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와 사람의 마음 생생히 살려내다
  • 조철│문화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7.15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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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다룬 장편소설 <발원> 펴낸 김선우 시인

 

“첫 시집을 낸 서른 살에 경주에 갔었다. 해인사, 운문사를 거쳐 동쪽을 향하다가 경주에 들어가 사흘을 머물렀다. 세상에 처음 나온 내 시집을 옆구리에 끼고 그냥 걸었다. 왕들의 무덤과 첨성대와 분황사와 수많은 불상이 있는 남산을 오가며 술과 차를 마셨고, 여러 겹의 지층으로부터 재잘거리며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아주 많은 목소리들이 땅 밑에 있어’라고 몇 줄의 시에 끄적거렸다.”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김선우 시인(46)은 1996년 한 문학 잡지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등단 후 3년여 세월이 흘러 시집 한 권을 엮은 그는 경주로 여행을 떠났다. 경주 유적지를 밤새 걷다가 새벽시장에서 해장국을 먹었다. 김 시인은 저잣거리라는 말을 그때 좋아하게 되었다.

“밤 경주의 기운이 오래전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을 깨워놓은 탓일까. 나와 세계의 시방(十方)을 묻고 또 물으며 걷는 사이, ‘저잣거리로 들어가 손을 드리운’ 누군가를 본 듯했다. 그 누군가들이 언젠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 민음사 제공

서라벌을 깨우며 다시 살려낸 원효

김 시인이 첫 시집을 내고 12년 후인 2012년 봄, 시와 산문을 써온 지는 오래됐으나 장편소설을 쓴 것은 두 권에 불과했던 그에게 ‘과분한 신문 지면’이 주어졌다. 조계종 화쟁위원회와 불교신문이 기획해 소설 연재를 부탁해온 것이다. 어떤 소재든 상관없으니 세상에 두루 힘이 되는 이야기를 써달라고 했다. 무엇을 쓸까.

“12년 전 경주에서 쓴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스스로를 일깨워 고통을 파하며 저잣거리로 들어가 손을 드리운 사람들. 원효! 그리고 요석! 다른 여지가 없었다. 그 지면에 쓰고 싶은 이야기는 이들뿐이었다. 드디어 만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천둥 치듯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해서 김 시인의 손끝에서 나온 소설이 <발원>이다. 부제로 ‘요석 그리고 원효’라 적었다. 요석이 앞서고 원효를 뒤에 세운 이유가 궁금해진다. 원효를 제대로 알려면 신라 여인 요석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뜻일까.

원효의 일대기는 후대의 필요에 따라 각색되거나 축소, 과장되었고 이 또한 그 수가 많지 않다. 때문에 원효의 삶은 독자들에게 피상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일찍이 춘원 이광수도 소설 <원효대사>를 펴냈는데, 원효대사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국민으로는 애국자요, 승려로는 높은 보살이다. 중생을 건진다는 보살의 대원은 나는 때, 죽는 때에도 잊거나 잃는 것이 아니니, 하물며 어느 때에랴. 보살의 하는 일은 모두 자비행이다. 중생을 위한 행이다. 혹은 국왕이 되고 혹은 거지가 되고 혹은 지옥에 나고 혹은 짐승으로 태어나더라도 모두 중생을 건지자는 원에서다. 그러므로 원효대사의 진면목은 그의 보살원과 보살행에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원효를 그릴 때에 그의 환경인 신라를 그렸다. 왜 그런가 하면 신라라는 나라가 곧 원효이기 때문이다. 크게 말하면 한 개인이 곧 인류 전체이지마는 적어도 그 나라를 떠나서는 한 개인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효는 사람이거니와 신라 나라 사람이었고, 중이거니와 신라 나라 중이었다. 신라의 역사에서 완전히 떼어낸 원효란 한 공상에 불과하다. 원효뿐 아니라 이 이야기에 나오는 요석 공주도 대안법사도 다 신라 사람이다. 그들은 신라의 신앙과 신라의 문화 속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여기 민족의 공동 운명성이 있는 것이다.”

김 시인의 손끝에서는 원효와 요석이 오랜 전쟁과 지배층의 수탈로 인해 도탄에 빠진 백성을 위하는 ‘부처의 마음’과 존재와 존재로서 서로를 사랑으로 구원하려는 ‘사람의 마음’을 함께 지닌 입체적 인물로 생생하게 살아난다. 선덕여왕과 김춘추, 의상 등 실존 인물과 작가에 의해 탄생한 여러 인물 또한 서라벌을 배경으로 작가의 문장에 걸음을 맞춘다.

요석 공주, 운명에 맞서는 당당한 여성으로 그려

김 시인은 시인 특유의 유려한 문장과 드라마틱한 이야기 전개로 역사 속 인물 원효를 독자 곁에 있는 인간 원효로 탈바꿈시킨다. 요석 공주 또한 주변부 인물이 아닌, 운명에 맞서는 당당한 여성으로 그려낸다.

인물뿐만 아니라 공간 또한 <발원>의 세계관 안에서 다시 탄탄한 생명력을 얻는다. 황룡사와 분황사, 첨성대와 같은 실제 배경뿐만 아니라, 아미타림 등 상상적 공간까지도 원효와 요석의 궤적에 의해 신라인의 숨결이 묻어 있는 왕경, 즉 서라벌로 다시 구성되고 일어선다.

<발원>을 통해 살아난 원효와 요석 그리고 서라벌은 끝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진짜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백성의 고통은 정녕 멈출 수 있는가. 진실된 사랑을 이룰 수 있는가. 원효는 서로 대립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상호 의존하는 세계로, 한 몸처럼 세상과 만나는 세계로 돌아오길 촉구한다. 우리는 부처이자 곧 중생이고, 타인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기도 하며, 당신의 사랑은 즉 나의 사랑이다.”

소설 끝에 붙인 강신주 철학자의 작품 해제가 눈길을 끈다. 자신도 원효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발원>을 읽고서 소설 쓰기를 포기할 생각을 하게 됐다고 털어놓았다.

“왕이나 귀족이 주인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주인이 되는 불국토를 꿈꾸었던 원효, 사랑과 자비는 자신이 가진 가장 소중한 걸 내어주어야 한다는 걸 알았던 원효. 김선우 작가는 너무나 근사하게 매력적인 드라마를 만든 것이다. 어느 육두품 출신 영민했던 소년이 어떻게 우리가 알던 바로 그 어여쁜 원효가 되어가는지, 요석이 원효에게 어떤 인연의 여인네였는지, 진정한 자비는 국가와는 무관하게 중생들 마음 하나하나를 보듬어주어야 하는 것 아닌지, 때로는 손에 땀을 쥐게, 때로는 안타까움에 탄식하게, 때로는 섹시한 떨림을 주며, 때로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정말로 근사하게 <발원>은 우리 마음에 수많은 색깔의 파문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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