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피아’ 위세 눌려 의료계 꼼짝 못하다
  • 노진섭 기자 (no@sisapress.com)
  • 승인 2015.06.15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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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사단체, 보건의료기관 친정부 인사 장악…‘메르스 구멍’ 뚫린 원인 지적

‘보피아’는 보건복지부와 마피아를 합친 말이다. 세간에 이 말이 나오는 이유는 최근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의 배경에 보피아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병원, 의료 전문가, 4대 보건의료 공공기관장 등 의료계를 관료 출신들을 앉혀 장악한 것이다. 씨줄과 날줄로 엮인 의료계는 신종플루 사태처럼 메르스 사태에서도 정부를 향해 입바른 소리를 할 수 없다. 시사저널은 최근 호(1338호)에서 메르스 사태를 인재라고 표현했다. 한국 의료 능력으로 메르스를 초기에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보피아가 사라지지 않으면 제2의 메르스 사태가 재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삼성서울병원은 5월30일 의료진·환자 등 893명을 격리했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격리 대상자는 6월2일 791명, 6월3일 1364명이었다. 정부가 삼성서울병원의 격리 대상자를 제외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보건 당국은 건양대병원·을지대병원 등 다른 병원에 대해서는 메르스 환자가 생기자마자 격리 조처를 내렸음에도 유독 삼성서울병원만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부가 삼성서울병원에 특혜를 준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또 정부가 메르스 환자가 나온 병원명 공개에 난색을 보였던 이유도 삼성서울병원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가정의학과 전문의)은 “정부로부터 불이익을 받을까 봐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병원이나 의사는 정부에 협조하지 않고는 일을 할 수가 없다”며 “이번 사태가 진정된 후 국정감사를 통해 밝혀야 할 의혹”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삼성서울병원은 영리병원 도입 등 정부의 의료정책에 호의적인 편이었고, 정부는 그런 병원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정부와 병원은 연구비로도 묶여 있다. 정부는 주로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연구비를 지원한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연간 1조원가량의 세금이 의료 분야 연구에 투입되는데, 교수 대다수는 자신이 관심 있는 연구에 그 돈을 쓴다”며 “공익적 가치가 있는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어서 국민 돈이 허투루 쓰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장관이 6월2일 정부세종청사 브리핑룸에서 메르스 관련 관계 부처 회의 결과 및 향후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김우주 대한감염학회 이사장 겸 신종인플루엔자 범부처 사업단장 © 연합뉴스

“이상하리만큼 감염 전문가 제 목소리 안 내”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 사태 이후 정부는 매년 감염병 연구에 1000억원을 투입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가 내놓은 2015년 감염병 연구 동향 보고서를 보면, 정부는 3년간(2010~12년) 대학, 국공립 연구소 등이 진행한 2688개 감염병 연구에 3848억원을 지원했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한 연구에 1억원 남짓인데 이는 연구에 필요한 행정비도 안 되는 액수”라며 “그나마 치료나 백신 개발 연구에 돈을 썼음에도 치료제나 백신을 개발했다는 소식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복지부는 5년 동안 감염병 위기 대응에 854억원을 투입했다. 같은 기간 질병관리본부는 감염병 관리 기술 개발에 323억원을 사용했다. 그런데도 신종플루 사태, 메르스 사태 등 감염병 확산이 반복되고 그때마다 방역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연구 분야가 편중된 탓이라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감염병 연구비의 67.5%는 치료 기술과 기초연구 개발에 사용됐다. 진단·감시 등에는 20% 남짓 배정됐다. 예방보다는 치료에 우선순위를 둔 지원이었다. 이 보고서는 “인프라와 일반 사업에 연구비가 상당 부분 쓰였고, 감염병 연구에는 적게 지원됐다”며 “국가 방역 체계와 사회의 감염병 대응 역량에 직접 도움이 되는 감염병 연구가 많아져야 한다”고 제안했다.

메르스 사태로 감염병 연구에 대한 투자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연구 분야의 편중 현상을 바로잡지 않으면 제2의 메르스 사태는 또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이번 메르스 사태 때 감염병 전문가들이 올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했으면서도 감염병 분야에 더 많은 예산을 배정해달라고 아우성을 칠 것”이라며 “연구비 나눠 먹기 풍토를 없애고 실제 사회적 대응에 이바지하는 연구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6월8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의 폐쇄된 응급실 출입구로 병원 관계자들이 이동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 사태를 경험한 정부는 감염병에 국가적 대응 필요성을 절감했다. 2010년 신종인플루엔자 범부처 사업단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700억원에 육박하는 나랏돈을 투자했다. 정부는 이 사업단 단장에 김우주 고려대 의대 감염내과 교수를 임명했다. 2008~09년 당시 김 교수는 감염내과 전문가 단체인 대한감염학회 부회장이었고, 2013~14년 부이사장을 거쳐 지난해 이사장이 됐다. 전임 이사장은 송재훈 삼성서울병원 원장이다.

이는 정부가 감염 전문가들을 손에 넣은 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감염 전문가들은 정부의 안일한 방역 조치에 입바른 소리를 내지 않는다. 기자들의 취재에 일부 감염내과 전문의들은 “의사 개인이 어떤 말을 하기보다는 대한감염학회로 창구를 일원화해서 언론에 대응하기로 했다”며 말을 아꼈다.

이에 대해 노환규 전 의사협회장은 “메르스 난리 통에도 이상하리만큼 감염내과 의사들이 정부의 늑장대응이나 방역 시스템 허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며 “병원 명단 비공개 등을 고수하는 등 오히려 정부 당국에 협조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우석균 정책위원장도 “의사나 병원 관련 단체가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능을 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 연구비로 감염병 전문가 우군화

보건복지부 산하에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한국보건산업진흥원·건강보험공단·국립중앙의료원 등 4대 보건의료기관이 있다. 정부는 각 기관 수장 자리에 친정부 인사를 배치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초기에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겠다”는 인사 원칙을 강조한 바 있지만 보건의료 분야는 낙하산 인사 논란으로 얼룩졌다.

국민이 낸 의료비가 제대로 쓰이는지 심사하고 국민이 받은 진료가 적정한지 평가하는 기관이 심평원이다. 일종의 병원 감독 관청인데 원장 인선을 앞둔 2013년 5월 김진수(현 청와대 보건복지비서관) 당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이 거론됐다. 김 전 연구위원은 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고용·복지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또 문형표 복지부장관(연세대 경제학과 교수)과는 연세대 동문이다. 심평원 노조는 즉각 반발했다. 의약단체·직능단체·정치권·공단 등 여러 이해 집단의 첨예한 이해관계 속에서 심평원 본연의 역할을 견지하면서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 원장 자리에 와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반대 여론에 막혀 심평원장에 손명세 전 연세대 보건대학원장이 임명됐다. 공교롭게도 손 원장도 문 장관과 대학 선후배 사이다.

2014년 3월 임명된 정기택 한국보건산업진흥원장도 선임 당시 낙하산 인사 논란에 휩싸였다. 정 원장은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새누리당 내 국민건강특별위원회 민간 자문 역할을 하면서 의료 영리화 정책 추진에 앞장선 인물이다. 보건의료노조는 정 원장이 영리병원 도입, 병원 경영 지원회사 확대, 네트워크 치과의원 활성화, 의료산업화를 주장해온 만큼 의료 민영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것을 우려하며 반대 견해를 나타냈다. 대한의사협회·치과의사협회·한의사협회·약사회·간호협회 등이 참여한 ‘보건의료 상업화 저지를 위한 6개 단체 공동협의회’도 성명을 내고 정 원장 임명 철회를 요구한 바 있다.

 

친정부 인물·대학 동문 대거 포진

건강보험공단은 50조원이 넘는 천문학적 액수를 관리하고 가입자 5000만명의 건강보험을 담당하는 공기관이다. 2014년 12월 공단 이사장에 성상철 전 대한병원협회 회장이 임명됐다. 그는 서울대병원장과 대한병원협회장으로 있으면서 의료계를 대변하던 인물이었다. 보건의료단체연합은 당시 “하루아침에 의료계와 대립 관계인 건강보험공단의 수장이 될 수 없다”며 반대했다. 성 원장이 몸담았던 서울대병원 노조도 공단 이사장 선임 반대 의견을 냈고, 시민단체와 야당 모두 거세게 반발했다.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문형표 장관은 성상철 건보공단 이사장, 정기택 보건산업진흥원장 등 낙하산 보은 인사들의 임명을 강행하고 복지부와 산하 기관 인사를 전횡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친정부 성향인 성 원장을 끌어들임으로써 얻는 이득이 클 것으로 보고 임명을 관철했다. 문형표 장관은 국회에서 “반대하는 각계 움직임을 알고 있지만 건보공단 이사장은 정책 결정자가 아니고 중립적으로 업무에 임하는 자리다. 과거에도 건보공단 이사장에 의료인 출신 인사가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복지부 소속의 국립 의료기관이다. 국립중앙의료원 신임 원장에 17대 국회에서 새누리당 의원을 지낸 안명옥 차의과대학 보건복지대학원 교수가 2014년 12월 임명됐다. 안 원장은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 복지부장관 하마평에 올랐던 인물로 18대 대선 당시 새누리당 중앙선대위의 여성권익특별본부장을 맡은 바 있다. 연세대 의대 73학번인 그는 문 장관과 동문이기도 하다. 보건의료노조는 “박근혜 정부 출범 당시 보건복지부장관 하마평에 오를 만큼 현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온 인물”이라며 낙하산 인사 의혹을 제기했다.

심지어 지난해 9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된 김성주씨(성주그룹 회장)도 문 장관과 동갑이면서 1979년 연세대를 졸업한 동문이다. 김씨도 2012년 18대 대선에서 새누리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은 바 있어 낙하산 인사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이와 맞물려 복지부 고위 관료들이 퇴직 후 대거 산하 기관이나 이익단체에 재취업하기도 했다. 현직에서의 힘을 등에 업은 재취업은 향후 뒤봐주기, 관계 기관과의 과다한 업무 밀착, 자기 사람 챙기기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연구비 등으로 감염병 전문가 집단을 얽어매고 각 공공 보건의료기관까지 장악한 정부는 반대 여론 없이 보건의료 정책을 야금야금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르스 사태라는 복병을 만나면서 보피아 논란이 거세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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