 해도 36번을 해야 한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클럽이다.

ⓒ AP 연합, ⓒ Xinhua
박인비는 이번 대회에서 2000년 초 인기를 끌었던 투볼 퍼터를 들고 나왔다. 캘러웨이가 제작한 오디세이 투볼 퍼터는 타구음·터치감·일관성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퍼터로 알려져 있다. 골프 볼 커버에 사용된 우레탄 소재로 부드러운 타구감을 제공하며 볼을 더 잘 구르게 도와준다. 특히 인서트는 무게를 헤드 주변부로 이동하도록 해 관성 모멘트를 향상시켜준다. 무엇보다 볼의 직진성이 뛰어나다.

박인비 “퍼팅에 자신감 얻었다”

박인비는 한동안 퍼터 헤드가 열려 약간씩 오른쪽으로 밀리는 바람에 홀을 놓치곤 했다. 절치부심한 그녀는 스트로크를 할 때 미세한 부분의 기술을 교정했고, 퍼터를 이전에 쓰던 것으로 바꿨다.

박인비는 드라이버 비거리는 부족하지만 어느 선수보다 쇼트게임을 잘한다. 장·단거리 퍼팅에 강한 선수다. 하지만 올 시즌 들어선 단거리를 조금씩 놓치면서 스코어를 줄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박인비는 이번 우승 이후 “퍼팅에 자신감을 얻었다”며 “올 시즌 목표를 그랜드슬램 달성으로 정했다”고 말했다.  

퍼팅 때문에 고민하는 선수는 박인비뿐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골프 전설’ 아널드 파머(86·미국)는 18홀 내내 퍼팅 스타일을 바꿔서 플레이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이번에 박인비가 썼던 투볼 퍼터로 양용은(43)은 2009년 ‘골프 지존’ 타이거 우즈(40·미국)를 제치고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양용은은 우승 요인에 대해 안정감 있는 퍼팅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13번 홀(파3)에서는 절묘한 파 세이브 퍼팅으로 14번 홀(파4) 이글의 토대를 마련했다. 마지막 18번 홀(파4)에서는 2m짜리 버디 퍼트가 홀로 사라지면서 우즈를 꺾은 것이다. 우즈는 이날 퍼트 수가 33개나 됐다. 

프로 선수는 대부분 드라이버나 우드, 그리고 아이언은 계약사나 후원사의 제품을 쓰지만 퍼터만큼은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다. 스코어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선수들은 퍼터를 수시로 바꾼다.

프로 선수도 수시로 퍼터 교체

퍼터를 교체해 ‘잭팟’을 터뜨린 선수도 있다. ‘8자 스윙’으로 유명한 짐 퓨릭(46·미국)이다. 2010년 9월의 일이다. 39달러(약 4만3000원)짜리 중고 퍼터로 1135만 달러(약 122억7500만원)를 손에 쥔 것이다. 보너스 1000만 달러가 걸린 PGA 투어 페덱스컵 플레이오픈 최종전에서 우승했다. 우승 상금 135만 달러와 보너스를 챙겼다.

퓨릭은 대회 몇 달 전 퍼터를 사기 위해 매장을 찾았다. 그가 원하는 건 조준을 돕는 사이트 라인 등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단순한 퍼터였다. 헤드의 힐 부분과 샤프트가 하나로 연결된 국자 모양의 퍼터였다. 하지만 원하는 제품을 찾지 못했다. 결국 39달러를 주고 중고 퍼터를 샀다. 국내에서 50만개 이상 팔려 인기를 끌었던 예스(Yes) 퍼터였다.

서희경(29·하이트진로)은 2008년 롯데 스카이힐 제주C.C.에서 열린 ADT캡스 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며 사용하던 예스 라이프 퍼터를 스카이힐C.C.에 기증했다가 다시 돌려받기도 했다. 그해 서희경은 한 해 동안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6승을 올렸다.

퍼터 때문에 고생한 선수도 있다. 핑 앤서 제품을 썼던 최상호(60)다. 국내 대회 통산 34승으로 최다승을 올린 최상호는 쇼트게임의 귀재로 불렸다. 특히 퍼팅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80~90년대 그린을 평정했던 최상호는 어느 날 라운드를 마치고 퍼터를 잃어버렸다. 누군가 훔쳐갔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 결국 찾지 못했다. 이후 그는 같은 제품을 3개 구입해 집과 차, 그리고 캐디백에 각각 1개씩 보관했다. 최상호는 거실에 대회장의 그린 빠르기와 비슷한 카펫을 깔고 TV를 보면서도 퍼팅 연습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퍼터를 바꾸는 것은 선수뿐만이 아니다. 아마추어 골퍼들도 수시로 교체한다. 라운드하고 나서 퍼팅이 안 되면 집에 오다가 곧장 골프숍으로 달려가 퍼터를 새로 산다. 오랫동안 클럽 챔피언전에 출전했던 한 아마추어 골퍼는 퍼팅이 안 되면 퍼터 구입을 반복해 퍼터를 무려 10개 이상 집무실에 모셔두고(?) 있다. 


5월3일 전북 무주안성C.C.에서 열린 제5회 KG·이데일리 레이디스 오픈 파이널 라운드에서 우승한 김민선이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뉴시스
‘메이퀸’에 올랐지만 가슴 한구석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 같은 것. 애지중지하며 기르던 강아지가 세상을 떠났다. 13년 동안 정들었던 친구이자 동생이었다. 김민선(20·CJ오쇼핑) 이야기다. 그녀는 5월3일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제5회 KG·이데일리 레이디스 오픈에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최종일 전인지(21·하이트진로)가 첫날 수립한 8언더파 64타 타이 기록을 세우면서 54홀 타이 기록인 합계 18언더파 198타를 쳤다.

지난해 11월 ADT캡스 챔피언십 이후 6개월 만에 다시 정상에 올랐는데도 김민선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실은 프로암 대회가 있던 날 한 가족처럼 지낸 강아지가 죽었어요. 함께 있지 못했죠. 그래서 우승하고도 기뻐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김민선은 김효주(롯데)·백규정(CJ오쇼핑)·고진영(넵스)과 함께 1995년생이다. ‘리틀 세리키즈’다. 세리키즈는 박인비·오지영·김인경·신지애·최나연 등이다. 1998년 박세리(37)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는 것을 보고 자란 세대다. 이후 이들이 대부분 외국으로 빠져나가자 부모들 무릎에 앉아 있던 리틀 세리키즈가 그 자리를 꿰찼다.

국가대표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김민선은 김효주·백규정과 함께 2012년 터키에서 열린 세계여자아마추어골프선수권 우승 주역이다. 

김민선은 김효주·백규정, 국가대표를 지낸 고진영과 함께 지난해 시드전을 통해 KLPGA 무대에 입성했다. 김효주와 백규정은 올 시즌부터 LPGA 투어로 무대를 옮겼다. 이제는 둘이 남았다. 고진영이 동료이자 라이벌이다. 이들은 늘 연습 그린에서 5000원짜리 내기를 하면서 퍼팅 연습을 하던 친구 사이다.

김민선은 엄청난 장타력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샷’을 하는 김효주가 훨훨 날 때 기어다녔다. 2·3부 투어에서 활약했고, 지난해 1승을 겨우 챙겼다. 고려대 국제스포츠학부 2년생인 김민선은 김효주와 동급생이다.

그런 김민선이 이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몰아치기를 잘한다. 장타력에 종종 무너지기도 하지만 비거리 덕분에 우승 가능성을 늘 열어놓고 있다. 드림투어에서 9언더파 63타를 쳤고, 정규 투어 넥센·세인트나인 마스터즈에서 8언더파 64타를 쳤다. 

장타자의 단점은 쇼트게임이 약하다는 것. 김민선도 그린 주변에서 어이없는 실수로 우승을 놓치기도 했다. 이번 우승은 지난 겨우내 가진 특별훈련 덕이다. 김의현 코치(40), 친언니처럼 따르는 선배 김자영(24·LG)과 함께 태국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롱런하기 위해, LPGA 투어를 위해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그래서 몸을 단련했다. 175cm 키에 맞는 체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근력을 키우고, 단점을 보완하며 2개월을 오직 골프만을 생각했고, 그린 위에서 살았다. 무엇보다 정확한 샷을 위해 그립을 바꿨다. 오른손 새끼손가락과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엇갈리게 겹쳐서 쥐는 인터로킹 그립에서 왼손 집게손가락 위를 오른손 새끼손가락으로 덮어 쥐는 오버래핑(바든) 그립으로. 스윙이 편안해지면서 실수가 줄었고 타점이 정확해졌다. 드라이버도 마음 놓고 때렸다. 평균 264야드 안팎이지만 거리 욕심을 내고 때리면 280야드는 훌쩍 넘긴다. 이번 우승에도 비거리 약발이 먹혔다. 거리가 나면서 샷이 쉬워졌고 자신감이 붙었다.

“올 시즌 1차 목표는 2년차 징크스를 깨면서 우승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렇게 1승을 하고 나니 욕심이 생기네요. 목표를 수정해야겠어요. 다승과 상금왕으로….” 친구들보다 조금 늦었지만, 그만큼 실력을 갖추고 LPGA 그린에 도전하겠다는 것이다. 시원하게 때려대는 드라이버를 무기로 그녀가 올 시즌 몇 승을 추가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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