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의 처세술에 도통한 ‘무대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7.01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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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박근혜-유승민 사이에서 특유의 ‘치고 빠지기’

국회법 개정안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예상했던 그대로다. 지난 5월29일 국회 본회의 통과 직후 터져 나온 청와대발 ‘위헌성’ 지적은 그 예고편이었다. 때문에 일반의 관심은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즈음한 발언 수위에 쏠렸다. 박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를 국민이 심판해달라”며 정치권 전체를 싸잡아 매도했다. 대통령이 직접 손질했다는 6월25일 국무회의 모두(冒頭) 발언에는 ‘심판’ ‘저의’ ‘도덕적 공허감’ 등등 서릿발 같은 단어들이 도사리고 있다. 매운 표현뿐 아니라 원고지 30장 분량의 모두 발언 16분 가운데 12분을 정치권 성토에 할애한 ‘양(量)’만으로도 대통령의 심사가 읽힌다. 

박 대통령의 분노를 새삼 확인한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의 뜻을 수용하기로 했다. 의원총회가 ‘국회법 개정안을 재의(再議)하지 않고 자동 폐기’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4시간 동안 격론을 벌인 의총은 박 대통령이 ‘명시는 안 했지만 의사 표명은 확실히’ 한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요구에 대해서는 거부했다. 여권 내부에 엄청난 회오리가 휘몰아칠 게 당연하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국회에 대한 전쟁 선포”라며 발끈한 야당 때문에라도 정치권이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돼 있다. 그런 마당에 여권 내부의 첨예한 갈등이 겹치면서 정국은 한 치도 내다보기 어려운 지경에 처했다. 

4월16일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비공개 단독 회동을 가졌다. 김 대표는 ‘현재 권력’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 청와대 제공

‘식물 청와대’ 될 것이란 절박함에 초강수  

청와대가 국회법 개정안을 국회로 돌려보내면서 이 같은 격랑을 예상 못했을 리는 없다. 이 같은 미증유의 초강수가 수반할 후폭풍이 국정 운영에 부담이 되리라는 사실도 예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청와대가 이런 선택을 감행한 이유는 빤하다. 더 밀렸다가는 ‘식물 청와대’가 될 거란 절박함 때문이라고 보는 게 적확하다. 임기 첫해를 ‘인사 패착과 대선 공정성 시비’, 2년 차를 ‘세월호와 정윤회 및 문고리 3인방 등의 국정 농단 논란’, 3년 차를 ‘성완종 리스트와 메르스 파동’ 속에 허송한 청와대로서는 다급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여의도 정치권은 벌써 내년 총선을 의식한 기조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2015년 한 해가 거의 지나간 셈이며, 이는 5년 단임 대통령 임기가 막바지에 이른 것과 통한다. 청와대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장면이다. 그런 만큼 여당까지 청와대를 정면으로 치받는 일이 거듭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게 마련이다. 몇 달 전, 청와대 스스로는 입에 담기 싫을 ‘탈당’까지 시사했음에도 여당의 움직임이 청와대의 뜻과 더 어긋나는 상황으로 치닫자 박 대통령이 결국 격분하기에 이르렀다.

청와대의 다음 수순은 미지수다. 대통령의 ‘탈당’ 결행, 여야 정치권을 겨냥한 ‘사정(司正)’ 등 동원 가능한 수단은 대충 짐작이 간다. 새누리당, 그리고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대응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어차피 ‘원만한’ 수습은 물 건너갔다는 점이다. 결국 ‘독수(毒手)’ 내지 ‘강수(强手)’가 충돌하는 안개 정국이 전개되리라는 전망이다. 이런 딱한 전망은 무엇보다 지금의 대결 국면이 단순한 당·청, 여·야 간 갈등이 아니라 2017년 대선을 전제한 가운데 진행되는 데서 비롯한다. 큰 틀에서 보면 ‘국회법 개정 사태’의 기저 역시 차기 대권 게임과 맞물려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안팎의 속사정은 여권의 ‘2인자’에 해당하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더 짓누른다. 당·청 갈등 전후 과정의 한복판에 서 있고, 그 발단이 무엇이든 사태를 추슬러야 하는 여당 대표로서 특히 ‘차기’와 직결되는 난국을 돌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거머쥔 김 대표는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여권의 차기 주자 1순위로 부상했다. 청와대의 의중을 거스르며 당 대표로 선출된 이래 그는 조심스러운 ‘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여론의 풍향을 의식해 청와대와 배치되는 거취를 마다하지 않다가도 이내 선회 내지 후퇴하는 나름의 ‘유연성’을 발휘했다. 지난해 ‘이원집정부제 개헌’ 파동 당시의 행보는 대표적 사례다. 중국 방문 중 청와대가 질색하는 개헌 필요성을 제기했다가 청와대의 격한 비판에 곧장 사과했다. 그냥 사과가 아니라 “제 불찰이다. (대통령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정치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표현까지 구사한 것이다. 

이후 ‘국회 본회의장에서의 정윤회 문건 노출’ ‘공무원연금법 개정안 통과’ 등등에서 보인 그의 태도도 흡사하다.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에 대한 여야 합의에 청와대가 발끈했을 때는 “청와대도 다 알고 있었으면서···”라며 청와대를 향해 눈을 ‘흘기기’는 했지만, 바로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며 물러섰다. 그의 이런 행보를 ‘치고 빠지기’로 치부하며 경계하는 친박 그룹의 비판이 있지만 어쨌든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기 길을 가고 있다. 

YS 밑에서 ‘이회창 경우’ 통해 2인자 배워

1980년대 중반에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에 가담해 YS 정권 청와대의 민정비서관을 시작으로 입신의 길을 연 김 대표는 ‘2인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꿰고 있다. ‘현재권력’(대통령)과 맞서는 ‘2인자’는 무의미하며 결코 ‘차기’가 될 수 없음을 ‘이회창 경우’를 통해 배웠다. 1997년 대선 당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의 패배가 단순히 김대중-김종필의 DJP연합 때문이 아니라 YS와의 갈등이 결정적이었음을 김 대표는 직시하고 있다. DJP연합이 절묘한 것이긴 했지만 YS를 치받은 또 다른 부산물인 ‘이인제 후보 500만 표’가 치명상을 입혔던 사실을 김 대표는 잊지 않는다. 그는 친박 그룹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여당 대선 후보 가능성 타진’ 모임 개최, 자신의 딸 대학교수 임용 특혜 시비 등이 우연한 돌출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래서 웬만한 비아냥거림도 삭이고 체면을 구길 만한 몸 낮춤도 주저하지 않게 만든다. 2017년 12월이 청와대에는 촉박한 시간이지만 자신에게는 길고 긴 여정임을 알기에 조심스러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김 대표는 박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 버튼을 누르자 곧장 “대통령께서 어렵고 고뇌에 찬 결정을 하신 것을 당이 절대 존중한다”고 했다. 한마디, 한마디에 청와대를 배려한 냄새가 물씬 풍긴다. 대통령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한 조심은 보기 민망스러울 정도다.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통과 직후 청와대가 보인 반응에 뜨악해하던 때와는 정반대다. 그간 이병기 청와대비서실장, 서청원 최고위원과 접촉하며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던 김 대표는 “당·청 간 소통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도 했다. 마치 이번 난리가 당·청의 오해에서 비롯한 ‘단순 사고’라는 투로 얼버무리는 모양새다. 당·청 갈등 및 여·야 대치 상황 수습 책임자로서, 여권의 차기 주자로서 ‘2인자’ 김 대표는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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