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車, ‘정의선 시대’ 신호탄 쐈다
  • 박성의 기자 (sincerity@sisabiz.com)
  • 승인 2015.11.06 16:06
  • 호수 1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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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부회장 풀어야할 숙제 많아”

투 버튼 검정 양복에 단추를 하나 푼 건장한 체구의 남자 한 명이 단상에 올랐다. 검은색 배경에 그의 코발트색 넥타이가 더 두드러졌다. 잠시 후 그의 넥타이 색깔과 동일한 브랜드 로고가 페이드 인(fade in)되며 배경에 떴다. 현대차 럭셔리 브랜드의 새 시작을 알리는 ‘제네시스(genesis)’ 로고였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이 날을 위해 10년을 기다렸다”며 “안주하는 것은 현대차 정신이 아니다. 제네시스를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전할 것”이라며 현대차 미래의 시작을 알렸다.

◇ 제네시스, 미래의 정의선 체제 가동 알린 서막

정의선 부회장은 제네시스 브랜드 론칭 프레젠테이션을 직접 진행했다. / 사진 = 현대자동차

현대차는 지난 4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세계 고급차 시장을 겨냥한 프리미엄 브랜드 ‘제네시스’ 론칭을 알렸다. 이날 행사장에는 정의선 부회장을 비롯 양웅철 부회장, 피터 슈라이어 사장 등 주요 임직원들이 대거 참석했다.

제네시스를 알리는 행사였지만, 이목은 정 부회장에게 쏠렸다. 정 부회장이 현대차 행사를 직접 이끌기는 이례적이다. 이날 정 부회장은 행사의 처음과 끝을 무선 마이크를 착용한 채 직접 진행했다.

정 부회장이 발표를 진행한 행사는 앞서 2011년 1월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현대차의 새 브랜드 슬로건 발표식, 올해 초 친환경차 전략 선언식 정도다. 특히 정 부회장이 국내 기자단을 대상으로 한 행사에서 정몽구 회장 배석 없이 스피치를 진행한 것은, 2009년 YF쏘나타 출시 행사 이후 6년만이다.

스피치 동안 정 부회장은 중간 중간 말을 더듬으며 긴장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침착한 어조와 제스처를 끝까지 유지했다. 기자단의 질문에도 흔들림 없이 대답하는 모습에서 얼마나 많은 예행연습을 거듭했는지 알 수 있었다.

출시 행사에서 만난 현대차 관계자는 “정 부회장께서 이번 제네시스 행사에 그 어떤 행사보다 많은 공을 들였다”고 귀띔했다. 정 부회장이 제네시스 출시에 거는 기대감의 무게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정의선 부회장, 경영능력 입증할 차례”

정 부회장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장남으로 1999년 현대차 구매실장, 2000년 현대차 국내영업본부 전무, 2008년 기아차 해외담당 사장을 거쳐 2009년 현대차 부회장 자리에 올랐다. 10년만에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며 명실상부한 후계자가 됐다.

하지만 주주들 사이에서는 정 부회장이 아버지 그늘에 가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평이 나왔다. 정 회장이 보여줬던 강력한 리더십이 정 부회장에게선 찾아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정 부회장의 대표적인 공적은 ‘모하비’ 개발이다. 정 부회장은 2005년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을 주도, 29개월에 걸쳐 2300억이 투입해 ‘모하비’를 완성했다. ‘정의선 차’ 모하비는 이후 기아차 스테디셀러 모델로 자리잡으며 정 부회장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하지만 그 후 정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을 보조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현대차 주력 모델 에쿠스, K9, 제네시스 출시 행사 모두 정 부회장이 아닌 정 회장이 주도했다. 정 부회장은 주로 외부 인사 영입 등을 챙기며 정 회장을 보필해왔다는 것이 중론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의 미래라고도 불리는 제네시스 브랜드 론칭행사를 정 부회장이 진행한 것을 두고 경영승계가 본격화된 것이라 풀이한다. 정 부회장이 더 이상 수면 아래서 활동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포의 의미가 담겼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 제네시스 브랜드가 론칭될 것이란 건 이미 예고된 일이었지만 정 부회장이 직접 행사를 챙기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며 “‘제네시스는 곧 정몽구가 아닌 정의선의 것’이라는 상징이기도 하다. 향후 제네시스가 호성적을 낸다면 그 때가 승계 적기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 정의선 부회장이 풀어야할 3가지 숙제

정 부회장이 제네시스로 차기 최고경영자(CEO)의 시작을 알린 만큼, 제네시스의 성패가 정의선 체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세계 고급차 시장이 연간 10% 이상씩 커가는 상황에서도 제네시스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경영능력을 의심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제네시스와 별개로 승계 린치핀(linchpin)은 현대차 지배구조다. 정 부회장이 최근 5000억에 가까운 현금을 투입하며 현대차 지분 316만주를 확보했지만 갈 길이 멀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다. 현재 정 부회장은 현대글로비스 지분 23.29%를 갖고 있다. 하지만 현대모비스 지분이 없고 기아차 지분은 1.75%에 머물고 있어 아직 확실한 현대차 지배력을 갖추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현대차가 왕위계승작업을 브랜드 신차 발표회 등을 통해 ‘슬며시’ 진행하는 행태를 비판하기도 한다. 국내 대기업들의 고질적인 문제인 경영승계가 프레젠테이션 능력으로 판가름 날만큼 가볍지 않다는 지적이다.

김우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대차 가장 큰 문제는 정몽구 회장이 물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정의선 부회장이 부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며 “주식회사에서 부자간 승계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경영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승계를 공식화 할 것이라면 구(舊) 수장이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는 불안감만 커진다. 롯데사태가 비단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아니었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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