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 파동 최대 수혜자는 문재인?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11.11 15:21
  • 호수 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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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노 공세 절로 차단…제20대 총선은 ‘金·文’ 한판 대결로

1985년의 2·12 총선은 민주화를 알리는 확실한 징표였다. 이날 실시된 제12대 총선에서 창당한 지 한 달도 안 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하루아침에 제1야당으로 우뚝 섰다. 선거 직후 민한당 의원들이 대거 합류하면서 신민당은 103석의 거대 야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민우를 총재로 하는 신민당 돌풍은 김영삼(YS)과 김대중(DJ)이라는 지도자가 있기에 가능했음은 물론이다. 제1당이 비례대표 3분의 2를 독식하는 룰에다가, 신민당에 숨 고를 틈을 안 주기 위해 한겨울 총선을 강행하는 등 온갖 방해공작도 두 사람의 도전을 이겨내지 못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조직적 저항 불발은 신당 성공 어려운 탓

정치 발전론적 측면에서 한국 정치를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잣대는 YS·DJ에 김종필(JP)을 더한 ‘3김(金)’이다. 3김이 할거했던 시대와 그 이후는 모든 게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의 기점을 얘기할 때 3김이 퇴장한 2002년을 꼽는 것도 그래서다. 그 이유는 이들의 정치 행태, 특히 민주 정치의 중심인 정당 운용 면에선 과거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YS나 DJ·JP는 필요에 따라 언제고 정당을 만들고 해체하거나 재조립했다. 민주화투쟁이라는 명분으로 가려졌을 따름이지 실은 ‘정당 민주화’에 관한 한 할 말이 없게 돼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세게 비난하던 여당의 제왕적 총재 이상이었다. 말 그대로 ‘오너’로서 전권을 행사했다.

장악력이 원체 강한 YS·DJ·JP였기에 탈당해 딴살림을 차린 무리가 성공한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이는 정치환경이 바뀐 지금에도 ‘전통’처럼 이어지고 있다. 한때 킹메이커로 불리던 허주(虛舟) 김윤환 의원이 2000년 16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하자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가 허무하게 스러지는 등 실패 사례는 부지기수다. 3김을 흉내 내 허주 등 부담이 될 중진들을 대선 전에 미리 내친 이회창 신한국당 총재 자신도 결국 대선에서 낙선했는데, 어쨌거나 분당(分黨)은 자멸과 동의어로 고착됐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창당이 그것인데, 그러나 이는 현직 대통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게 적확하다. 박근혜 대통령도 야당 시절인 2002년 이회창과 대립하면서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적이 있으나 이내 복귀했다. 그는 18대 총선 당시 이른바 친박 그룹에 대한 공천 학살에 반발하면서 서청원 의원 등이 탈당해 친박연대를 창당했을 때도 한나라당에 남았다. 이 공천 학살의 희생자였던 김무성 현 새누리당 대표는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 후 복당했는데 19대 총선 때 친박 주도의 칼날에 또 공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자 40여 명의 탈락자를 규합해 창당하는 방안도 모색한 바 있다. 그러나 종국에는 창당을 포기하고 당에 협력함으로써 구제됐다. 새정치연합에도 호남이라는 지역적 특수 상황을 업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재기한 케이스들이 있다. 하지만 독자 생존 능력이 있는 몇몇 정치인들도 무소속 당선 후 복당할지언정 별도 살림 차리기는 피했다. ‘제3 정당’이 살아남기 힘든 한국적 상황을 직시한 결과다. 이런 것들이 3김 시대 이후 정착된 한국 정치 질서요, 정치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는 여야 모두에서 대규모 물갈이와 그에 따른 탈당 및 신당 창당설이 분분하지만 결국 새누리당은 김무성 체제, 새정치연합은 문재인 주도로 제20대 총선이 치러지리라는 전망과 통한다. 여기엔 제20대 총선(2016년 4월13일)이 임박한 것도 큰 요인이다. 게다가 마침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까지 불어닥쳐 내부에서 치고받을 시간적 여유가 없게 됐다. 여야의 다른 속사정으로 경과나 결과는 다를 터이지만 전체적인 틀은 그렇다.

새누리당은 청와대와 김무성 대표 간의 ‘절충’이 ‘적당한 선’에서 이뤄질 게다. 김 대표의 오픈프라이머리 구상 상당 부분에 대한 손질이 불가피하며 전략공천이라는 이름 아래 인적 쇄신은 빤히 예상되는 일이다. 이 경우 우선 대상은 패할 우려가 적은 서울 강남과 대구를 비롯한 영남권 의원들이 된다. 19대 총선 때 정홍원 위원장(박근혜 정부 초대 총리)의 공직후보자추천위는 ‘하위 25% 컷오프 룰’과 서울 강남 지역 현역 전원 교체, 비례대표 의원 강세 지역 배제 등을 원칙으로 하면서 친MB(이명박)계를 탈락시켰다. 18대 당시 MB계가 친박근혜계에 가했던 공천 학살의 재판(再版)이었다. 이때는 지역구 42명, 비례대표 8명 등 50명이 탈락, 현역의원 교체율이 39%나 됐다. 16대에는 31%, 17대에는 36.4%. 이 수치는 어찌됐든 30% 이상의 물갈이를 의미한다. 당연히 반발과 동요가 간단치 않을 것임에도 지도부가 전혀 개의치 않는 소이(所以)는 조직적 반발이 없으리란 확신에서다. 여기엔 야당의 2배 가까운 지지자들의 충성도가 확고한 것도 작용한다. 최근 투표 행태가 이 같은 경향을 말해주고 있는데, 유권자들이 경제 상황이나 정책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는 얼마든지 있다. 따라서 청와대와 김 대표 간 타협점이 더욱 주목된다. 차기 대선을 의식한 김 대표가 청와대와의 마찰을 감행하지 않으리라는 관측 때문에 ‘위험 지역’ 의원들은 더 전전긍긍하고 있다.

김무성도 청와대와 갈등 고비 넘겨

비노(非盧) 그룹의 도전에 고전하던 문재인 대표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으로 한숨을 돌렸다. 지난 4·29 재보선 참패 이후의 거센 퇴진 압력을 버티긴 했지만, 안철수 의원이나 박지원 의원 등 중진들의 저항은 여간 부담스러운 국면이 아닐 수 없었다. 혁신위원회가 제시한 중진들의 열세 지역 출마나 용퇴, 검찰 기소 단계나 하급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의원의 공천 배제 내지 불이익이 자신을 겨냥한 게 분명한 이상 이들이 펄쩍 뛰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다선 의원 내지 중진은 거의가 야당의 거대 텃밭인 호남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때문에 문 대표 측이 가장 우려하는 신당 창당 여지도 다분했다. ‘천정배 신당’뿐 아니라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 등이 중심이 된 신민당은 이미 준비위 구성을 끝낸 상태다. 그런데 이런 누란지경에서 국정화 파동이라는 호재가 터졌다. 학계·시민단체와 연대한 대정부 전면전을 선포하자 문 대표를 향한 비난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비노 그룹의 대공세를 자연스레 차단케 된 것이다. 어차피 단기간에 그칠 국정화 파동이 아닌 만큼 친노 주도하의 총선 공천 작업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1개월여만 지나면 완전 총선 정국으로 진입하기 때문에 달리 시간적 여유가 없다. 문 대표가 얻는 수확은 이뿐이 아니다. 야당은 지난 10여 년 사이 대선·총선은 물론 지방선거, 재·보궐 선거에서 연전연패했는데, 이번엔 에너지를 보충할 원군도 기대하게 됐다. 국정화 연대 투쟁을 통해 진보 세력의 일체감과 동원력 확보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좌파 정당과의 공조만 성사시키면 총선에 시급한 기반 구축이 마무리된다는 성급한 전망까지 나올 정도가 됐다. 세월호·권력비선 스캔들 등 여권의 잇단 악재조차 정국 주도에 활용 못했던 문재인 체제다. 그래서 재주라는 게 강경 거리투쟁밖에 없느냐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친노 패권주의에 사로잡혀 앞뒤 분간도 못한다는 힐난도 쏟아졌다. 이번에도 동원한 방식이 같은 것이라 미덥진 않으나 와중에 돌출한 국정화 파동은 가뭄에 단비 격이다.

내년 4·13 총선 결과는 차치하고, 김무성·문재인 두 대표를 주장으로 하는 총선전(總選戰)이 미구(未久)에 전개될 참이다. 그 중간, 대대적 물갈이로 여야 내부가 한바탕 소란스러울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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