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 있는 현재 권력’ 유지 위한 안간힘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5.10.07 17:56
  • 호수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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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의 ‘안심번호제’ 좌초시키려 드는 靑ㆍ친박의 총선 전략 노림수

“지금까지는 알게 모르게 싫은 티를 내는 정도였다면, 이번에는 싫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보낸 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끝내자’며 절교를 선언하는 것 아니겠느냐.”  수도권 출신의 한 새누리당 중진 의원은 여야 대표가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도입에 대해 잠정 합의를 이룬 뒤 청와대와 ‘친박계’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향해 총공세를 퍼붓는 상황을 이렇게 비유했다. 그는 “절교 선언까지 가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인데, 지금 하는 걸 보면 그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김 대표가 대권 욕심에 거짓말을 한 거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두고 청와대와 친박계가 김 대표를 몰아붙이는 모습은 상당히 조직적이고 민첩하다. 보기에 따라선 3개월 전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찍어내던’ 것과도 흡사하다. 정치적 부담을 무릅쓴 채 청와대가 직격탄을 날리며 긴장을 고조시키면 새누리당 내 친박계가 일사불란하게 홍위병 역할을 하는 프로세스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에 대한 친박 측과 비박 측 다툼이 계속된 9월30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의원총회에 김무성 대표, 원유철 원내대표, 조원진 원내수석 등이 참석해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정치권에선 이번 논란의 중심에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다. 실제 청와대는 지난 9월30일 공천 문제를 논의할 새누리당 의원총회 직전 ‘5대 불가론’을 내세워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진압하려 했다. 박 대통령이 유엔총회에 참석했다가 새벽에 귀국한 날인데, 오전 8시20분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이 “정치권 논의 사항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장이 180도 바뀐 셈이었다. 박심(朴心)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온 이유다.

사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둘러싼 논란은 새누리당 내부의 ‘공천 룰’ 문제여서 청와대가 직접 개입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청와대 측은 “정치 개혁 관련 주제인 만큼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정치권 안팎에선 내년 총선 공천권 확보를 염두에 둔 행보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와대와 친박계는 김 대표가 오픈프라이머리 무산 직후 바로 안심번호제를 들고나온 의도 자체가 불순하다고 보고 있다. 오픈프라이머리와 마찬가지로 안심번호제 역시 현역 의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공천 방식이란 점에서 김 대표가 새누리당 의원들의 줄서기를 유도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전략통으로 꼽히는 한 친박계 의원의 설명이다. “‘박근혜 키즈’ 초선 의원 상당수가 김 대표 쪽으로 몰려간 건 오픈프라이머리 때문이었다. 재선이 쉬워질 테니까. 그런데 이건 김 대표가 혹세무민한 거다. 전략 공천으로 대폭 물갈이를 해야 총선과 대선을 기대해볼 수 있는 야당이 동의할 가능성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반평생을 정치판에서 부대껴온 김 대표가 몰랐을까. 알면서도 대권 욕심에 거짓말을 한 거지. 그래놓고 지금은 안심번호제가 마치 오픈프라이머리와 비슷한 것처럼 또 의원들을 호도하고 있다.”

물론 청와대나 친박계 입장에서는 공천 룰 싸움이 정국의 화두로 떠오를 경우 노동 개혁이나 경제 살리기 등 국정과제들이 힘을 받지 못할 가능성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의원들이 자신의 생사가 걸려 있는 공천 문제와 박 대통령의 업적이 될 개혁 과제 중 어디에 더 신경을 쓰겠느냐”며 “대통령 임기가 절반 가까이 남은 시점에 ‘소는 누가 키우나’ 하는 무기력한 상황이 돼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 컸다”고 말했다.

결국 청와대와 친박계가 김 대표를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나선 데는 집권 후반기에도 국정 운영의 동력을 유지하면서 임기 막판까지 ‘힘 있는 현재 권력’으로 남겠다는 박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신보수’를 기치로 박 대통령과 맞서면서 세력화할 기미가 보이자 무리수를 써가면서까지 ‘유승민 축출’에 나섰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전략 공천 통한 공천 지분 확보가 관건

물론 청와대와 친박계가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대목은 전략 공천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핵심 측근들로서는 임기 후반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 못지않게 박 대통령의 퇴임 이후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박 대통령으로부터 공천을 받은 19대 의원들 다수가 그동안 수차례 당내 경선에서 ‘비박계’ 편에 섰던 뼈아픈 경험을 한 터라, 끝까지 배신하지 않을 검증된 인사들에게 의원 배지를 달아줘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큰 셈이다.

특히 대구를 비롯한 영남 지역의 공천에는 퇴임 이후 박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이 달려 있다. 청와대와 친박계가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오픈프라이머리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해온 건 이 때문이다. 최근 박 대통령이 여권의 심장부인 대구를 방문하면서 현역 의원들을 한 사람도 대동하지 않은 이후 ‘대구·경북(TK) 물갈이설’이 회자된 데도 여권 핵심부의 의중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오픈프라이머리 당론이 폐기된 상황에서 김 대표가 안심번호제를 내밀며 “전략 공천은 절대 없다”고 못 박자 청와대와 친박계는 이를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친박계 좌장 격인 서청원 최고위원은 “‘열심히 했는데 야당이 반대해서 안 됐다’며 오픈프라이머리 무산을 선언한 뒤 당내 의견을 모아 제3의 방법을 강구하는 게 상식”이라며 “갑자기 여론조사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방안에 불과한 안심번호제를 들고 와서 100% 여론조사 공천을 하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청와대와 친박계의 이 같은 반발 기류에는 김무성 대표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한마디로 그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보는 것이다. 김 대표가 여권의 차기 대권 주자 지지도에서 줄곧 수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친박계는 지난해 말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반기문 대망론’을 앞세워 어깃장을 놓고 있다. 김 대표의 대권 가도에 치명타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마약 사위’ 건을 두고 음모론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 대표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청와대·친박계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전략 공천을 통해 일정한 공천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포스트 박근혜’를 준비하는 것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안심번호제에 대한 청와대와 친박계의 조직적인 반발을 “전략 공천 배제를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얘기”라고 단언했다.

이와 관련해 친박계는 사실상 전략 공천 지분 확보를 위한 수순 밟기에 돌입했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도입에 제동을 걸면서 공천 룰을 마련할 특별 논의 기구 신설 주장을 관철시킨 것이다. 친박계 핵심으로 꼽히는 한 영남권 재선 의원은 “지금대로라면 특별 기구에서 합의안이 나오는 건 불가능할 테고 결국은 현재의 당헌·당규대로 공천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략 공천 문제는 이미 가닥이 잡혔다는 자신감이 묻어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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