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재산 논란에 휩싸인 ‘국민관광지’
  • 조유빈·조해수 기자 (you@sisapress.com)
  • 승인 2015.09.21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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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시와 경기도 가평군 사이에 위치한 남이섬. 조선 세조 때 요절한 남이 장군의 묘가 있어 남이섬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곳은 본래 불모지였다. 한적한 이 섬의 풍경을 한 편의 드라마가 바꿔놓았다.

2002년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조용하던 이곳은 방문객들로 북적대기 시작했다. 한류 열풍이 불어오던 당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걸었던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국내 및 일본·중국 등 해외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13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 해 남이섬을 다녀간 총 관광객의 수는 300만명에 육박한다. 일명 ‘나미나라 공화국’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특히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한국의 ‘소국(小國)’으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관광객이 강원 춘천시의 대표 관광지인 남이섬을 오가는 배를 타기 위해 줄지어 서 있다. © 연합뉴스

친일 재산 의심돼도 현행법상 조사 어려워

그러나 이곳이 친일파 후손 소유의 재산이라는 사실을 아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남이섬은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들이 가장 많은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곳이다. 과거에도 간헐적으로 이런 논란이 제기됐고, 관계자들의 의혹 제기와 함께 민씨 일가 소유 사실이 일부 확인되기도 했다. 하지만 친일 재산이 맞는지 아닌지 그 진위는 가려내지 못한 채 유야무야됐다. 

그러던 것이 최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 ‘남이섬 친일 재산 논란’이 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국민관광지로 명성을 높인 남이섬의 유명세와 더불어 아베 정부의 우경화에 따른 반일 감정 악화가 SNS라는 여론 확산 장치의 등을 타고 논란을 확산시킨 것이다. 한 네티즌은 “얼마 전 벼르고 벼르다가 다녀온 여행지가 남이섬”이라며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절대 가지 않겠다. 자꾸 거론돼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한다”는 글을 게재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기분이다. 지자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관광지인 줄 알았다”며 “입장료 등으로 남이섬에서 쓰는 돈이 친일파에게 가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민영휘는 명성황후의 조카였으며, 일제에 조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10년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조선 최고의 갑부였다. 귀족 출신 중 유일하게 대자본가로 변신해 성공한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꼽힌다. 상업은행의 전신인 천일은행과 H 학교(현재의 H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민영휘는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들어 있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힌다. 그러나 이런 친일 행각에도 불구하고 민영휘의 자손들은 현재까지도 남이섬을 비롯한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민영휘의 자손들은 대부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는데, 현지에서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한국에서는 노른자위 땅인 서울 삼성동 일부 부동산을 비롯해 H 고등학교, P 여고 등 학교도 소유하고 있다. 현재 증손 민인기씨는 H 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고, 고손인 민경현씨도 P 여고 이사장으로 있다.

남이섬은 민영휘의 손자 민병도씨가 1965년 매입해 경춘관광개발주식회사를 설립하면서 법인화됐다. 매입 당시 대표이사는 민병도씨였다. 민씨는 제일은행장,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한 인물이다. 1994년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웅기씨가 회사 명의를 ‘주식회사 남이섬’으로 변경하면서 대표이사를 이어 맡았다. 2001년부터 전문경영인으로 알려진 강우현씨가 대표를 맡아 남이섬을 개발하고 운영했지만, 실제로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대주주들은 민씨 일가다. 

본지가 입수한 감사보고서를 보면, 48%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민씨 일가는 강씨의 지분과 합쳐 약 55%를 확보하고 있는 상태다. 강씨는 대표이사직을 2014년 사임했고, 현재는 전명준씨가 대표이사로 있다. 민웅기씨가 사내이사, 민영휘의 증손인 민광기씨가 감사로 있다.

2010년 7월1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회의실에서 김창국 위원장(맨 오른쪽)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전원위원회가 열렸다. © 연합뉴스

남이섬 한 해 매출 300억원, 순익 80억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재산조사위)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하면서 친일 재산들을 분류했지만, 친일파의 후손이 물려받은 재산으로 매입한 후 소유권을 넘기거나 법인으로 등록 신청을 할 경우에는 환수가 불가능했다. 또 특별법에 따라 국권 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 시점인 1904년 2월10일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 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를 받은 재산에 한했다.

당시 친일재산조사위 사무국장으로 일했던 장완익 변호사는 “남이섬의 경우 1945년 이전에 매입한 재산이 아니기 때문에 친일 재산으로 분류하기 어려웠다”며 “친일 재산의 경우 ‘대가성’이 인정돼야 하는데, 민영휘가 일제 때 쌓은 재산으로 그 후손이 남이섬을 매입한 것이라는 심증은 충분했지만, 이를 증명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 이균식 연구원은 “친일 재산 혐의가 있으면 조사 개시 결정을 한다. 조사 후 판정을 하는데, 법인으로 등록이 돼 있었기 때문에 조사 개시 결정도 되지 않았다”며 “남이섬은 당시 제일 먼저 조사에 착수한 재산이었다. 그러나 당시 법으로서는 친일 재산으로 분류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친일 재산 환수와 관련한 법이 너무 좁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도 제기된다. 광복 직후에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는 형사법을 적용해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다. 재산권 침해와 연좌제 등 위헌 논란 때문에 몰수까지는 불가능하겠지만 반민족행위자 재산에 좀 더 광범위한 해석이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지난 2013년 11월, 친일재산조사위가 친일 행위의 대가로 보기 어렵다며 환수 대상에 포함하지 않은 민영은 후손의 땅(12필지)을 오히려 법원에서는 친일 재산으로 보고 국고 귀속을 결정한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2013년 8월,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인물’로 한정한 재산 귀속 대상을 ‘친일 행위의 정도와 관계없이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인물’로 대폭 확대한 특별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아울러 특별법이 소급입법 및 연좌제를 금지한 헌법에 어긋난다며 제기한 헌법 소원 사건에서도 역시 “친일 재산 보유를 보장하는 것 자체가 정의 관념에 위배된다”고 판결한 바 있다.

현재 남이섬은 관광 수입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남이섬의 매출액은 300억원에 이르고, 순이익 역시 80억원을 넘어섰다. 이를 바탕으로 남이섬은 제주시 한림읍에 제주남이섬주식회사를 분할 설립해 2014년 5월 등기를 마쳤고, ‘제2남이섬’인 ‘탐나라공화국’을 추진하고 있다. 남이섬을 관광지로 개발했던 강우현씨가 제주남이섬주식회사의 대표이사로 있고, 민영휘의 증손 민광기씨가 감사로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 절반 이상 생활고 

광복 이후 부적절한 역사의 청산은 지금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친일파로 알려진 이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며 재산을 축적하고, 각계각층에서 친일 논란이 벌어지면서 사회적 혼란도 이어지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종전(終戰)과 동시에 반대 세력의 방해 요인을 차단하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고, 나치 재산의 환수도 신속하게 진행했다. 그 이후로도 유대인 몰수 재산을 환수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벌이고 있다. 그와 비교해 우리나라의 경우 친일 잔재 청산이 사실상 이뤄지지 않았다. 국가로 귀속된 친일 재산을 후손들이 소송을 통해 되찾아가는 웃지 못할 사건도 비일비재하다.

친일재산조사위는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활동하면서 친일파 507명 중 168명의 토지를 환수하는 결정을 내렸다. 면적으로는 1300만㎡에 이른다. 그러나 재산 환수 결정이 내려진 후 친일파 후손들은 저항했다. 특히 민영휘의 후손 등 25명은 집단으로 소송을 냈고, 소송 당시 “민영휘는 친일파가 아니라 독립운동가였다”며 “H 의숙을 설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자작 작위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견제와 감시를 받지 않고 후원했다”고 소장에 적기도 했다. 

환수된 토지 중 200만㎡의 토지가 친일파 후손들의 토지 반환 소송으로 그들의 품에 되돌아갔다. 제3자에게 매매하거나 이민을 가는 등 민영휘와 비슷한 이유로 친일재산조사위의 조사대상이 되지 않은 친일파도 339명에 이른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던 45년 동안 수많은 애국지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혹자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써달라며 헌납하기도 했다. 그러나 친일파의 후손들이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동안,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4대에 걸쳐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친일귀속재산 활용 방안 연구’라는 정책보고서에 따르면, 친일조사위가 활동하던 2009년 당시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경제 활동 수준을 묻는 설문 조사에서 42.0%에 이르는 후손들이 ‘생활하기 어렵다’라는 응답을 내놓았다. 6년 후인 지금, 올해 8월 한 매체에서 독립운동가와 후손들 모임인 광복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생활 실태를 조사한 결과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월 개인 소득 200만원 미만이 75.2%를 차지했고, 그 이하 소득이 25.5%로 나타났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명문 학원을 설립해 이사장으로 추앙받고 있을 때, 독립운동가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그 후손들의 교육으로까지 연결됐다. 고졸 이하의 학력을 보인 후손들의 수는 66%에 이르렀다.

 

“대다수 후손들 변명하거나 부정하기에 급급”
장완익 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사무국장 인터뷰

2006년, 친일반민족 행위로 모은 재산을 국가에 귀속하기 위해 정부 조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설립됐다. 2010년까지 4년간 활동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168명을 조사해 여의도 면적의 1.3배인 1113만9645㎡를 국고로 환수했다. 액수로는 공시지가 959억원, 시가 2106억원에 이른다.

당시 사무국장을 역임했던 장완익 변호사는 “(반민족행위자) 후손들 중 친일 행위를 부끄러워하거나 반성하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선대의) 반민족행위 자체를 부정하며 역사를 은폐·왜곡하려고 했다”며 아쉬워했다.

위원회 활동 당시 가장 어려웠던 점은?
해당 재산에 대한 친일 행위의 대가성 여부를 입증하는 것이 어려웠다.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이후부터 1945년 8월 광복 전까지 친일파가 치부한 재산은 반민족행위자 재산으로 ‘추정’만 할 수 있다. 광복 직후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는 형사법을 적용해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지만, 친일재산조사위원회에서는 재산권 침해, 연좌제 등 위헌 논란이 뒤따랐다.

남이섬은 어땠나?
재산 취득 자체가 광복 이후였고, 취득자도 본인(민영휘)이 아닌 후손이었다. 민영휘가 반민족행위로 쌓은 재산으로 남이섬을 매입한 것이겠지만, 심증일 뿐 확증이 없었다. 우리나라 법상 그것까지 추적할 방법이 없다. 광복 이후 제3자 명의로 취득한 재산 역시 손쓸 방법이 없었다.

활동 당시 가장 아쉬웠던 점은?
반성하는 후손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활동 당시에는 후손들 중 자진해서 국가에 재산을 내놓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대다수의 후손들은 변명하기에 급급했고, 오히려 반민족행위 자체를 부정하기도 했다. 이미 그들은 (반민족행위로 쌓은 부를 이용해) 명망가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세력을 형성해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했다. 오히려 독립운동 유공자들을 핍박하기도 하고. 선대의 잘못을 후대가 책임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기미는 보여야 한다.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선생이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2000년대 접어들어 사회주의 계열이나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도 서훈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북한과 연계된 분들에 대한 제한이 많다. 광복 이후의 정치적 상황까지 연계시켜서 서훈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미성숙했다는 증거다. 친일파들은 후손들이 인정을 안 하고, 독립운동가들은 국가가 인정을 하지 않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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