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과의 대화] 손 묶인 채 발가벗겨진 장롱 속 시신
  • 배상훈 |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프로파일러) (.)
  • 승인 2015.09.22 10:05
  • 호수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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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흉포해지는 ‘이별 범죄’…연인 사이 폭력에 경찰 적극 개입해야

지난 9월6일 오후 2시30분쯤 서울 송파구의 한 주택 장롱 속에서 유명 영어강사 A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A씨는 발견 당시 양손 앞쪽이 플라스틱 타이로 묶여 있었다. 눈에서는 ‘일혈점’이 발견됐는데, 누군가 목을 졸랐을 때 나타나는 법의학적 증거다. 살인 사건이 분명해 보였다. 이른바 ‘송파 장롱 살인 사건’이다. 범인은 쉽게 잡혔다. 주변 CCTV를 분석한 결과, 범행이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에 남자친구 K씨가 A씨의 집에 드나든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용의자는 사흘 후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의 주택가 인근 공원에서 체포됐다.

K씨가 범행을 부인하고 묵비권을 행사해 정확한 살해 동기를 알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가족은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연인 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사건은 전형적인 ‘이별 범죄’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범인이 피해자를 앞으로 결박했다는 점, 옷을 모두 벗겼다는 점, 별도의 둔기(절구 공이)를 준비했다는 점 등에서 추정이 가능하다. 여성 한 명을 제압하는데 굳이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미리 준비한 둔기로 기습적으로 내려쳤다면 둘 사이가 가까운 관계라고 짐작할 수 있다.

ⓒ 일러스트 오상민

둘 사이에 상하 관계가 어떠했는지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평소 범인 남성은 돈을 많이 버는 피해자 여성에게 심리적으로 위축돼 범접하기 어려운 거리감을 느꼈을 것이다. 피해자 여성의 옷을 모두 벗겼다는 점은 범인이 말하듯 옷에 피가 많이 묻어 씻어내려고 했던 것만은 아닐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굳이 속옷까지 벗겨야 할 이유는 없다. 손을 묶고 발가벗긴 다음 자신의 힘을 과시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범인은 목을 조르고 살인을 저지르게 됐다.

장롱 속에 시체를 넣었는데 손이 튀어나와 어쩔 수 없이 케이블 타이로 묶었다는 주장도 논리적으로나 정황상으로나 맞지 않다. 이 사건을 우발적인 살인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상황은 이랬을 것이다. 평소 범인은 도박 자금 등을 마련하기 위해 피해자로부터 많은 돈을 뜯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자 피해자가 이 사실을 알게 돼 범인을 멀리하게 됐다. 그런 피해자에게 돈도 뜯어내고 복수도 하고 싶었던 범인은 피해자를 묶어놓고 돈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피해자가 거칠게 반항하자 결국 목 졸라 살해한 후 시신을 장롱 속에 숨겨놓고 도망친 것이다.

연인 사이 폭력 단계적으로 상승

근래 들어 이런 종류의 이별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방법도 더 잔혹해지고 지능화되고 있다. 8월14일에도 여자친구의 외도를 의심해 흉기로 상해를 입힌 60대 남성이 검거됐다. 8월11일에는 한 30대 남성이 역시 여자친구의 외도를 의심해 목을 졸랐다가 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더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8월26일 한 40대 남성이 이별을 요구한 내연녀 얼굴에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인 염산을 뿌리기도 했다. 또 지난 5월에는 이별을 통보한 애인을 목 졸라 살해한 후 야산에 시신을 암매장한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연인 사이의 폭력과 살인 등 강력범죄의 증가 추세는 통계 수치상에서도 드러난다. 시민단체 ‘한국 여성의 전화’에 따르면, 지난 한 해에만 114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 등에게 살해당했고, 살인미수도 95건으로 집계됐다. 거의 1.7일마다 한 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에게 살해당하거나 살해당할 위험에 처한 셈이다. 이는 빙산의 일각일지도 모른다. ‘한국 여성의 전화’ 상담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사건을 포함하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 수는 실제 통계 수치보다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경찰 통계에서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이 가능하다. 올해 초부터 6월까지 경찰에 검거된 관련 피의자는 수천 명에 달한다. 이 중에서 살인 또는 살인미수 혐의로 35명, 강간 또는 강제추행 혐의로 129명이 검거됐다. 이외에도 폭행·상해·협박·감금 등 연인에 대한 폭력행위로 검거된 피의자는 거의 3000명에 이른다. 이 또한 사법기관에 의해 검거된 경우로, 실제 발생 건수는 이보다 몇 배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전에도 ‘아이리스 이은미 사건’ ‘김홍일 사건’ 등을 거치면서 이별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잠시 반짝하다가 곧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범죄는 계속됐다. 때로는 데이트 폭력으로, 때로는 데이트 강간으로, 때로는 치정 범죄 등으로 불리면서 근본적인 대안 없이 이별 범죄는 폭증하고 있다. 연인 사이의 사랑싸움에 타인이 개입할 필요가 있느냐는 그릇된 인식 탓도 크다. 연인 사이의 감정 교류는 당연히 사적 영역이다. 하지만 아무리 연인 사이의 감정이라도 일정 정도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둘 사이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신뢰가 무너졌을 때 자칫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의 단계적 상승’ 현상도 유념해야 한다. 첫 단계에서는 농담과 같은 비난 정도의 말장난으로 시작하지만, 그다음 단계에서는 심한 폭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밀치거나 손찌검 정도로 올라섰다가 약한 수준의 폭력에 이어 심한 폭행으로 상승한다. 그다음에는 매우 심각한 폭력으로 인해 상대가 다치거나 치료를 요하는 단계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고문에 준하거나 살인에 가까운 폭력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여기에는 이른바 ‘감각의 역치(?値)’ 현상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 처음에 폭언을 하거나 집착에 가까운 말을 했을 때, 피해자가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사랑하니까 그럴 수 있지’ 정도로 지나치면, 그다음 단계에서는 문제제기를 했을 때 지난번 용인한 것을 예로 들며 폭언이나 집착행위에 대한 용납을 강요한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도 용납할 경우 폭언이나 집착행위는 둘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가 돼버린다. 한쪽은 가해자이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기울어진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형성된 관계라면 다음 단계에서는 폭언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폭언보다 더 높은 폭력 수단이 동원될 것이고 그러한 관계가 또다시 일상적인 일이 되고 만다. 어느 순간 가해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스스로는 피해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피해자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각한 폭력을 당하면서도 가해자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상황에 이르는 것이다.

결국 폭력에 중독돼 외부의 개입 없이는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데이트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공적인 개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의 가족이 개입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 많은 사례에서 보듯 가해자를 더욱 자극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현실적으로는 경찰이 연인 사이의 폭력이나 그에 준하는 폭력적 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고, 사법부도 좀 더 전향적인 판결을 통해 범죄 억지력을 발휘해야 한다.

여자친구를 죽이고 시신을 장롱 속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는 K씨가 9월11일 법원의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송파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결혼할 사이라도 폭력 용인해서는 안 돼

이번 송파 장롱 살인 사건의 경우에도 집착을 사랑으로 잘못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보통의 연인들은 집착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필자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을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 전 한 탤런트가 방송 토크쇼에 나와 자신이 벌인 약탈혼(상대를 납치해 결혼하는 것)을 무용담인 양 늘어놓았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풍조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설령 결혼할 사이라고 해도 폭력을 용인하거나 눈감아줘서는 안 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조금 황당한 ‘엠바고(Embargo)’를 경험했다. 필자가 출연한 방송에서 경찰청의 요청이니 남자친구의 범행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달라는 것이었다. 첫 검안에서 일혈점과 둔기에 의한 타격이 관찰됐는데도 경찰에서는 관련 정보를 차단했다. 나체 상태로 양손이 앞으로 케이블 타이에 묶인 채 장롱 속에서 발견됐다는 정도의 리포트만 들었을 뿐이었다. 물론 지나친 취재 경쟁으로 인해 범인 검거에 곤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도 최소한 공식적인 브리핑 정도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우려가 얼마 후 서울시 성동구 빌라 지하주차장의 ‘트렁크 속 시신 사건’에서도 현실로 나타났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경찰의 공식적인 브리핑은 없었다. 종편에 출연한 일부 경찰 출신 패널들이 개인적인 연줄을 동원해 정보를 캤고, 그 정보를 통해 ‘특정한 여성의 신체 부위가 훼손된 시신’이라는 방송 멘트가 여과 없이 나갔다. 결국 사건의 본질에서 벗어난 치정 살인 사건으로 수사선이 형성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치정과는 무관한 전과 22범에 의한 강도 살인 사건이었다. 경찰이든 언론이든 서로 정도를 지키며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수사가 진행된다면, 최소한 잘못된 정보로 인해 국민이 혼란을 겪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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