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과 달빛동맹
  • 김태일 |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
  • 승인 2015.05.2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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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빛동맹’? 달빛 아래서 도원결의를 한다는 뜻인가? 아니다. 대구의 옛 이름 달구벌과 광주의 별칭 빛고을이 손을 잡았다는 얘기다. 영남과 호남을 대표하는 두 도시가 최근 적극적 교류와 협력에 나서고 있다는 것이 큰 뉴스가 되고 있다.

광주와 대구는 지리산 자락을 사이에 두고 수백 km 떨어져 있다. 찾아가는 길도 편치 않다. 사회적·심리적·정치적 거리는 그런 지리적 거리보다 훨씬 더 멀다. 두 도시는 각각 우리나라 정치를 수십 년 동안 옥죄고 있는 배타적 지역주의의 근거지가 아닌가. 그런 두 도시가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5월18일 새벽, 대구시장과 대구시의회 의장, 그리고 백 수십 명의 시민이 버스에 오른다. 목적지는 광주다. 제35주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 시민 대표들이 길을 나서는 것이다. 광주에 도착해서는 국립5·18민주묘지에 참배도 하고 광주가 자랑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도 들른다. 광주에는 ‘대구 시민의 숲’이 있는데 거기에 사철 푸른 소나무도 심는다. 중요한 행사는 그다음이다. 달빛동맹을 맺는 일이다.

달빛동맹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재작년부터 추진된 사업이다. 지난 2월28일에는 광주시장과 시민 대표들이 제55주년 2·28 대구민주운동 기념식을 축하하기 위해 대구를 방문했고, 대구에 만들어진 ‘광주 시민의 숲’을 찾아 기념식수를 했다.

두 도시가 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적 계기를 고리로 만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광주의 5·18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십자가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1980년 봄 민주화의 열망을 짓밟고 신군부의 군부 재집권이 이루어지는 것에 저항한 운동이다. 대구의 2·28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맏형과 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것은 1960년 2월 이승만 정권의 장기 집권에 저항해 고등학생들이 주동해 일으킨 저항 시위였으며 4·19 혁명의 기폭제였다.

5·18이 가장 격렬한 저항운동이었다면 2·28은 가장 결연한 저항운동이었다. 2·28은 분단과 전쟁, 그리고 독재하에서 숨쉬기조차 어려웠던, ‘체념적 순종’의 상황에서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일어난 것이다. 대구 고등학생들의 어깨에 드리운 역사의 무게는 진압군의 발자국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오는 도청의 새벽을 지키던 광주 소년이 느꼈던  역사의 무게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광주 5·18에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를 노래한 김준태가 있다면, 대구 2·28에는 <아직도 체념할 수 없는 까닭>을 절규한 김윤식이 있다.

달구벌과 빛고을, 두 도시의 달빛동맹은 지역주의를 넘어 사회 통합과 국가 균형 발전으로 나아가는 희망의 빛이 될 것이다. 이전에도 두 도시 사이에는 교류와 협력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분히 정권 차원에서 전략적 문제의식으로 추진됐다. 달빛동맹은 두 도시가 스스로의 힘으로 추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새롭다. 중앙의 정치 세력들이 부질없는 싸움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동안 지방에서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희망의 싹이 자라고 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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