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 뒤 숨은 정치 노림수
  • 정락인│객원기자 (.)
  • 승인 2015.09.09 15:52
  • 호수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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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 수교 조건으로 문화재 반환 거론될 듯 조선불교도연맹, 일본 법정 참석 검토

우리 민족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난도 많이 겪었다.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때는 민족문화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렸다. 구한말에는 미국·프랑스 등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수많은 문화재가 불타거나 약탈당했다.

지금까지 해외로 약탈되거나 유출된 문화재는 확인된 것만 해도 16만342점에 이른다. 이 중 전체의 42.2%인 6만7708점이일본으로 갔다. 이어 미국 4만4365점, 독일 1만940점, 중국 9806점 등의 순이다. 이것은 표면적인 수치에 불과하다. 실제 일본에 약탈된 문화재는 수십만~수백만 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제대로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일본 도쿄 오쿠라 슈코칸 뒤뜰에 방치돼 있는 평양 율리사지 석탑(왼쪽)과 이천 오층석탑(오른쪽). 아래는 일본의 약탈 문화재 반환을 촉구하는 남북 공동성명서. ⓒ 정락인 제공
ⓒ 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근대 일본 경제계의 최고 거물이었던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년)는 대표적인 우리 문화재 약탈자로 꼽힌다. 그는 일제 강점기를 전후해 한국에 진출한 후 토목·광업·은행 등을 통해 돈을 벌었으며, 엄청난 양의 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렸다.

그 문화재가 얼마나 많았던지 1918년 5월에 일본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을 세웠다. 이곳에 있는 문화재는 ‘오쿠라 컬렉션’으로 불린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과거 경복궁 자선당 건물을 옮겨다 ‘조선관’으로 삼았다가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화재로 소실시킨 전력이 있다.

도쿄 오쿠라 호텔 정문 앞에 있는 ‘오쿠라 슈코칸’ 뒤뜰에는 남한과 북한의 석탑이 10m 정도 사이를 두고 서 있는데,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지 8각5층 석탑’이다. 오쿠라는 이 석탑을 오쿠라 슈코칸의 장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불법 반출했다. 이 두 석탑은 각 시대의 특징을 띠고 있어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하지만 제대로 관리를 받지 못해 곳곳이 훼손된 채 방치돼왔다. 석탑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화강암에 치명적인 시멘트로 탑의 구멍을 채우기까지 했다. 우리에게는 국보급 문화재지만 일본에선 재벌이 운영하는 사립미술관의 장식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2008년부터 남북 공동으로 반환 추진

‘평양 율리사지 석탑’은 원래 평안남도 대동군 율리사지에 있었던 고려 중기의 석탑이다. 높이 8.7m, 탑의 기단부는 불상의 연화대좌와 같은 형식으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국보급 문화재다. 지금은 ‘율리사지’가 있던 곳이 논으로 변해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북한 측의 설명이다.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2008년 8월 평양을 방문해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조불련)과 율리사지 석탑 반환 운동을 공동 추진키로 합의했다. 조불련은 북한 내의 불교 관련 사업을 총괄하는 부서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결성됐다. 불교와 관련된 재산권, 사찰 관리, 불교 문화재 보존 등 모든 업무를 담당한다. 지난 2006년에는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있던 북관대첩비를 원산지인 함경도 길주로 반환할 당시 일본 야스쿠니 신사와 교섭하는 역할을 맡았다.

8월29일 남한의 문화재제자리찾기와 북한의 조불련이 개성에서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 문제를 협의하고 있다. ⓒ 문화재제자리찾기 제공

조불련은 지난 1월13일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에 일체의 법률적 권리를 위임·대리할 수 있는 위임장을 줬다. 그리고 5월13일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은 일본의 오쿠라 슈코칸 측에 평양 석탑의 원산국 반환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오쿠라 측이 반환 거부 의사를 밝혔고,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은 2월25일 도쿄 간이재판소에 동산인도신청을 제기했다. 이로써 평양 석탑을 찾기 위한 법정 소송이 시작됐다. 7월22일 제1차 조정에서 오쿠라 측은 “우리가 율리사지 석탑을 취득한 것은 100년 전이고, 조불련은 1945년 이후 성립되었으므로 반환 요청을 기각해달라”고 진술했다. 사실상 자진 반환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제2차 조정은 오는 9월17일 도쿄 간이재판소에서 비공개로 열린다. 이날 조불련 측도 일본 법정에 참석해 평양 석탑의 반환을 공식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19일 문화재제자리찾기 측과 조불련은 개성 시내의 민속여관에서 만났고, 조불련 측은 2차 조정 기일에 참석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차금철 조불련 서기장은 “일본이 강제로 약탈한 문화재를 돌려준다, 안 준다 할 자격이 없다. 당연히 반환해야 하고, 여기에 충분한 배상까지 해야 한다”며 “우리 민족문화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를 맡고 있는 혜문 스님은 “조불련의 일본 법원 출석은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 문제를 진전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환영 의사를 밝혔다.

이에 따라 2차 조정 기일에는 북측의 신청인 자격으로 조불련이 직접 일본 법원에 출석해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의 당위성에 대해 진술할 것으로 보인다. 조불련의 입국이 허가되면 약 15년 만에 북한 당국 관계자가 일본 땅을 공식적으로 밟는 것이 된다. 일본 정부로서는 조불련의 입국을 불허할 명분이 없다. 자국 법원에 조정 기일을 잡아놓고 신청인인 조불련의 입국을 불허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치·외교적인 부담도 떠안아야 한다.

이번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 뒤에는 복잡 미묘한 정치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겉으로는 일본이 약탈해간 문화재를 찾아오는 것 같지만 그 뒤에는 북한과 일본의 보이지 않는 정치·외교적 역학관계가 있다.

일본 정부는 오쿠라 슈코칸이 민간인이라고 해서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처지가 아니다. 자칫 북·일 수교 협상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어서다. 지금 일본은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뿐만 아니라 수교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를 위해 공식·비공식 물밑 접촉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도 북·일 수교에 적극 나서는 모양새다. 그만큼 양국이 서로 관계 개선과 정식 수교를 원하고 있다. 중국과 관계가 틀어진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를 통해 경제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고, 일본은 북한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본으로서 북한과의 수교는 중국과 러시아로 가는 직항로가 생기고, 북한의 막대한 지하자원 개발에도 참여할 수 있어 ‘실’보다는 ‘득’이 훨씬 많다. 지난 4월 일본을 방문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북·일 수교 협상에 조건부 양해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수교의 최대 걸림돌인 납치자 문제와 핵 개발 등이 원만하게 합의되면 북·일 수교가 급진전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향후 북·일 수교 과정에서 북한은 ‘문화재 환수 문제’를 직접 거론할 태세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지난해 10월 ‘민족문화유산 보호는 애국 사업이다’는 ‘로작’을 발표하면서 문화재 반환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향후 북·일 수교 과정에서 북한이 문화재 반환에 대해 적극 나설 것을 예감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지난 2002년 북한과 일본 정부는 ‘조일 수교를 위한 평양 선언’을 발표하면서 ‘문화재 문제에 대해 성실히 협의’하기로 원칙을 표명한 바 있다. 혜문 스님이 “북·일 수교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평양 율리사지 석탑이 거론된다면 일본 외무성으로서도 곤란한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북한과 일본의 정치적 역학관계로 작용

북한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남한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이 빤하다. 당시 우리는 일본에서 1432점의 문화재를 반환받았지만 수준 이하의 것이 너무 많아 한심할 정도였다. 북한은 이런 전철을 밟지 않고 비슷한 수준이나 그 이상의 문화재 반환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로서는 평양 율리사지 석탑이 북·일 수교 협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오쿠라 측이 원만한 협의를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되도록 직간접적인 압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오쿠라 측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챙기는 방향으로 해결할 것으로 점쳐진다. 사실 오쿠라 측은 평양 석탑의 소유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지 않다. 오쿠라 슈코칸 뒤뜰에 방치해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남한이나 북한과 거래를 통해 석탑을 넘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불련 측은 거래를 통해 석탑을 찾아오는 것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8월29일 개성 회담에서 차금철 조불련 서기장은 “우리 것을 약탈해간 죄를 지은 것들이 성실하게 반성하고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에 따른 배상도 해야 한다”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일본 정부로서는 북·일 수교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평양 율리사지 석탑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해야 할 처지다. 지금 일본 정부와 오쿠라 측은 평양 석탑을 놓고 어떤 카드를 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평양 석탑과 동시 반환 추진 ‘이천 오층석탑’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는 평양 율리사지 석탑과 함께 이천 오층석탑의 반환도 동시 추진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이 석탑은 이천향교 근방에 있다고 해서 ‘이천향교방오층석탑’으로 불렸지만 일본인들이 명명한 이름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석탑이 위치했던 산기슭의 이름을 빌려 ‘망현산 오층석탑’으로 불렀다가 다시 공식 명칭을 ‘이천 오층석탑’으로 결정했다.

고려 초기의 석탑 양식을 띤 높이 6.48m 규모로, 보존 상태가 좋아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석탑은 원래 경기도 이천시 양정여중 인근에 있었다. 하지만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 공진회’(박람회)에 전시됐다가, 1918년 토목·건축 사업을 하던 오쿠라 기하치로가 일본으로 빼돌렸다. 이천 지역 시민·문화단체는 2008년 8월16일 ‘이천오층석탑되찾기 범시민운동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석탑 환수 운동에 나섰다.

하지만 오쿠라 슈코칸 측은 “석탑이 도쿄에 있어도 일본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논리로 환수에 반대하고 있다. 이천 오층석탑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당시 석탑의 일부가 파손됐다. 같은 해 5월 문화재제자리찾기 등이 오쿠라 호텔을 방문해보니 석탑의 일부가 손상돼 보수하고 있었다. 현재는 평양 율리사지 석탑과 함께 해체된 상태에서 보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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