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미네이터의 약속 “I’ll be back”
  • 허남웅│영화평론가 ()
  • 승인 2015.07.0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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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새로운 유행 ‘오리지널의 향수 불러오기’

지금 할리우드는 과거 성공한 시리즈의 오리지널을 다시금 불러오는 데 주력하고 있다. 얼마 전 개봉한 <쥬라기 월드>가 <쥬라기 공원>(1993년 작품)의 영광을 재현한 데 이어 이번에는 I’ll be back, 터미네이터가 귀환했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이하 <터미네이터 5>)는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다. <터미네이터>(1984년)와 <터미네이터 2>(1991년)를 연출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는 <터미네이터 5>를 두고 ‘진정한 의미의 3편’이라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터미네이터 3>(2003년)와 4편에 해당하는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2009년)은 인간과 기계의 전쟁이라는 설정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를 선보였다. 반면 <터미네이터 5>는 제임스 캐머런이 1편과 2편에서 구축한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받아 발전시켰다.

영화 의 T-800을 연기한 아놀드 슈워제네거.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터미네이터 5>가 아니라 <터미네이터 3>

때는 2029년, 지구는 ‘심판의 날’ 이후 기계들이 지배하는 곳으로 변모했다. 이에 맞서 존 코너(제이슨 클락)는 인간 저항군을 이끌고 끝내 기계군단 스카이넷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한다. 이 역사적인 순간, 존 코너는 자신을 심복처럼 따르는 카일 리스(제이 코트니)를 1984년으로 보낸다. 패배를 예상했던 스카이넷이 존 코너의 탄생을 막기 위해 터미네이터를 1984년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를 저지하려 1984년으로 간 카일 리스는 T-1000(이병헌)의 공격에 쫓기던 중 극적으로 존 코너의 엄마인 사라 코너(에밀리아 클라크)와 만난다. 그녀 곁에 있는 T-800(아놀드 슈워제네거)이 적인 줄 알고 놀라는 것도 잠시, 카일 리스는 사라 코너와 함께 2017년으로의 시간여행을 감행한다. 스카이넷과 동일한 의미를 가진 제니시스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어 지구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다.

<터미네이터 5>의 극 중 1984년은 <터미네이터>의 배경과 같다. 실제로 <터미네이터>에서 사라 코너를 저지하기 위해 미래에서 온 원조 터미네이터가 3명의 불한당에게서 옷을 뺏으려는 장면이 <터미네이터 5>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된다. 그 상황에서 선한 터미네이터인 T-800이 악한 터미네이터를 공격하고 그 와중에 사라 코너가 합세한다는 설정이 추가됐다. 그 시각, 카일 리스는 T-1000에 쫓기는 중이다.

어떻게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의 캐릭터들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 놓이는 상황이 가능하냐고? 만약 과거가 바뀌었다면? 그러니까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의 사건 이후 그보다 훨씬 과거로 돌아간 시점에서 스카이넷과 존 코너 진영 사이에 새로운 다툼이 있었다면 <터미네이터 5>는 1편과 2편의 캐릭터와 설정을 적절히 섞는 가운데 이에 대한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사라 코너와 T-800 사이의 좀 더 특별한 인연(?)을 공개한다.

그들이 처음 만난 건 1984년이 아닌 훨씬 그 이전이었다. 사라 코너가 소녀였던 시절, 스카이넷은 이미 터미네이터를 보내 그녀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알게 된 미래의 존 코너도 가만있지 않았다.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일찍이 T-800을 사라 코너 옆에 붙여두었다. 사라 코너는 T-800을 ‘팝스’라고 부르며 그를 따랐고 팝스는 그녀를 여전사로 키웠다. 그렇다면 <터미네이터>에서 순진하고 연약했던 여대생 사라 코너가 <터미네이터 5>의 1984년에서는 여전사가 된 이유, 그리고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의 시간대가 뒤섞인 이유가 무리 없이 설명된다.

이병헌은 사라 코너를 제거하려는 T-1000을 연기했다.

포기할 수 없는 오리지널의 힘 ‘인지도’

<터미네이터 5>가 복잡한 타임라인의 영화가 된 건 오로지 상업적인 이유에서다.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3편과 4편을 거치면서 과거의 영광을 잃었고 한물간 시리즈로 전락했다. 1편과 2편에서 제임스 캐머런은 당대의 혁신적인 CG(컴퓨터그래픽) 기술로 로봇 액션을 화려한 볼거리로 삼으면서도 인간과 기계의 공존에 대한 메시지를 영화 속에 담아내 묵직한 울림을 선사했다. 그에 반해 3편과 4편은 단순한 킬링타임용 영화로 액션에만 힘을 쏟으며 시리즈에 대한 팬들의 충성심을 급속도로 악화시켰다.

그런데도 제작사가 이 시리즈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터미네이터와 아놀드 슈워제네거로 대표되는 인지도 때문이다.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에 프랜차이즈 영화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다. 이미 관객들에게 인지도가 높게 형성돼 있는 상황에서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시나리오와 전편의 주인공 배우만 확보된다면 속편의 흥행은 떼놓은 당상이다.

시나리오에 대해서도 할리우드는 시리즈 중에서 평가가 가장 좋았던 작품의 설정을 고스란히 가져와 거기에 살을 붙여 흥미를 돋우는 방식을 터득했다. 전 세계적으로 기록적인 흥행을 이어가는 중인 <쥬라기 월드>가 대표적이다. 시리즈의 1편인 <쥬라기 공원>의 이야기 진행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대신 캐릭터를 교체하고 새로운 공룡을 대거 투입하자 근사한 영화로 재탄생됐다. 오리지널 팬에게는 전편의 향수를, 1편을 보지 못한 팬들에게는 전례 없던 볼거리를 선사하며 <쥬라기 월드>는 흥행에서만큼은 <쥬라기 공원>을 능가했다.

<쥬라기 월드>의 사례로 볼 때 <터미네이터 5>가 <터미네이터>와 <터미네이터 2>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실질적인 3편처럼 기능하도록 가져간 건 당연한 절차다. 다만 1편을 벤치마킹하고 연대기 구성을 따르는 <쥬라기 월드>와 다르게 1편과 2편의 시간대를 뒤섞어야 하는 <터미네이터 5>는 어느 정도 무리한 설정을 용인한다. 예컨대 타임라인이 복잡해지면서 코너 모자(母子)와 카일 리스의 관계는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족보가 이상해졌다. 스카이넷과 적대관계였던 존 코너가 악한 터미네이터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T-3000이 되어 사라와 카일 리스를 공격한다는 설정은 비약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미네이터 5>가 크게 흥행할 것이라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편과 2편이 개봉한 지도 각각 31년과 24년, 흰머리가 무성하고 주름살이 깊게 패도 올드팬들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터미네이터의 귀환이 반갑다. 이 시리즈가 생소한 젊은 관객은 <왕좌의 게임>의 대너리스 역으로 한창 인기몰이 중인 에밀리아 클라크가 여전사를 연기하는 것이 흥미롭다. 아시아 관객 입장에서는 이병헌이 T-1000으로 출연한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이것이 프랜차이즈 영화가 갖는 힘이자 할리우드가 왕년의 프랜차이즈를 속속 소환하는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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