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29. “교육·민족 사랑한 기업가로 영원히 남고 싶다”
  • 소종섭│편집위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5.06.02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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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호, 1958년에 보험회사 설립…해방 직후 박정희와 인연

지난 5월27일 서울 광화문 교보생명빌딩에서는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화문글판 25년 공감 콘서트’가 열렸다. 광화문글판은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가 제안해 1991년부터 광화문 네거리 교보생명빌딩에 걸리기 시작했다. 가로 20m, 세로 8m 크기의 글판에 시민들이 공감하고 심금을 울리는 글귀를 내걸어 화제를 모았다. 그 일이 어느덧 25년이 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어떤 분들은 광화문글판이 바뀌면 계절이 바뀌는 걸 실감한다고 하신다. 처음에는 교보생명 직원들을 대상으로 경제 부흥 등 계몽적인 글귀를 올렸는데 고은 시인의 시구를 시작으로 점점 인문학적인 냄새가 나는 글귀로 바꿨다. 이제는 일반 시민들을 위한 공간이 됐다”고 회고했다.

교보생명 창업자는 신용호다. 그는 1917년 8월11일 신예범-유매순 부부 슬하 6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일명 ‘솔안마을’이 고향이다. 이곳은 거창 신씨 집성촌이다. 조선 성종 때 신용호의 17대조인 통례공 신후경이 월출산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에 터를 잡았다. 유매순은 남편과 아들들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바람에 집안을 이끌며 고생을 많이 했다. 그 탓에 집에는 늘 일제 형사들이 드나들었다. 신예범은 영암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단발을 하고 신학문을 익힌 선각자이기도 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야학을 열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호남 지방을 돌며 일본인 지주들에게 항의하는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이 때문에 두 차례나 감옥에 갇혔다. 풀려난 후에도 일제의 감시에 시달리는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5월27일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린 광화문글판 25년 기념 공감 콘서트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는 신창재 교보생명 대표이사 회장(오른쪽). ⓒ 시사저널 최준필·연합뉴스

신용호 아버지, 일제 때 두 차례나 감옥 

어릴 적 신용호는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다. 폐병에 걸려 죽을 뻔했으나 “월출산 정기가 너를 죽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는 어머니 유매순의 강한 의지로 질경이풀을 달인 물을 먹으며 살아났다. 이후 둘째형 내외만 고향에 남기고 전 가족이 목포로 이사했다. 신용호는 보통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입학이 허락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때 좌절감과 소외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독학으로 실력을 연마했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천일(千日) 독서’를 목표로 각종 위인전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당시 신용호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은 <헬렌 켈러>와 <카네기 전기>였다. 특히 <헬렌 켈러>는 신용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훗날 사업가로 성공한 신용호는 “사흘만 시력이 주어졌다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유용하게 쓰라”고 직원들에게 강조하곤 했다. <카네기 전기>를 읽으면서는 취직보다는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보통학교 졸업장도 없는 신용호는 애초부터 취직할 생각을 갖지 않았다. 장사를 할 운명이라고 생각한 그는 일단 경성(지금의 서울)으로 간 뒤 기회를 봐 중국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아버지 신예범에게 뜻을 밝혔다. 그러나 신예범은 경성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 유매순의 반대는 더 강했다.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며 야단쳤다. 그러나 신용호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마당에서 어머니가 있는 방을 향해 큰절을 올린 신용호는 목포역으로 가 경성행 야간열차를 탔다. 가출이었다. 1936년 3월이었다. 경성을 거쳐 중국으로 간 신용호는 1940년 24세 때 베이징의 자금성 동쪽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회사를 세웠다. 곡물 유통업을 하는 이 회사의 이름은 ‘북일공사’였다. ‘허베이(河北) 제일, 베이징(北京) 제일’이라는 뜻이었다. 간판을 내건 지 2년 만에 직원이 100명을 넘어서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정신없이 사업에 열중하던 1943년 어느 날, 신용호는 어머니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아버지가 위독하다. 죽기 전에 너를 보고 싶어 하니 만사 제쳐놓고 다녀가라.’ 깜짝 놀라 급행열차를 갈아타고 집으로 달려간 신용호는 마당을 거닐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 깜짝 놀랐다. 신예범은 “네 나이도 이제 26세다.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가를 가야 한다. 그래서 거짓으로 전보를 쳤다. 이미 혼처를 정해두고 준비도 다 끝내놓았으니 두말 말고 장가를 들어라”고 했다. 며칠 후 신용호는 신부 집에 가서 전통 혼례를 올렸다. 신부의 이름은 유순이였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신용호는 독립운동을 하던 시인 이육사를 만났다. 두 사람은 집안 어른인 신갑범의 소개로 이미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신용호는 이육사가 필요로 하는 자금을 챙겨주었다. 이후에도 이육사는 자신이 직접 오거나 사람을 보냈고 그때마다 신용호는 많은 돈을 건네주었다. 신용호는 빼앗긴 조국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신용호는 이육사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순국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보험 사업에 일생 바쳐

신용호의 인생에서 잊힐 수 없는 또 하나의 사건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만남이다. 광복 이후 중국 톈진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 안에서 신용호는 박정희를 만났다. 계급장을 뗀 군복 차림에 기다란 군도(軍刀)를 차고 있던 박정희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훗날 박정희가 5·16을 일으켰을 때 신용호는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만났던 박정희를 떠올렸다.

신용호는 해방된 고국에 돌아와 ‘민주문화사’라는 출판사를 만들었다. 이때 신용호가 좌우명으로 삼았던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경구는 1981년 교보문고를 열면서 서점 입구에 큰 글씨로 새겨진다. ‘민주문화사’는 1946년 말 펴낸 <여운형 선생 투쟁사>가 18쇄를 찍는 등 히트를 쳤다. 그러나 불합리한 서적 유통 구조를 접한 신용호는 사업을 접었다. 이어 ‘군산직물’ ‘한양직물’ ‘동아염직’ 등을 잇달아 창업했으나 6·25를 만나 좌초했다. 광복 이후 벌인 사업에서 신용호는 실패를 거듭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산업은행에서 부족한 자금 6억원을 대출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한국제철을 창업했다. 전쟁이 끝난 후 고철이 각지에 범람하는 것을 보고 제철 사업이 돈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울 영등포 오류동에 20만평의 부지를 사들이고 국내 최초로 냉간압연 시설을 도입했다. 그러나 자본금을 댄 동업자 중에 야당 중진이었던 양일동 의원이 있어 ‘야당 회사’로 찍히며 모든 것이 막혀버렸다. 이승만 정권은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1955년 초, 시운전을 눈앞에 두고 공사는 중단됐다. 신용호는 집은 물론 손목시계까지 팔아치우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여섯 번째 실패였다.

좌절하지 않고 새 사업 아이템을 찾던 신용호는 한국 특유의 교육열과 당시 막 싹트기 시작했던 보험을 결합하는 것에 눈이 트였다. 보험회사 설립에 나섰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신규 보험회사 설립을 불허한다는 정부 방침이 문제였다. 신용호는 하루도 빠짐없이 6개월 동안 김현철 당시 내무부장관의 집 앞에 가서 장관이 출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김 장관이 어느 날 수행 비서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군데 왜 매일 내 집 앞에 있는가?” 이렇게 해서 김 장관을 독대한 신용호는 그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의 허가를 얻어 회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그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일화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였다. 

신용호는 1958년 1월, 서울 종로1가 60번지의 2층짜리 건물에서 직원 46명과 함께 교보생명의 전신인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를 창립했다. 창립 이념은 국민교육 진흥과 민족자본 형성. 이후 11일 만에 대한교육보험으로 이름을 바꿨다. ‘진학보험’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교육보험은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에게 보험에 가입하면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주면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대한교육보험은 창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을 차지하며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했다. 보험산업으로 국가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1월 아시아생산성기구(APO)로부터 ‘APO국가상’을 받은 신용호는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려웠던 시절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우수한 인적 자원을 키워내고, 민족자본을 형성해 경제 자립 기반을 구축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보험 사업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교육과 민족을 사랑한 기업가로 영원히 남고 싶다.”

신용호와 관련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보빌딩이다. 1981년 완공돼 화제를 불러일으킨 광화문 교보빌딩의 설계자는 당시 빌딩 설계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미국의 시저 펠리였다. 그는 미국 예일 대학 건축대학장을 지냈다. 당시 신용호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건축물은 건축주의 품격과 인격을 말해준다. 비싼 재료를 써서 지나치게 화려함을 강조한 건물을 보면 사람들은 졸부를 떠올린다.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딱딱한 인상을 주는 건물은 사람들이 외면한다. 자연 친화적이고 안정감을 주는 건물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1996년 12월19일 신용호 교보생명 명예회장(오른쪽)이 연세대 상경대 대강당에서 열린 기업윤리대상 시상식에서 학생 대표로부터 기업윤리대상을 수상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산부인과 의사였던 장남이 사업 이어받아

신용호는 200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향년 86세였다. 어린 시절 호된 병마를 겪고 58세 때 교통사고로 다리 수술을 받은 것 말고는 보약 한 첩 먹지 않고 산 그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었다. 평소 신용호는 ‘일을 안 해서 죽지, 일을 해서 죽는 사람은 없다’는 생활철학을 갖고 있었다. 틈틈이 골프로 건강을 다졌다. 부인 유순이는 2012년 89세로 별세했다.

신용호의 큰형 신용국은 호남 지방의 항일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떠돌았던 독립투사였다. 그의 큰아들 신동재는 2000년까지 교보의 각종 시설물 관리회사인 교보리얼코 회장을 지냈다. 신용호의 둘째 형 신용율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그도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신용율의 둘째 아들 신평재는 교보생명 사장, 루마니아 명예영사 등을 지냈다. 신용호의 셋째 형 신용원은 일본으로 유학 가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전일본 클래식 콩쿠르에서 1등을 하는 등 실력을 인정받았다. 일본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 반드시 불러야 했던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노래 <우미유카바>를 끝내 부르지 않는 등 항일 음악가로 활동하다가 6·25 때 납북됐다. 신용호의 넷째 형 신용복은 보통학교를 마치고 객지로 나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 운영하던 조선생명에서 지사장을 지냈다. 그러나 6·25 때 실종됐다. 신용호의 동생 신용희는 목포상고를 나와 산업은행에서 일하다 30년간 교보에 몸담으며 부사장과 회장 등을 지냈다. 신용희의 아들 신인재는 이동통신사에 솔루션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업체 필링크의 사장이다.

신용호는 유순이와의 사이에 2남 2녀를 뒀다. 첫째 신영애는 함병문 전 서울의대 마취과 교수와 결혼했다. 둘째 신경애의 남편은 서울고등법원 판사,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 등을 지낸 박용상 언론중재위원장이다. 두 사람은 1남 1녀를 뒀다. 신용호의 셋째이자 큰아들인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은 2010년 지병으로 사망한 정혜원 전 봄빛여성재단 이사장과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신창재는 2013년 11월 박지영과 선으로 만나 재혼했다. 이화여대 중어중문학과를 나온 박지영은 이화여대 대외협력처에서 근무했다. 박지영의 부친은 조각가인 박병욱 전 한국미술협회 부회장이고 박지훈 건국대 예술학부 교수가 오빠다. 신창재는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린 한 달 뒤 임원회의에서 “저 결혼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신용호는 큰아들 신창재가 서울대 의대에 입학하자 이런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세조는 의사를 여덟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심의(心醫), 둘째 식의(食醫), 셋째 약의(藥醫)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나쁜 의사라고 했다. 그만큼 좋은 의사가 되기 힘들다. 학업에 정진해야 한다.” 신창재는 1978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해 산부인과 의사로 활동했다. 특히 불임 치료에서 명성을 얻었다. 국내에서 첫 번째 시험관 아기를 탄생시킨 의료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있다가 1993년 대산문화재단 이사장을 맡았고 1996년 교보생명 부회장을 맡아 본격적으로 경영에 합류해 현재 교보생명 회장으로서 교보그룹을 이끌고 있다.

미국 파슨스스쿨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신용호의 막내 신문재는 문구·팬시용품 등을 취급하는 교보핫트랙스를 운영하다 2005년 교보문고에 경영권을 넘겼다. 2012년 문구용품 도소매업체인 디자이너이미지를 세워 현재 대표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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