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하인 취급하는지 살펴보라”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5.09.22 10:25
  • 호수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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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주인으로 사는 법’ 전하는 이주향 교수

 

 

‘책 읽어주는 철학자’ 이주향 수원대 교수(53)는 대한민국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움츠려 있는 동안 다시 한번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 이 교수는 최근 <나를 만나는 시간>이라는 철학 에세이집을 펴내면서 “우리네 인생은 분명히 예정된 파멸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는 인생도 어리석지만, 종말만을 염두에 두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쉽게 자포자기하는 인생도 보기 싫다”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충고했다.

왜 다들 자신과 만나는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을까. 누구를 기다리고 타인의 눈치를 보고 누구의 삶을 대신 살 듯 해왔고 타인에 기대려 애썼기 때문이다. 끝없는 자기계발로 성공을 거머쥐려 했던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명문대 졸업장과 더 넓은 집과 더 큰 차를 가지면 행복해질 것이라 믿고, 그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던 시대를 살아왔다. 그 결과, 사회는 초고속 성장을 이뤘지만 개인과 사회 모두 여러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 사우출판사 제공

이 교수는 지금이야말로 인문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다. 남과 비교하고, 소비하고, 파괴하고, 건설하고, 경쟁하고, 과시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조용히 멈춰 서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인문학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자기 짐이 아닌 것을 성실하게 지고 가는 낙타 같은 인간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나를 만나는 시간’이 찾아오면 사자로 변한다고 했다. 사자 같은 사람은 나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내가 아닌 것의 삶을 살지 않고, 그런 삶을 강요하는 것에 대항해서 싸운다. 엄청난 저항의 에너지를 가진 존재지만, 그 삶은 굉장히 긴장돼 있기도 하다. 중요한 건 사자가 어린아이로 변하는 과정이다. 니체는 어린아이가 최초의 긍정이라고 했는데, 운명을 긍정한다는 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다. 예를 들면 슬플 땐 슬픔과 놀고 기쁠 땐 기쁨과 노는 거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에 빠지지 않고 파도타기 하듯이 타고 넘는 거다. 그게 긍정이다.”

‘낙타’처럼 사는 사람에게 필요한 지혜

이 교수는 한 사람의 필요를 ‘얼마만큼 성과를 낼 수 있는가’라는 기준으로 평가하는 세상에 대해 지적하기도 한다. 그런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생 아니냐는 것이다. 자신의 존엄성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면, 지금의 사회는 봉건사회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봉건사회에서는 주인을 잘 만나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서 심리적인 부담 없이 살아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대 사회는 먹고사는 문제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러면서 계약을 빌미로 사람을 쥐어짠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자신과 만나는 시간이다. 현대인들은 자신을 하인 취급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는 끝까지 하인 대우밖에 받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사람답게 경영하려는 노력, 그리고 스스로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관대해진 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은 나 자신”

이 교수는 인간관계에서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예로 들어 엉킨 실타래를 풀 묘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 교수는 그 영화를 보면 서투르기만 했던 사랑의 흔적을 찾게 된다면서 “위험하지 않은 모험이 없듯 어리석은 줄 모르는 사랑은 없다”고 말한다. 늘 관계 속에서 가슴앓이를 하는 건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라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만날수록 얽히기만 할 때는 ‘대범’을 가장하고 만나는 것보다는 그릇이 작음을 인정하고 도망가는 게 좋다.”

이 교수는 자신을 만나는 시간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템플스테이 경험을 통해 들려준다. 템플스테이에서 이 교수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밥 먹는 시간이었다. “먹을 만큼만 담기, 침묵 속에서 오로지 씹는 감각만 관찰하기! 밥과 멀건 국, 김치와 나물 두어 가지, 생각해보면 초라한 밥상이었으나 한번도 초라하게 느낀 적이 없었던 것은 그것이 바로 공양(供養)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밥 먹는 일을 모셔 올리는 공양이라 하는 데 놀랐으나, 놀라고 나니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밥을 먹는 일은 내 영혼을 공양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동안 나는 밥을 먹고 있을 때조차 밥을 먹지 못했다. 칼로리를 먹고, 정보를 먹고, 사교를 먹었다. 밥과 나 사이에 너무 많은 것이 가로막고 있어, 공양을 받아 공양을 함으로써 일상을 공양하는 마음을 잃었던 것이다. 밥을 받는 태도가 바뀌니 생활이 바뀌었다.”

이 교수는 이 책에서 부모님을 만나는 시간에도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왜 어머니의 아들 혹은 아버지의 딸로 태어났을까. 나는 생각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머니·아버지를 한 인간으로서, 여인으로서, 남자로서 이해하는 거라고. 부모는 참 희한하다. 아무것도 가르치려 들지 않아도 죽어서도 스승이니까.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면 내 안에 내재돼 있는 꿈이 일어나 춤을 춘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사는 나 자신과의 교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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