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 미술관을 탐하다
  • 김회권 기자 (khg@sisapress.com)
  • 승인 2015.10.07 18:35
  • 호수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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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 내건 미술관 설립 붐…“평가 이뤄지지 않은 작가 이름 붙이는 건 성급하다” 지적도

한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영겁의 시간보다 더 무거운 듯, 생각에 잠겨 있다. 그의 발끝은 오래된 나무의 뿌리가 땅을 부여잡듯 벼랑을 움켜쥐고 있다. 이 조각상은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이 만들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로댕은 근대 조각사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로댕에게도 굴욕(?)적인 일이 있었다. 자신의 집인 비롱 저택과 작품들을 국가에 내놓겠으니 대신 로댕 미술관을 건립해달라고 프랑스 정부에 요청했는데 이 제안이 단칼에 거부당한 것이다. 이미 세계적 거장으로 추앙받던 그가 퇴짜를 맞은 이유는 이랬다. “당신의 작품 세계를 평가하고 검증하는 작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계적 거장이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을 하나 얻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명성과 무관하게 작가에 대한 평가가 마무리되지 않으면 자신의 이름을 내걸지 못하는 탓이다. 로댕에 비하면 한국 작가들의 사정은 매우 좋은 편이다.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 건립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서다. 앞으로 만들어질 예정인 공립미술관에도 작가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이 속속 들어선다. 지역 출신의 유명 작가를 기리는 곳도 있고, 비록 지역 출신은 아니더라도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기증받아 문을 열기를 원하는 곳도 있다.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작가의 전시관은 원래 대구에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백지화됐고, 이후 부산시립미술관에 둥지를 트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 연합뉴스

작가-지자체의 이해관계 합치 산물

익명을 요구한 한 미술평론가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인이 미술관을 운영하기 위해선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그러다 보니 관(官)에서 나서주기를 원한다. 지자체 입장에서는 지역에 문화적 인프라를 입히는 데 격조 높은 업적이 될 수 있는 게 바로 미술관이다. 자연스럽게 자치단체장과 작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미술관이 추진되고 만들어진다.

그러다 보니 공공의 심미적 자원이 돼야 할 미술관이 오히려 갈등의 소지가 된다. 경북 안동에서는 지역 예술인들이 오히려 미술관 건립을 막기 위해 ‘안동시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안동미술협회 대책위원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2018년 건립될 ‘안동시립 하종현미술관’을 반대하는 모임이다. 미술관이 없는 안동에서는 2년 전부터 시립미술관에 대한 건립 논의가 시작됐는데, 지난해 10월 갑자기 하종현 작가의 이름이 등장했다. 하 작가와 안동시가 양해각서를 체결했는데, 하 작가가 300점의 작품을 기증하는 대신 안동시는 안동댐 인근 5000㎡의 부지에 100억원을 투입해 미술관을 짓는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시립미술관의 명칭에는 ‘하종현’이 포함됐다.

안동 지역 미술인들은 어리둥절했다. 하 작가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대 교수와 서울시립미술관장을 지내며 주로 수도권에서 활동했다. 현재 작업실도 경기도 일산에 있다. 안동과 전혀 연고가 없는 작가에게 작품 300점을 받았다고 개인 이름을 시립미술관에 붙일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공론화 과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술관을 건립하려면 미술관 건립추진위원회가 먼저 마련되고 미술관의 내용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작가의 그림은 어떻게 소장할 것인지 등 제반 사항에 대해 논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건물보다는 그 안을 채울 내용이 더욱 중요하다. 하 작가가 안동시장을 찾아와 300점 기증의 뜻을 밝히고 미술관 건립을 해달라고 했고 그 자리에서 받아들였다는 것, 추진위원회가 없는데 MOU(양해각서)가 체결된 것 등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권기현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예산을 들여 만드는 시립미술관에 굳이 작가 개인의 이름을 넣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경북 경주에서도 나왔다. 8월21일 개관한 경주시립 솔거미술관은 원래대로라면 ‘박대성미술관’이 돼야 했다. 박대성 작가는 독학으로 한국화를 배워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인물이다. 1999년부터 경주 남산에 작업실을 차려 작업을 해왔으니 지역 연고도 꽤 있는 셈이다. 그런 그가 2008년 작품 670점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경주에서는 ‘박대성미술관’ 건립이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하지만 이내 지역 예술인들은 시립미술관에 특정인의 이름을 붙이는 것에 반발했다. 결국 오랜 논의 끝에 통일신라시대 화가인 ‘솔거’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그러자 박 작가가 반발했다. ‘박대성미술관’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하며 작품 기증을 거부했다. 지난해 11월 준공된 이 미술관은 작품을 전혀 설치하지 못한 채 개관을 미루다 박 작가가 마음을 돌려 작품을 기증했고, 결국 올해 8월에야 문을 열 수 있었다. 행정 미숙이 자칫하면 ‘무늬만 미술관’을 낳을 뻔했다.

지자체에서 예산을 들여 만든 미술관에 작가들의 이름을 붙이려는 건 그들의 명성을 이용해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막연한 바람에 근거한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은 지자체의 용역보고서에 자주 등장하는 사례다. 매년 100만명이 찾는 구겐하임 미술관처럼 문화관광산업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미술관 난립에 한몫하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롤 모델 삼는 지자체

하지만 로댕이 당했던 좌절처럼 우리네 현실은 작가와 미술관을 치열하게 검토하고 따져보지 않는다. 미술 전문가들은 역사적 평가가 이뤄지지 않은 개인의 이름을 공공 미술관에 붙이는 것은 성급한 결정이라고 말한다. 미술관은 항구적이고 공공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은 “미술관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미술 작품을 수집·보존하는 자료관이며 시민들의 예술적 소양과 심미안, 창의성을 길러주는 평생학교다. 작가 미술관 건립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미술사에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 전시·연구·교육·소장·보존할 만한 예술적 가치가 높은지 등에 대한 검증 과정이다”고 밝혔다.

일단 짓다 보니 운영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 없는 경우도 생긴다. 국내에서보다 프랑스에서 더 유명한 이성자 화백은 고향인 경남 진주에 작품 375점을 기증했고, 그를 기리는 ‘이성자미술관’이 7월16일 문을 열었다. 혁신도시 건설로 늘어난 문화 수요를 충족하고 예향의 도시로 발돋움하겠다는 진주시의 뜻은 시작부터 삐거덕거렸다. 유족들로 구성된 이성자기념사업회 측이 작품 반환을 요구하겠다며 반발해서다. 관장과 학예연구사(큐레이터) 없이 졸속 개장한 점, 공원관리사무소로 쓰려던 건물을 개조하면서 생긴 구조적 문제 등 운영 미숙을 유족들은 문제 삼았고,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다.

앞으로도 전국 곳곳에는 작가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미술관이 필요한 작가와 미술관을 만들려는 지자체의 이해관계 결합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관계가 작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대구에서 추진하다 중지된 ‘이우환과 친구들 미술관’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가의 경력에도 흠집을 냈다.

김범일 전 대구시장이 강한 의지를 갖고 일본에 거주하는 이 작가를 직접 찾아가 설득한 끝에 추진된 미술관 사업은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미술관의 설계를 맡는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부각됐다. 하지만 이 작가가 대구와 연고가 없다는 점, 작품 구입료가 수백억 원이 넘는다는 점 등이 알려지자 여론은 냉각됐고, 새로 선출된 권영진 시장의 원점 재검토 발언 후 없던 일이 돼버렸다. 백지화가 된 뒤 이 작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왜 이렇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시와 일해야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며 섭섭해했다.

‘이우환 브랜드’를 이용하려던 대구의 실패를 이어받아 잘 활용한 쪽은 부산이었다. 해운대 벡스코(BEXCO) 맞은편 부산시립미술관 한쪽에 들어선 건물은 이제 ‘이우환 공간’으로 불린다. 올해 4월 문을 연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약 5개월 동안 2만5000여 명에 달했다. 부산의 ‘이우환 공간’이 순조롭게 출발하자 최근 대구에서는 “대구시의 정책적인 판단이 잘못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미술관을 바라보는 시선이 오락가락한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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