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춘 시즌2 ‘공안 총리’ 왔다
  • 이승욱·조해수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06.02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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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선택은 사정 정국…총리 임명되면 칼바람 몰아칠 전망

지난 4월23일, 국무총리실은 한 건의 문건을 작성한다. 당시는 이완구 총리가 ‘성완종 리스트’의 직격탄을 맞고 사의를 표명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다. 현 총리의 조기 낙마가 사실상 확정된 상황에서 작성된 이 보고서의 제목은 ‘차기 국무총리 후보군’이다. 보고서 제목 그대로 이 문건에는 후임 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인사 47명의 명단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보고서는 시사저널 5월5일자(1333호)의 단독 보도(‘국무총리실 작성 총리 후보군 47명 단독 공개’ 기사 참조)로 공개됐다.

이 보고서에 나온 차기 총리 후보군은 △정치권 거명 후보(28명) △언론 보도 종합(26명) △주요 대학 총장(10명) 등 총 64명이다. 이 중 중복 언급된 17명을 제외하면 47명이다. 결국 명단 속에 포함된 인물이 차기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이다.

ⓒ 시사저널 임준선
“3대 인물론 중 어느 하나도 충족 못해”

본지를 통해 차기 총리 후보군이 소개된 지난 5월6일 사정기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평했다. “크게 보면 호남 출신의 화합형 총리, 경제통의 실무형 총리, 법조 출신의 사정형 총리 등 세 부류로 나눌 수 있을 듯하다. 국민이나 정치권에선 화합형 총리를 원할 테지만,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게 할까. 청와대는 법조 출신의 사정형 총리를 선호할 텐데….”

실제 보고서에는 당시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된 ‘호남 총리 설’을 반영하듯 정치권 출신 후보 가운데 ‘호남’이 별도로 기재돼 있다. 이에 속하는 인물로는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김경재 청와대 비서실 홍보특별보좌관,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 등이다. 경제통 인사로는 최경환 현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장관, 김대기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물망에 올랐다. 호남과 경제를 아우르는 인물로는 한덕수 전 총리, 진념 전 경제부총리, 전윤철 전 감사원장 등이 눈에 띄었다.

황교안 국무총리 후보자가 1월21일 ‘국가 혁신’을 주제로 한 합동 신년 업무보고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5월21일 황 후보자 지명 발표가 나기 전까지 유력하게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던 인물은 황 후보자를 포함해 이명재 청와대 민정특보,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 황찬현 감사원장, 김영란 전 대법관 등이다. 한결같이 판검사 출신의 법조계 인사들이다. 결국 대통령의 뜻은 처음부터 화합형이나 경제통보다는 사정 드라이브 쪽에 쏠려 있었던 셈이다. 일각에서 “공안 실장(김기춘)이 가고, 공안 총리(황 후보자)가 왔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는 이유다.  

박 대통령이 장고 끝에 황 후보자를 지명한 데 대해 그동안 보여준 ‘박근혜식 인사 스타일’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누구나 짐작했던 카드를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현 정부 들어 여섯 번째로 선택한 총리 후보인 황 후보자는 지난 2월 이완구 총리 인선 때부터 유력 총리 후보군 물망에 올랐다. 그만큼 박 대통령 최측근으로서 신임이 두터웠다. 그는 박근혜 정부 출범 때부터 법무부장관을 지냈고,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닮은꼴인 ‘공안통’ 검사 출신이다.

황 후보자를 바라보는 야당·시민사회단체 등 진보·개혁 진영의 여론은 냉담하다. 황 후보자는 야당에 의해 두 차례나 장관 해임안이 제출된 인물이다. 야당으로선 총리는 고사하고 장관으로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인물인 셈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황교안 카드’를 내밀었다. 야당에서는 “야당을 무시하고 공격하는 처사”라며 박 대통령을 맹비난하고 있다. 6월8~9일로 예정된 황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빤하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황교안 총리 후보자 지명에 대한 공개적인 반발 여론은 아직 감지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여권 일각에서도 ‘황교안 총리 카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잠복해 있다. 상황에 따라서는 안대희·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 때처럼 반발 여론이 수면 위로 떠오를 수도 있다. 여권 내 전략통으로 알려진 한 인사는 황 후보자 지명 직후 기자 앞에서 후임 총리의 3대 인물론을 거론하면서 조목조목 비판했다.

후임 총리 인선 기준은 ‘레임덕 관리형’

“신임 총리를 바라는 국민 여론은 지역 편중 현상을 치유할 상징적인 인물(화합형), 국회와 소통할 수 있는 정무 감각을 지닌 인물(소통형), 어려운 경제 여건을 해소할 수 있는 경제 식견을 가지 인물(경제통) 등 3대 인물론으로 모아졌다. 특히 박근혜 정부의 성공 여부를 결정지을 잣대가 경제 회복인데, 황 후보자는 법조 출신 관료다. 최경환 부총리 체제가 경제정책에서 큰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 총리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컸다. 그런데 황 후보자는 세 가지 인물론 중 어느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기대보다 실망이 큰 인선이다.”

검찰이 거액의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으로 포스코건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3월13일 인천시 연수구 포스코건설 건물에서 압수수색을 마친 검찰 수사관들이 압수품을 가지고 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황교안 카드’가 여권으로서도 부담스러운 것은 정국 운영의 파트너인 야당의 반발이 거세다는 점이다. 설령 청문회를 통과한다 하더라도 향후 정국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공무원연금 개혁 법안을 진통 끝에 통과시키며 오랜만에 여야 간 화해 무드가 조성되는 상황에서 황 후보자 지명으로 양측의 갈등이 다시 첨예화될 가능성이 커졌다. 박 대통령은 집권 2년여 동안 총 다섯 명의 총리 후보자를 지명했지만 단 두 명만이 청문회를 통과해 정식 총리로 임명됐다. 과반이 넘는 수가 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한 것이다. 청문회를 우여곡절 끝에 겨우 통과한 이완구 전 총리도 2개월여 만에 도중하차하고 말았다. 때문에 청와대가 총리 후보자 지명에 앞서 고려해야 할 1순위는 ‘청문회 통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황교안 카드’는 부담스러운 패였다. 최악의 경우 황 후보자가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상황이 빚어진다면, 집권 후반기에 들어선 청와대의 정국 장악력은 회복 불능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점을 의식했다면 청와대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다. 정홍원 전 총리 때처럼 ‘실세형’보다는 ‘관리형’ 인사를 상징적으로 기용할 수도 있었다. 박 대통령이 빤히 예상되는 반발을 무릅쓰면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차기 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배경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에게 가장 큰 적은 야당이 아니다. 집권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끊임없이 청와대를 괴롭혀온 레임덕이 가장 무서운 존재다. 레임덕이 오는 순간 단임제 대통령의 권력은 손바닥에서 물 빠져나가듯 사라지고 만다.

집권 중반기에서 후반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정권의 안정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회전문 인사, 야당과의 전쟁 선포 등 비판을 각오하고 황교안 카드를 꺼내든 것은 사정을 통해 레임덕을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황교안 후보자를 앞세워 청와대가 사정 드라이브를 걸 것이라는 배경에는 현 정부의 위기감이 배어 있다. 이러한 징후는 이미 이완구 전 총리 체제 당시 표출됐다. 총리를 정점으로 하는 사정 프로젝트를 통해 레임덕 위기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3월12일 이완구 당시 총리는 취임 후 첫 대국민 담화에서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것이 총리로서 최우선 임무”라며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부패와의 전쟁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필코 완수하고자 한다. 정부는 모든 역량과 권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한 부패와의 전쟁을 통해 구조적 부패의 사슬을 과감하게 끊어내겠다”는 서슬 퍼런 다짐이 뒤따랐다. 

부활한 사정 정국, 공직 기강 잡기부터

이 전 총리의 일성은 허언이 아니었다. 바로 그다음 날 40여 명의 검찰 인력이 투입돼 포스코건설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대국민 담화 후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3월18일, 검찰은 이명박 정권의 자원외교와 관련해 경남기업과 성완종 전 회장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다. 국무총리발(發) ‘사정 정국’이 전국을 강타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성 전 회장이 남긴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확산되면서 사정 정국의 방아쇠를 당겼던 이 전 총리가 낙마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사정 정국이 오히려 부메랑이 돼 돌아온 것이다. 

이 전 총리가 낙마하면서 사정 정국은 물밑으로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칼을 칼집에 다시 넣을 생각이 없었다. 사정 정국을 예고한 이 전 총리의 대국민 담화 때 동석한 황 장관이 신임 총리로 낙점을 받은 것이다. 미풍에 그쳤던 사정 바람이 황 후보자를 만나 거대한 태풍으로 몸집을 불릴 형국이다.

황 후보자가 공안통 검사의 이력을 살려 다시 ‘사정 정국’을 조성할 것이라는 분석은, 부패와의 전면전을 선언했던 이 전 총리의 대국민 담화가 나온 배경을 되짚어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 전 총리가 언급한 대기업 비자금 조성에 대한 수사는 포스코건설 외에 어떤 것도 진행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이 전 총리가 포스코건설 수사를 콕 집어 언급한 것이다. 국무총리가 검찰 수사 상황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의문이다. 모양새도 웃기다. 국무총리가 직접 나서 검찰 수사를 지휘한 꼴이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의문이다. 결국 검찰 출신이며 수사 상황을 보고받을 수 있는 우병우 민정수석 작품이 아니겠는가. 청와대가 청문회 때 백화점식 비리로 입지가 좁아진 이완구 총리를 밀어주기 위해 대독자로 이 총리를 간택한 것뿐이다.”

이 전 총리와 청와대가 긴밀하게 사정 정국에 대한 교감을 갖고 연출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이 전 총리 취임을 전후로 조성된 사정 정국이 청와대의 하명에서 비롯됐고, 또 이 전 총리와 적극적인 교감을 한 것이라면, 이 전 총리를 대신할 신임 총리가 공안통 법무부장관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황 후보자가 인사청문회를 뛰어넘어 후임 총리로 임명된다면, 검찰총장은 물론 후임 법무부장관, 나아가 우병우 민정수석까지 컨트롤할 수 있으리란 분석이다. 30년간 검찰에 몸담았던 노하우로 정국의 방향은 물론 속도까지 조절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다. 

그렇다면 황 후보자가 총리에 오른 후 사정의 첫 타깃은 누가 될까. 검찰 안팎에서는 이 전 총리가 거론한 여러 사회 비리 중 ‘공적 문서 유출’에 주목하고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올해 초 대검에서 공적 문서 유출을 경계하라는 지시가 떨어지기도 했다. 정윤회 문건 파동 이후 청와대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 공적 문서 유출이다”고 말했다.

공적 문서 유출은 공직자 기강과도 관계가 있다. 시사저널의 단독 보도로 알려진 국세청 직원 성매매 사건과 감사원 직원의 또 다른 성매매 사건 등 최근 공직자 기강 해이 문제가 수차례 지적되고 있다.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가 대기업 사정에 더 이상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결국 공직자들을 본보기로 삼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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