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와 여인'은 왜 ‘미인도’가 되었을까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 승인 2015.11.02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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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화백의 선종으로 영원한 수수께끼 된 ‘위작 논란’
1991년 위작 논란의 중심에 섰던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는 작가의 사후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 연합뉴스

마치 남도 육자배기의 떠는 목처럼 한 서린, 하지만 강렬한 화면으로 일세를 풍미한 화가 데레사 천경자(1923~2015년)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떠났다고 전해왔다. 그림 잘 그리고, 글 잘 쓰고, 옷 잘 입고, 잘 놀던 화가 천경자의 선종(善終)은 우리에게는 커다란 아픔이자 손실이다. 일제의 잔재라고 폄훼하던 전통 채색화의 맥을 살려 현대적이면서도 화려한 화풍을 완성한 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우수와 슬픔이 가득 담겨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화가다. 자신이 경험했던, 힘들었던 사랑의 흔적이 그림에 투영되었을까. 밝고 강하지만 동시에 우울하고 우수가 깃든 화풍은 천경자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하지만 시대를 풍미하던 천경자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이른바 ‘미인도 사건’이 그것이다.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은 아마도 아픈 사랑일 것이다. 천경자는 일본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 길에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을 때 도쿄 역에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네준 유학생 이철식과 1944년 결혼을 했다. 1945년 첫 딸을 낳은 뒤 1946년부터 전남여고에서 교사로 생활했다. 그러다 이혼하고 전남신보 사회부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 김남중을 만났다. 1950년 여동생마저 폐병으로 잃고 남편 없이 맏딸 이혜선과 장남 이남훈을 기르던 천경자는 김남중에게 빠졌지만 그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그와의 사이에 차녀 김정희와 차남 고(故) 김종우를 얻었지만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김남중과도 결별하고 말았다.

미인도 사건은 1991년에 발생했다. 사건이 터지면서 절필(絶筆)을 선언하고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가 절필을 선언한 것은 화랑에 그림을 내놓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도리어 그는 미국의 딸집에 머무르며 카리브해, 아프리카 등지로 스케치여행을 다니며 더욱더 열심히 그림에 자신을 던졌다.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 후 1998년 9월 미국으로 떠났고, 지난 8월 그렇게 영면에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재규 전 중정부장 압류물로 존재 드러나

1995년 서울 반포의 자택에서 웃고 있는 천경자 화백. ⓒ 연합뉴스

미인도 사건은 천경자에게는 시련이었지만 그를 더욱 강하게 그림으로 내몰았다. 절필이란 사실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것에 불과했다. 그에게 두 번째 시련이 된 미인도 사건은 우리 사회 조급증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미술품 위작(僞作) 사건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이 사건은 작품의 출처부터 확인하며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감정에 임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서둘러 결론이 나오기를 바라는 사회 일각의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일을 그르쳤다.

사건의 발단은 1979년 10·26 사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재산을 압류하는 과정에서 상당수 미술품이 발견됐다. 어깨에 나비가 앉은 여성을 그린 인물화를 두고 당시 오광수 전문위원(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천경자의 작품이라고 확인했다. 그림은 검찰을 통해 법무부로 넘어가 국가로 환수됐고 절차에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에 이관됐다. ‘미인도’라는 제목은 당시 검찰 직원이 압류품 목록을 만들며 임의로 붙였다.

이후 10여 년이 흘러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은 종로의 현대그룹 사옥에서 ‘움직이는 미술관’이라는 전시를 기획하며 문제의 미인도를 공개 전시했다. 그리고 그 이미지로 아트포스터를 900장 인쇄해 홍보용으로 사용하고 5만원에 판매도 했다. 이게 발단이 되었다. 한 사우나에서 이 포스터를 액자에 넣어 걸어놓았고, 이를 본 천 화백의 지인이 “선생님 작품이 목욕탕에 걸려 있더라”고 전했다. 얘기를 들은 천 화백은 노발대발하며 “내 그림일 리 없다”며 한달음에 그리로 달려갔다. 인쇄물을 본 즉시 천 화백은 미술관에 “내 그림이 아니다”고 통보했다. 이어 그는 공개적으로 이를 주장하며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 없습니다”라는 비장한 말을 남겼다.

미술관은 진위 감정을 의뢰했고 당시 국내 유일의 감정협의체인 화랑협회 감정위원회는 3차에 걸친 감정 후 ‘진품’이라고 결론지었다. 화풍은 물론, 천경자 작품을 주로 표구한 동산방화랑의 표구가 장부에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이 그 근거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논란은 계속되었다.
 

‘미인도’는 위작 논란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1990년 출간된 에 흑백도판으로 수록된 작품이었다. ⓒ 정준모 제공

1998년 천경자 선집에서 작품 확인돼

사실 <미인도> 사건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 사회 전체가 이성적으로 움직였다면 해결될 일이었다. 이 작품은 논란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등장한 적이 있다. 1990년 1월 출간된, 총 27권으로 구성된 <한국근대회화선집>(금성출판사 펴냄) 중 11권인 ‘장우성/천경자’ 편 104쪽에는 해당 작품이 흑백 도판으로 이미 수록되어 있었다. 지난 1998년 당시 국정감사를 앞두고 한국회의원의 미인도 진위 여부에 대한 질의에 답변서를 준비하던 필자는 ‘선집’에서 이 작품을 발견(?)해 제시했다. 이를 통해 진위 여부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는 듯했다. 이 작품은 선집에 <나비와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는데, 1977년 둘째 딸을 모델로 그린 것이었다. 트리밍 과정에서 약간 잘려나가 도록에 실을 때는 원작보다 이미지가 미세하게 더 크게 보인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 중 주요하다고 판단해 편집자와 의논해 수록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런 사실 확인조차 없이 지루하게 공방은 이어졌고, 천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 작품이 위작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작품의 진위에 대한 판단에는 작가 의견이 최우선이다. 화랑협회 감정 내부 규정에도 ‘생존 작가이고 정신 상태가 정상이라면 작가 의견이 감정에 우선한다’고 명시돼 있다. 결국 이 사건은 법정까지 갔다. 그러나 법원마저 ‘판단 불가’ 판정을 내렸다.

“내가 그렸다” 위조범의 말로 또 진실 공방

이 사건으로 천경자는 1991년 4월 “붓을 들기 두렵다 …(중략)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않다”며 절필을 선언했다. 미술계 일각에서는 국사범(김재규)이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게 된 배경을 두고 작가가 부담을 느껴 ‘가짜’라고 주장한 것이라는 수군거림도 나왔다. 깊은 상처를 입은 천 화백은 1998년 자신의 주요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큰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작가는 절필할 정도로 절실하게 주장했지만 선집에 실려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식’을 몰라본 천경자에 대해 “(많은 그림을 그렸으니)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라는 여론이 조성돼 있을 때쯤 사건이 또 하나 일어났다. 1999년 미술품 위조범으로 붙잡힌 권춘식씨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내가 그렸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한 번 미인도가 도마 위에 오른 것이다. 권씨는 자신이 1984년에 문제의 미인도를 그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인도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관된 것은 1980년이다. 시간 자체가 맞지 않는 셈이다. 4년이라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위조범의 한마디에 미인도가 또다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도록에 엄연히 실려 있는 작품이고, 시차라는 명백한 불일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한국과학기술원 등지에서 검토하고 시료(試料)를 분석하는 요란법석을 떤 뒤에야 또 ‘진품’이란 결론이 내려졌다.

지금, 수많은 검증과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진품’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작가는 물론 많은 사람에게 미인도의 진위 여부는 전설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이제 작가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권씨는 10월30일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틀림없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며 자신이 위작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천경자의 ‘미인도’는 이제 영영 <나비와 여인>이라는 원제(原題)를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천경자가 말한 ‘찬란한 고독’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을까. 그가 세상을 떠나고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환희와 고통이 교차하는 그의 그림을 더욱 처연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1991년 1월1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위작 논란에 대해 설명하는 이경성 국립 현대미술관 관장. ⓒ 연합뉴스

IMF(외환위기) 사태의 후유증으로 한국 경제가 매우 어렵던 1999년, 당시 서울지검 형사5부(부장검사 이동기)는 1000여 점의 문화재를 가짜로 만들어 그중 50여 점을 유통시키며 21억원의 부당이익을 챙긴 11명의 골동품상을 구속했다. 검찰은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78호),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국보217호), 단원 김홍도의 <신선도> 6폭 병풍 등 1000여 점과 위조 낙관 등을 압수했다. 구속된 11명에 위조에 가담한 권춘식씨(당시 52세) 등이 포함됐다.

구속된 권씨는 취재차 면회를 온 한 주간지 기자와 영치금을 넣어주는 조건으로 인터뷰를 했다. 이때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는 자신이 그린 것이라고 진술하고 이것이 보도되면서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하지만 그가 그렸다는 천 화백의 또 다른 위작들을 보면 확연하게 다른 점이 발견된다.

위작을 만드는 경우 도록에 실린 그림을 보고 이를 재구성하거나 여러 작품에서 일정 부분을 따다 재구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고서화의 경우 습자지를 이용해 전형적인 베끼기와 앞장 떼기, 뒷장 떼기, 환등기로 비춰놓고 베끼기, 낙관 바꿔치기 등의 방법을 동원하는데, 가장 많이 쓰이는 습자지 베끼기, 유산지 밑 그림법은 유명 작가의 진품 위에 얇고 투명한 기름먹은 습자지를 대고 목탄으로 밑그림을 베낀 다음 그 습자지를 화선지 위에 올려놓고 먹으로 베껴낸 대로 따라 그리는 방식이다. 그러면 아래 화선지에 먹이 배어 윤곽이 나타나게 된다. 그 후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넣고 채색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그런데 권씨의 경우, 청전 이상범의 작품을 위조하는 데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뒷장 떼기나 앞장 떼기는 그림이 그려진 원본을 다시 표구하면서 물에 불려 여러 겹으로 배접(褙接)된 작품의 뒷장이나 앞장을 떼어 분리시켜 두 장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중국에서 수입된 옥판선지의 경우 3장, 한국의 장지도 2장 정도는 가볍게 떼어내 위작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천경자 작품의 경우, 채색화이기 때문에 주로 환등기 비추기나 직접 조합해서 그리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위작인 경우 채색이 조악하고 필치가 빠르지 않아 매우 쉽게 위작임을 알아볼 수 있다. 때문에 채색화를 위작으로 만드는 일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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