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단비 격인 ‘교과서 전쟁’
  • 김현│뉴스1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5.10.14 16:30
  • 호수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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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위기 맞던 김무성·문재인 대표 ‘한국사 교과서’ 논란으로 당 내홍 잠재워

‘계파 싸움’이 ‘여야 싸움’으로 일순간 확 바뀌었다.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등 공천 룰 문제로 시끄럽던 정치권에 ‘교과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지금 여의도는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국정교과서 추진 논란과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 이사장의 이념 편향적 발언 논란으로 촉발된 ‘역사관 논쟁’의 소용돌이에 급속히 빨려 들어가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가 한국사 교과서의 발행 체제를 기존 검정에서 국정으로 변경키로 가닥을 잡으면서 여당은 총력 지원을, 야당은 결사 저지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역사관 논쟁’은 사실상 보수와 진보 간 이념 싸움인 데다 양측 모두 내년 총선을 앞둔 전초전으로 인식하고 있어 한 치의 물러섬 없는 공방이 예상된다.

친박과 비박, 친노와 비노, 모처럼 한목소리

새누리당은 지금의 검·인정 체계로 인한 청소년들의 ‘좌편향 역사관’을 바로잡아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해야 한다며 정부의 국정교과서 추진을 강하게 뒷받침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은 정부·여당의 국정교과서 추진은 친일·독재 미화 시도이자,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헌법을 부정하는 ‘역사쿠데타’라며 이를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를 위해 여권은 야권의 아킬레스건인 ‘종북’을, 야권은 여권의 약점인 ‘친일·독재’라는 프레임을 상대방에 덧씌우는 데 주력하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10월8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역사교과서 문제를 집중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10월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처럼 여야가 한국사 교과서를 고리로 한 ‘이념 전쟁’에 불을 댕기는 데엔 여러 가지 정치적 포석이 깔려 있다는 관측이 대체적이다. 우선 여야의 이번 이념논쟁은 결국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자신들의 지지층을 결집시키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철근 동국대 사회과학대 교수는 10월8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국정교과서는 북한과의 연계성을 염두에 두고 새누리당이 드라이브를 거는 것으로, 이념 논쟁을 통해 보수층의 결집을 유도하려는 의도”라며 “이에 맞서 새정치연합도 흩어져 있는 진보 지지층을 한데 모으는 계기로 만들기 위해 ‘결사 항전’에 나서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병헌 새정치연합 최고위원도 이날 한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여당의 국정교과서 드라이브에 대해 “총선을 앞두고 (국정화 문제를) 이념 논쟁으로 끌고 가 새누리당 지지층을 강화·단결시키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한국사 교과서 논쟁이 오히려 정체성 이슈에 민감한 야권 지지층을 결집시켜주고 있는 게 아니냐”라고 분석했다.

실제 이 같은 지지층 결집 양상은 여론조사 수치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 기관인 ‘리얼미터’가 지난 10월2일 19세 이상 500명을 대상으로 유무선 전화 설문조사를 실시해 8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검정제 유지(43.1%)와 국정제 전환(42.8%)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하지만 새누리당 지지층에서는 국정 전환을 찬성하는 의견이 66.5%, 새정치연합 지지층에서는 검정제 유지가 69.5%로 갈리는 등 보수와 진보의 팽팽한 대립구도가 확연히 드러났다.

아울러 지금의 여야 ‘이념 논쟁’이 공천 룰을 둘러싼 각 당 내홍에 쏠리던 관심을 외부로 돌릴 수 있는 좋은 소재라는 점에서, 내치(內治)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여야 지도부의 돌파구로 작용하고 있다는 해석도 적지 않다.

실제로 공천 룰을 놓고 파행 위기까지 치닫던 새누리당은 10월8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당내 ‘친박계’와 ‘비박계’ 모두 국정교과서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문재인 대표의 거취 문제와 선출직 공직자평가위원장 인선을 놓고 갈등을 벌여왔던 새정치연합도 국정교과서 문제가 불거지자, 대여(對與) 전선에 힘을 모으기 위해 잠시 휴전한 상태다.

보수와 진보 진영 결집 도구로 활용

특히 이번 ‘교과서 전쟁’은 리더십 위기에 내몰렸던 김무성·문재인 대표의 지도력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 대표는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파동에 이어 사위 마약 사건, 안심번호 국민공천제 도입까지 박근혜 대통령을 필두로 한 친박계와의 헤게모니 다툼에서 밀리는 분위기였던 데다 당내 비박계조차 모호한 김 대표의 행보에 대해 마뜩하지 않아 하면서 리더십에 위기를 맞았었다. 대권 주자로서의 입지마저도 휘청거렸다. 그러나 한국사 교과서 논쟁이 본격화되자 연일 “우리나라 학생들이 왜 김일성 주체사상을 배워야 하느냐”라며 선봉에서 대야(對野) 공세를 주도하는 등 리더십 회복을 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선 김 대표가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계기로 당·정·청 공조를 과시하고, 최근 공천 룰을 둘러싼 여권의 내홍 상황을 돌파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또한 자신을 ‘보수·안보의 아이콘’으로 부각시키면서 차기 대권 주자로서의 입지도 공고히 하려는 행보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박 대통령은 지난 2005년 당시 야당(한나라당) 대표로서 사학법 장외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이며 보수 진영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됐다”며 “김 대표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끝까지 관철시켜낸다면 보수 진영의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문 대표도 올해 국정감사 종료를 앞두고 자신의 거취 문제가 또다시 제기되던 상황에서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의 ‘공산주의자’ 발언 파문과 한국사 교과서 논쟁이 터지자 “독재적 발상을 그만두라”며 적극적인 대여 공세를 이끌고 위기 돌파의 계기로 삼고 있다. 문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국정교과서 문제에 대해 “우리로선 그야말로 강력한 저지 투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경론을 주도하고 있다. 이 때문인지 문 대표에 대한 공세에 앞장서왔던 박지원 전 원내대표도 최근 의원총회 등을 통해 “우리는 한번 네이밍 당하면 이게 계속 따라붙는다. 어떻게 해서 문 대표가 공산주의자냐. 그러면 우리도 전부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이라고 문 대표를 엄호하는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새정치연합의 한 당직자는 “문 대표가 교과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아가 ‘종북 프레임’마저 벗어나게 된다면 당 대표로서, 또 대권 주자로서 입지를 더욱 탄탄히 다질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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