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사’ 지하 시장이 분주하다
  • 안성모 기자 (asm@sisapress.com)
  • 승인 2015.07.29 11:4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힘써줄 ‘라인’ 찾기 골몰 모 그룹사 정권 실세 접촉설도

‘광복절 특사’. 영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용어다. 실제 부부로 인연을 맺게 된 설경구·송윤아 커플과 ‘차줌마’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차승원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영화다. 2002년에 개봉했으니 지금으로부터 13년이나 지난 작품이다. 국내 영화계에 코믹 돌풍을 몰고 온 김상진 감독 사단이 야심 차게 내놓은 영화이기도 하다. 310만명의 관객을 모아 흥행에 성공했다.

최근 정·재계를 중심으로 광복절 특사(특별사면)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7월13일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국가 발전과 국민 대통합을 이루기 위해 사면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밝힌 게 계기가 됐다. ‘국가 발전’이나 ‘국민 통합’은 유력 인사들의 특사 때마다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박 대통령은 “광복 70주년 사면에 대해서 필요한 범위와 대상을 검토해주길 바란다”고 관련 수석비서관에게 지시했다.

주연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흥행 성적이 달라지는 영화와 달리 현실에서는 등장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단역 배우의 역할이 중요할 때가 있다. 특사를 둘러싼 ‘밀당’(밀고 당기기)이 한창인 요즘이 그렇다. 재벌 총수와 유력 정치인 등 사면 받기를 희망하는 ‘주연’보다도 이들 이름을 ‘명단’에 올리기 위해 암약하는 ‘단역’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눈에 띄지 않게 물밑에서 움직이는 이들의 활약 정도에 따라 2015년 광복절 특사의 흥행 여부가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시사저널 이종현

실무는 법무부, 명단은 민정에서

사면은 국민 누구나 법을 위반할 수 있고 이를 재단하는 사법기관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제도다. 죄를 용서하고 벌을 받지 않게 하는 길을 열어둔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의회가 방금 제정한 헌법에 기초해 최우선적으로 정부조직법을 만든 다음 제2호 법률로 제정한 게 바로 사면법이다. 이는 사면에 정치권은 물론 국민 다수의 관심과 이해가 얽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사면은 두 종류로 나뉜다. 범죄의 종류를 지정하는 일반사면과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특별사면이다. 일반사면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반면, 특별사면은 국무회의에서 의결만 거치면 된다. 국회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특별사면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특사도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법무부장관이 9명으로 구성된 사면심사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해 의결된 특사 명단을 대통령에게 올리도록 돼 있다. 그런데 사면심사위원회 자체가 법무부장관 소속으로 위원장도 법무부장관이 맡고 있다. 심사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법무부가 실무를 담당하지만 실제 핵심 역할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맡는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근무했던 한 인사는 “특사 대상으로 누구를 넣고 누구를 뺄지 여부는 법무부가 아닌 청와대에서 결정한다고 보면 된다”며 “민정수석실에서 명단을 작성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후 법무부로 보내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사면심사위원회의 의결 등 공식 절차를 밟게 된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7월16일 청와대를 방문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등 여당 지도부와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근혜 대통령, 김무성 대표, 원유철 원내대표, 김정훈 정책위의장. ⓒ 연합뉴스

정권 실세들 ‘경제인 특사’ 군불 지펴

민정수석실에서 특사 명단을 작성하기에 앞서 ‘의견 수렴’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일반 민생사범의 경우 특정 기준을 제시하면 된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처음 이뤄진 2014년 1월29일 설 특사는 ‘서민 생계형 범죄’를 대상으로 했다. 경제인은 물론 여야 정치인이나 공직자 출신도 대상에서 제외됐다. 총 5925명의 형사범에게 특사가 이뤄졌는데 교통사범이나 과실범, 단순 차용사기 등 소규모 재산범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반면 재벌 총수나 유력 정치인을 대상으로 할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나 ‘사회 통합에 기여할 기회’와 같이 기준 자체가 애매모호하면서 거창하다. 이번에 박 대통령의 ‘사면 발언’이 주목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발전’ ‘통합’ 등 유력 인사를 대상으로 한 특사를 실시할 때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광복절 특사의 범위와 대상을 어느 선에 맞추고 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으로 여겨지고 있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특사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왔다. 대선 공약부터 그랬다. 대기업 지배주주·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한 사면권 행사 제한이 그것이다. 당선인 시절이던 2013년 1월28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설 특사 계획을 두고 ‘특사가 강행되면 이는 국민이 부여한 대통령 권한 남용이며 국민 뜻을 거스르는 것’ ‘국민 정서에 반하는 비리 사범과 부정부패에 대한 특사 감행에 우려’ 등 반대 입장을 담은 대변인 논평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기류 변화가 감지됐다. 박 대통령은 올해 1월12일 가진 신년 기자회견에서 “기업인이라고 해서 특혜를 받는 것도 안 되겠지만 기업인이라고 역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특사와 관련해 “국민의 법 감정, 형평성 이런 것을 종합적으로 감안해 법무부가 판단하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즈음 정치권에서는 ‘경제 살리기’를 앞세워 대기업 총수들의 가석방과 사면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여당 지도부와 친박계 의원들에 이어 야당 중진들까지 가세했다.

여권에서는 박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입장을 바꾼 건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해 설 특사가 단행된 이후부터 경제인 사면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고 차츰 긍정적인 방향으로 분위기가 조성돼갔다는 것이다. 다만 주변 환경이 발목을 잡았다고 한다. 여권 정보에 밝은 한 인사는 “물밑 움직임이 활발해지려고 할 때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 관련 얘기가 쏙 들어갔다. 연말쯤 다시 분위기가 무르익으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조현아 땅콩 회항’이 터져 말도 못 꺼내는 상황이 돼버렸다”고 설명했다.

정부 핵심 인사들도 경제인 특사를 위해 군불을 지펴왔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법무부장관 시절이던 지난해 9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잘못한 기업인도 국민 여론이 형성된다면 다시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밝혔다. 부당한 이익의 사회 환원, 일자리 창출과 경제 살리기 노력 등을 전제로 한 발언이지만 특사 담당 부처 수장의 입장 표명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친박(친박근혜) 좌장’ 역할을 하고 있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도 거들고 나섰다. 최 부총리는 “기업인이라고 원칙에 어긋나게 엄하게 법 집행을 하는 것은 경제 살리기라는 관점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밝혔다. ‘경제 살리기’는 기업인 특사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최 부총리는 “주요 기업인들이 구속 상태에 있으면 투자 결정에 지장을 받는다”며 황 총리의 입장에 공감을 표시했다.

 

‘표정 관리’ 기업들 ‘물밑 작업’ 분주?

광복절 특사와 관련해 재계에서는 환영의 뜻과 함께 ‘경제인 사면’에 대해 강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박 대통령의 ‘사면 발언’이 있었던 7월13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30대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경제가 어려운 만큼 국가 경제에 기여를 했고 투자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분에게 기회를 줄 필요성이 있다’고 말씀드렸다”고 밝혔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회장은 7월22일 제주포럼 기자간담회에서 특정 기업 총수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박 회장의 바람처럼 광복절 특사 대상으로 최태원 SK 회장과 김승연 한화 회장이 우선 거론되고 있다. 최 회장의 동생인 최재원 SK 수석 부회장과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등도 이름이 오르내린다. 횡령으로 징역 4년과 징역 3년 6개월을 각각 선고받은 최 회장 형제는 형량의 약 60%를 복역했다. 사기로 징역 4년을 선고받은 구 전 부회장은 형량의 약 70%를 감옥에서 보냈다. 배임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김승연 회장은 철창신세는 면했지만 경영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다고 한다. 배임 혐의로 기소돼 6년형을 선고받고 2년 6개월째 수감 중인 최원영 전 예음그룹 회장도 사면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기업들은 ‘표정 관리’에 들어간 모습이다. 사면되길 바라는 마음이야 간절하지만 드러내놓고 좋아할 수는 없는 처지다. 여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법이다. 오너의 사면이 거론되고 있는 한 대기업 임원은 “지금은 조용히 있는 게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물밑 작업’은 다르다. 다른 대기업의 한 임원은 “일단 진정서부터 작성해 국회와 청와대에 넣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민정수석실의 ‘의견 수렴’ 통로는 다양하다. 경제인의 경우 전경련이나 대한상의와 같은 경제단체에서 각 기업체의 요청을 정리해 전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관 업무를 맡고 있는 한 대기업 간부는 “경제단체에서 기업으로부터 의견을 취합한다. 이를 통으로 넘기면 청와대에서 검토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번 사면도 경제단체에서 먼저 얘기를 꺼낸 것”이라고 전했다.

‘윗선’ 만나도록 ‘라인’ 뚫어줘

그러면 공식 경로만 존재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때로는 ‘공식’보다 ‘비공식’이 더 힘을 얻는 게 ‘특사 시장’의 특징 중 하나다. 사면을 둘러싼 이른바 ‘지하 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연보다 조연, 조연보다 단역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진정서 하나 딸랑 던져놓고 오매불망 기다린다고 될 일이 아니다. 사면이라는 게 가만있는데 제 발로 걸어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권 출신의 한 재계 인사는 “몇몇 기업에서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다”며 “국회든 청와대든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유력 인사들과 만날 약속부터 잡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사면을 바라는 기업 입장에서는 전력투구를 할 수밖에 없다. 정 맞을 만큼 모나게 보이지만 않으면 된다.

결국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해줄 ‘라인’을 잡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를 움직여야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벌써부터 한 대기업이 현 정권의 실세로 통하는 인사에게 줄을 댔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한동안 뜸하던 친박 원로들의 이름도 다시 흘러나온다.

특사를 바라는 기업 측에 ‘라인’을 뚫어주는 ‘전문가’도 있다. 윗선과 만날 수 있도록 중간에서 연결을 해준다고 한다. 물론 대가가 따른다. 거액의 돈이 될 수도 있고, 기업으로부터 일을 받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특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로비 행각은 예전부터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그 실체가 완전히 드러난 적은 없다. 그만큼 은밀히 진행된다는 것이다. 특사와 관련해 도움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는 여권의 한 인사는 “기업에서야 확실하다면 돈을 얼마든 못 주겠나. 하지만 까딱 잘못하다가는 바로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믿을 만한 관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인 사면은 ‘기대 반 걱정 반’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특사 검토를 공식화하자 정치인 중 누가 사면을 받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선 이명박 정부 때의 인사들이 대거 포함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측근인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이다. 친박계에서는 홍사덕 민화협 의장의 이름이 거론된다. 야당에서는 노무현 정부 인사인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와 정봉주 전 의원 등이 포함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특사 때 야당 요청을 일부 수용하는 것은 관례다. 이를 두고 여론의 뭇매와 야당의 반발을 피해가는 일종의 ‘물 타기’라는 비판도 제기돼왔다.

‘광복절 특사호’ 승차를 둘러싼 신경전도 벌어진다. 아무래도 ‘몫’이 적은 야당이 더 치열하다는 지적이다. 7월22일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회의 때 유승희 의원과 이용득 의원이 날 선 공방을 펼쳤다. 정봉주 전 의원을 ‘1호 사면’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유 의원의 주장에 이 의원이 반박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여야 정치권의 바람과 달리 ‘정치인 사면’이 이뤄질지는 아직까지 불확실하다. 여권의 한 인사는 “경제인은 포함돼도 정치인은 포함되지 않을 것 같다”고 예상했다.

한편 사면법 개정과 관련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2004년 박 대통령이 당 대표이던 한나라당은 대통령이 특별사면 등을 행할 때 국회의 ‘의견’을 구하도록 하는 사면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주도했다.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고건 총리가 거부권을 행사해 법안은 폐지됐다. 지금도 대통령 친인척이나 선거사범, 반인도적 범죄자, 부패사범 등에 대해서는 특사를 제한하는 등 대통령의 사면권을 투명하고 민주적으로 행사하도록 하는 내용의 개정안 10여 개가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