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기면서 이룬 ‘앞뒤가 똑같은 대리운전’
  • 윤영무│MBC아카데미 이사 ()
  • 승인 2015.05.21 16:0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동근 코리아드라이브 사장의 인생 역전 비결

“전 지금 배고프지 않아서 행복해요. 단지 그거지요. 가족이 있고 운영할 수 있는 회사가 존재하는 것, 그것만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대리운전회사 코리아드라이브 김동근 사장의 말이다. 13년 전만 해도 그는 노숙자를 부러워하는 처지였다. 책 배달 가맹점을 했다가 말 그대로 거덜이 났다. 가맹비 2400만원과 책 구입비 2000만원, 사무실 보증금 500만원, 월세 40만원 등 전 재산이었던 5000만원이 날아갔다. 신용불량자로 떨어졌고, 경기도 성남시 달동네로 가서 월세 25만원에 살았다.

철저하게 바닥에 떨어진 그가 어떻게 10여 년 만에 임직원 50명, 관리 직원 150명, 대리기사 3500명을 거느린 대리운전회사 사장이 됐을까. 코리아드라이브는 현재 전국 6000여 개 대리운전업체 가운데 자타 공인 1위 업체다. 그는 경기도 화성에 있는 중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장안동에 있는 자동차정비사업소에 취직했다. 그곳에서 3년 동안 최선을 다했고, 야간에 학원을 다니면서 고졸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김동근 사장이 직접 광고 모델로 나서 운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 김동근 제공
사업 실패로 전 재산 5000만원 날려

운전병으로 제대 후 삼성전자의 조립 생산 직원으로 들어갔으나, 고졸 학력으로는 주임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중소 건설회사에 취직했는데 회사가 부도나고 말았다. 마침 사장이 회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같이 있자고 해서 월 60만원을 받고 눌러 있었다.

부도난 회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용달차가 한 대 있었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서 남겨둔 것이었는데 그는 그 차를 고쳐 낮에 회사에서 사장을 보필하고, 저녁마다 파지를 주우러 다녔다. 1년을 했지만 한 달 70만원을 벌기 어려웠다. 파지 수집만이 아니었다. 야간 택시 운전, 책 배달 등 3가지 일을 병행했다. 그는 회사가 완전히 정리되자 그만두고, 2인승 다마스 중고차를 70만원에 사서 해오던 일을 계속했다. 처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제와 처남, 장모, 집사람 등 4명이 좁은 방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래서 책 배달 가맹점도 냈고, 남동생의 권유에 따라 야간 대리운전을 시작했다.

대리운전은 5000만원을 투자한 책 배달 가맹점 수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루 한두 번 전화를 받을 경우, 월수입이 100만원에서 150만원이었다. 그래서 책 배달 가맹점 사업을 접기로 한 그는, 갖고 있던 책을 1000만원에 책방에 넘긴 다음, 그 돈으로 대리운전 전화번호 전단지를 처음으로 만들어 돌리기 시작했다. 그게 9년 전 일이었다.

새벽 6시, 그날도 밤새 대리운전으로 파김치가 된 상태였다. 당장 폐차장으로 보내도 아쉬울 것 없이 털털대는 다마스 중고차를 몰고 서울 내곡터널로 갔다. 그곳은 분당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운전자들이 경유하는 지점이었다. 구석 자리에 차를 세운 후, 현수막을 꺼내 차에다 걸었다. ‘강남-분당 간 대리운전 2만5000원, 1588?2002.’ 지금은 ‘1577-1577’을 쓰지만 당시는 그 번호를 썼다. 그렇게 해놓고 그는 아침 10시까지 기껏해야 서너 시간을 차 안에서 잠을 잤다. 사무실도, 직원도 없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긴 했지만 그래도 대리운전회사 사장이다. 아내가 집에서 대리운전을 찾는 전화를 받아 강남에서 대기하던 그에게 무전으로 연락해준다. 그러니까 낡은 다마스가 그의 사무실 겸 숙소인 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리운전은 홍보가 관건이다. 그 또한 차에 현수막을 걸어놓고 홍보하기 전까지 주로 전단지를 돌렸다. 하지만 발품이 많이 들었다. 100명에게 광고를 하려면 100대의 차량에 일일이 전단지를 꽂아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는 ‘차량 찌그러진 부분을 말끔하게 펴드립니다. 1만원’이란 현수막을 두르고 갓길에 서 있는 봉고차를 보고, ‘저거다!’라고 소리쳤다. 저렇게 대리운전 전화번호를 적은 홍보용 현수막을 차에 두르고 자가 운전자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서 있으면 될 것 같았다. 그는 곧바로 차를 세우고 현수막을 걸어둘 장소 헌팅에 들어갔다. 

첫째, 대리운전을 이용할 가능성이 큰 고객들에게 노출이 잘되는 곳이어야 한다. 둘째, 정체 구간이어야 한다. 차가 쌩쌩 달리면 현수막을 볼 수 없으니까 말이다. 차가 막히면 창밖으로 눈을 돌리다가 ‘어? 저기에 저런 건물이 있네’ ‘내가 좋아하는 삼겹살집이 여기에도 있네’ ‘가게 이름이 재밌네’ 하다가 대리운전 현수막도 쳐다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장소를 찾았으면 다음에 할 일은 현수막으로 눈길을 돌리도록 하는 일. 그는 요금을 과감하게 내렸다. 당시 분당-강남 구간의 대리운전비는 3만원이었다. 이걸 2만5000원으로 내렸다. 돈을 깎아준다면 솔깃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그는 반복 학습을 하기로 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홍보를 최소한 1년 동안 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분당에 사는 주민들이 우리 대리운전을 기억해주는 그날까지’로 잡았다. 하지만 그런 약속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밤새 대리운전을 한 날에는 방에 몸을 눕히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한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면 괜히 서글퍼지기도 하고, 한여름에는 차 안이 찜통 사우나가 된다. 겨울에는 담요를 말아 두르고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그리고 차를 빼라는 시설관리공단 직원에게 수없이 사정을 하면서 틈이 날 때마다 도로 인근의 쓰레기를 줍고 청소를 했다. 막무가내였던 그 직원도 그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였던지 오전 10시까지 차를 빼는 조건으로 주차를 허락했다. 

회사에 번 돈 재투자 위해 전세살이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2001년 대리운전회사인 주식회사 코리아드라이브를 설립하고 ‘앞뒤가 똑같은 대리운전 1577-1577’로 업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고생을 했던 사람이 어려운 사람의 사정을 안다고 했던가. 회사에 가면 직원들이 자신을 반겨주고, 가족처럼 어울릴 수 있는 게 제일 행복하다고 그는 말한다. 지난해 직원 1인당 130만원씩을 지원해 필리핀으로 여행을 갔다 오도록 했다. 7년 전에는 강원도 속초시 동명항에 있는 33평 아파트를 사서, 직원들(대리운전 기사 포함)에게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막상 자신은 집 없이 전세를 살고 있다. 집 살 돈이 있으면 회사에 투자하고 싶어서다. 집이란 나중에 천천히 사도 되니까, 대리운전회사를 상장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그가 자동차정비업소에서 일찍부터 맺은 자동차와의 인연을 시작으로 폐차 직전의 중고차에 홍보 현수막을 다는 아이디어를 내고 고객 감동을 주는 대리운전업계 1위 기업으로 일궈놓을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몸에 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어떤 난관에도 좌절하지 않는 용기와 역발상의 끈기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