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45. 김구, 광복 소식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탄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7.07 19:3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복군, 미국과 한반도 탈환 공동 군사작전 계획하던 중 일제 패망

1945년 8월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서안(西安)에 있었다. 섬서성 주석 축소주(祝紹周)와 저녁 만찬을 마치고 쉬고 있는데, 중경(重慶·충칭)에서 전령을 받은 축 주석이 “왜적이 곧 항복한다”고 전해주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뜻밖에도 “이것이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한탄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1919년 3·1혁명 직후 상해로 망명해 1945년까지 온갖 신고를 다 겪은 만 예순다섯의 노혁명가의 반응치고는 뜻밖이다. 그 이유는 한국광복군의 정식 참전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광복군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못해 ‘장래에 국제 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축 주석 집에서 나온 김구는 “내 차가 큰길에 나설 때에는 벌써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 소리가 성중에 진동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임정 주석 김구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1940년 9월15일 김구 주석의 ‘한국광복군 선언문’ 발표와 함께 공식 창설됐다. ⓒ 연합뉴스

임정 깃발로 국내 진공 작전 펼쳤다면…

3·1혁명의 결과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위기에 빠진 근본 이유는 ‘무장투쟁론’보다 ‘외교독립론’을 우선했던 독립운동 전략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임정이 무장투쟁 자체를 방기한 것은 아니었다. 임정이 1919년 12월18일 발표한 ‘대한민국 육군임시군제’ 등이 이를 말해준다. 이에 따르면, 임정은 1만3000~3만여 명의 병력을 보유한 군단급 군대 편성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 정도 병력이 있어야 일제와 전면전을 벌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때 만주 지역에는 70여 개의 독립군 무장단체가 있었다. 압록강 대안 서간도의 이상룡·김동삼 등이 이끄는 ‘서로군정서’와 두만강 북쪽 북간도의 서일·김좌진 등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대표적이었다. 서로군정서의 모체인 교민 자치 조직 한족회는 “임시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두되 독립군을 지휘할 군정부는 만주에 두자”고 임시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사실 이 방안이 외교독립론과 무장투쟁론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상해 임정에서는 외교독립론에 따라 외교 활동을 하고 만주의 군정부에서는 무장투쟁론에 따라 임정의 깃발로 국내 진공 작전을 펼쳤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다. 만주의 통의부 일부 세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참의부)로 재편돼 활발하게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한족회의 건의대로 만주에 군정부를 둬 통일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지는 못했다. 여기에는 외교독립론에 치중했던 임정 노선의 문제가 가장 컸지만, 임정 군무차장 김희선의 “뜻은 좋으나 재정이 문제”라는 말처럼 군정부를 유지할 재정이 없었던 문제도 있다. 임정의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의 탄압으로 1년도 못 가서 와해된 데다 임정 대통령 이승만이 임정 직제에도 없는 구미위원부를 미국에 만들어 미주 주민들의 애국후원금을 별도 관리한 탓에 임정의 재정은 어려웠다.

3·1혁명의 열기가 가라앉으면서 큰 위기에 빠진 임정의 돌파구를 연 것이 1930년대 시작한 ‘의열투쟁’이었다. 임정 산하 한인애국단 소속의 이봉창이 1932년 1월8일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고, 같은 해 4월29일 윤봉길이 상해 홍구공원에서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 등을 폭살시킨 홍구공원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면서 임정에 대한 지원에 나섰다.

이런 상황에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정은 유동열·이청천·이복원·현익철·김학규·안공근 등 6인으로 군사위원회를 구성해 광복군 창설에 나섰다. 그러나 전열을 채 정비하기도 전인 1937년 10월 일본군이 임정이 있던 항주(杭州)를 점령하자 임정은 장사(長沙), 광주(廣州), 유주(柳州), 기강(?江), 중경(重慶) 등지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중경에 도착한 이후 한국광복군 창설에 착수했다. 1940년 5월 임정은 ‘한국광복군 편련 계획 대강’을 발표하는데, ①군의 경비 및 기재 장비는 외국 원조로 충당한다. ②군사 간부를 단기 훈련으로 대량 양성하는 한편 국내, 만주, 남북 중국에 요원을 파견하여 동포 사병을 초모 훈련한다. ③군 창립 1개년 후에는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해서 중·미·영 등 연합군에 교전단체로 참가해 전투를 전개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김구 임시정부 주석 ⓒ 연합뉴스

광복군, 중국군사위원회의 ‘예속’ 요구 거부

임정은 중국의 한국 담당 책임자인 주가화를 통해 이 계획을 장개석에게 제출했는데, 장개석은 이를 승인했지만 중국군사위원회는 거부했다. 임정이 중국군사위원회의 ‘광복군 예속’ 요구를 거부하고 독립성과 자주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군사위원회는 중국 땅에서 중국의 자금으로 운영하는 군대는 자신들이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임정의 뜻과 달랐다. 임정은 중국군사위원회의 ‘예속’ 요구를 거부하고 1940년 8월4일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이범석 등 30여 명의 군사 전문가로 광복군 총사령부를 구성했고, 9월15일에는 김구가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해서 광복군 창설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나아가 임정은 9월17일 중경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을 개최했는데, 중국의 여러 유력 인사들과 각국의 외교사절 및 각 신문사 대표들도 초청했다. 미주 교포들이 보내준 4만원의 후원금으로 치른 행사였다.

한국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 예속을 거부하고 임시정부의 직할 군대로 창설되었다. 그러자 중국군사위원회는 중국 내 각 전구(戰區) 사령관에게 광복군의 활동을 통제하라고 명령했고, 이 때문에 광복군은 중국 내에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중국군사위원회 군정부 관할하에 있던 조선의용대가 중국공산당 지배 지역인 화북(華北)으로 넘어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개석은 참모총장 하응흠(何應欽)에게 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직접 장악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1941년 11월15일 ‘한국광복군 행동 9개 준승(準繩·법칙)’을 광복군에 전달했다. 9개 준승의 제1항은 중국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통할 지휘하고 참모총장이 이를 장악 운용한다는 것으로서 이 원칙 아래 8가지 규제 사항을 제시했다. 광복군의 초모·훈련·편성·작전 등 모든 사항은 중국 측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신 광복군에 대해 인적·물적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거부하면 활동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임정과 광복군은 일단 ‘9개 준승’을 받아들였다. 이때 광복군은 3개 지대를 편성했는데, 제1지대는 의열단 단장 출신 김원봉이 지대장으로서 조선의용대 계열로 구성되었고, 제2지대는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던 이범석이 지대장으로 서안에 본부가 있었는데, 종전의 제1·제2·제5지대가 통합된 것이었다. 제3지대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김학규가 지대장으로 안휘성(安徽省) 부양(阜陽)에 본부가 있었는데, 북경·천진 등 주로 적지였던 화북 지역과 화중·화남 지역을 무대로 삼았다. 광복군은 3개 지대를 빠른 시일 내에 3개 사단으로 발전시켜 연합군의 교전단체로 참가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2014년 9월17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한국광복군 창군 제74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광복군, 연합군 교전단체로 참가 계획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먼저 중국군사위원회의 지휘를 받는 조직상의 한계를 벗어나야 했다. 말이 한국광복군이지 간부 중에는 중국군 장교가 더 많았다. 1942년 총사령부 간부 45명 중 73%에 해당하는 33명이 중국군 장교였으며, 1945년 3월에는 광복군 장교 117명 가운데 65명이 중국군 장교였다. 중국 땅에서 중국 자금으로 운영되는 광복군으로서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지만 이것은 임정이 당초 광복군을 창설하려 한 목적과는 다른 것이었다.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이 “남의 땅에서 군사 활동을 하자니 부득이 9개 준승을 접수하게 되었다”고 한탄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청천이 “9개 준승은 확실히 가혹합니다만 점점 고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라고 임시의정원에 보고한 것처럼 광복군의 독립성을 되찾기 위한 교섭에 나섰다. 부단한 교섭 결과, 1944년 7월 참모총장 하응흠이 9개 준승의 취소를 주요 골자로 하는 중한군사협정 초안을 장개석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1944년 8월23일 하응흠은 ‘9개 준승’ 취소를 통보하고, 대신 임정과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을 체결했다. 이로써 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제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임정에 직속하게 되었다. 광복군에 대한 중국의 자금 지원은 차관(借款)으로 변경되었다. 임정은 1945년 3월 ‘임시정부 군사 진행 계획’을 통해 광복군의 활동 지역을 만주와 한반도까지 확대시키고 한반도에 지하군을 편성하는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또한 미군과 한반도 탈환을 위한 공동 군사작전을 계획하는 도중에 일제가 패망했으므로 김구가 한탄한 것이었다.

임정이 중국 땅에서 중국 자금으로 운영하는 광복군의 독립성을 되찾은 사례는 현재 한국이 전시작전권을 무기한 미국에 양도한 경우와 비교된다. 한국 땅에서 한국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무기한 양도한 행위를 한국광복군의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던 임정 요인들과 광복군 수뇌부들이 봤다면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연평해전을 둘러싸고 뒤늦게 승전 선언을 했지만, 그 당시 국방부장관 및 군 지휘부의 모호했던 행태가 또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자국 군대 보유에 대한 임정과 광복군 수뇌들의 피 끓던 정신으로 전시작전권 문제를 다시 바라볼 때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