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된 통일
  • 김인숙 | 소설가 (.)
  • 승인 2015.09.0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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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 머무르는 동안 동·서독 분단에 대해 공부를 하는 특별한 여행 기회를 가졌다.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역시 분단 국경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시였다. 독일 북부 니더작센 주의 동쪽 도시인 헬름슈테트는 분단 시절 동서를 연결하는 가장 큰 물류기지가 있던 곳이다. 통일이 된 후 이 도시에는 분단 박물관이 세워졌고, 국경의 흔적은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어 역사적 사료가 되었다. 철조망과 콘크리트 장벽 등으로 이뤄진 국경 바로 옆에는 100m 거리도 두지 않은 채 마을이 있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민통선 마을쯤 되겠다.

이 마을에서 벌어진 일들은 우리나라의 남과 북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해충이라 불리며 국경마을에서 소개되는 이념적 의심분자들의 이야기, 크리스마스면 서쪽 사람들이 국경 가까이까지 와서 캐럴을 부르고 기도회를 개최했다는 이야기, 그에 호응하기 위해 동쪽 사람들이 창문마다 촛불을 켰고, 그걸 막기 위해 동독 정부에서는 확성기 방송을 틀어댔다는 등등. 이 모든 이야기가 다 들어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분단 유적지 탐방과 더불어 동독 지역의 정부 관계자와 행정 관계자들로부터 통일 후 동독 지역의 변화에 관한 강연을 들을 수 있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준비되지 않은 통일’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았다. 독일 통일은 너무나 갑자기, 난데없이 이루어졌다. 서독에서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동독에서는, 동독 사람들 입장에서는 통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통일이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무엇이 좋아지는지, 무엇이 나빠지는지, 그 구체적인 것들을 알게 된 것은 통일 후 그들이 실제로 겪어야 했던 경험들을 통해서였다.

여행 도중에 대화를 나누었던 서독 출신의 할아버지는 “통일이 되어서 좋아졌느냐”는 필자의 가벼운 질문에 “아직도 통일은 진행 중”이라는 진지한 대답을 했다. 세대가 바뀌어 분단의 기억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될 때, 통일은 그때 완성될 것이라고도 했다.

여행 기간 내내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국의 통일이 빨리 오기를 바란다는 인사를 했다. 의례적인 인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통일이 빨리 오기를 바랄 뿐만 아니라, 그날을 위해 한국이 열심히 준비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전쟁과 분단을 실감하지 않은 세대에게 통일은 두렵고 혼란스러운 일일 뿐만 아니라 막대한 손해를 끼치는 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 준비가 필요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통일은 남북 긴장이 고조될 때 생각하고, 완화될 때 잊어버릴 일이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 통일이 정치적·경제적, 혹은 군사적인 문제를 넘어서 희망적인 일, 혹은 희망적이어야만 할 일, 좀 더 나은 전망을 제시하는 일, 그래야만 할 일로 인식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다양한 문화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겠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가 더는 낡고 오래된 노래로 인식되지 않도록 말이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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