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중사 사건’ 22년 만에 진실의 문 열다
  • 정락인│객원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5.11.18 11:07
  • 호수 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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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수사기관 “교통사고 후 자살 시도”… 박 중사 “군이 조작했다” 반박
72일간 국회와 국방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인 박준기씨의 형 준호씨. © 박준기씨 제공

국회와 국방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박준호씨(50)가 지난 11월10일 고향인 전북 군산으로 내려갔다. 올해 7월 서울로 올라온 지 약 4개월 만이다. 박씨는 국회와 국방부 앞에서 72일간 ‘1인 시위’를 하며 외로운 싸움을 벌여왔다. 그는 이곳에서 ‘박준기 중사 자살 조작 사건-생계형 살인인가요?’라는 피켓을 들었다.

박준기 중사(46)는 그의 친동생이다. 전직군인인 준기씨는 군복무 중 일어난 사고로 두 다리를 절단했다. 그런데 준호씨 형제는 당시 사고가 “군에 의해 조작됐다”며 “그 진실을 밝혀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지난 4월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진성준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한민구 국방부장관을 추궁했다. 진 의원은 “박준기 사건을 보면 초동 수사에 문제가 많다”며 “다시 수사하라”고 한 장관을 다그쳤다. 그러자 한 장관은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지만 군의 조사를 못 믿으면 다른 민간과 함께 확인한다든지 그런 건 가능하다. 검토해보겠다”고 답변했다.

22년 만에 진실의 문을 열 새로운 전환점이 생긴 것이다. 준호씨 형제는 한 장관의 약속이 금방 지켜질 줄 알았다. 하지만 3개월의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급기야 형인 준호씨가 생계도 포기한 채 상경해 ‘1인 시위’에 나섰던 것이다.

준호씨는 일요일만 빼고는 1인 시위를 계속했다. 그는 “장남인 내가 두 다리를 절단한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이뿐이다. 동생의 억울함에 내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느냐”고 말했다. 박씨는 낮에는 시위하고 밤에는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동생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렸다. 얼마나 집요하게 했던지 지금까지 날린 트윗 수가 3만개가 넘는다.

그러나 한 장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준호씨의 기약 없는 1인 시위도 계속됐다. 결국 7개월 만에 국방부가 ‘민간이 참여한 조사’ 약속을 지키겠다고 나섰다. 이에 따라 오는 11월17일 사고 현장인 강원도 춘천 한림대병원 10층 성당에서 ‘현장 상황 재현’이 이뤄지게 됐다. 이날 국방부 관계자, 국회의원, 기자단, 시민단체 등이 참여한 상태에서 ‘박준기 중사 사건 현장 상황 재현’이 실시된다. 이로써 22년간 묻혔던 ‘박 중사 사고’의 진실이 밝혀질지 주목된다.

그동안 박준기씨의 주장과 국방부 수사자료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고, 실제 현장 상황에서도 오류가 있었다. 현장 상황 재현을 통해 사건의 실체가 얼마만큼 드러날지는 미지수다. 앞길이 창창했던 ‘박준기 중사’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군 복무 때 건강한 모습의 박 중사(왼쪽)와 두 다리 절단 후의 박준기씨. © 박준기씨 제공

군의 초동 조사 곳곳 허점투성이

지난 1994년 12월17일 박준기씨(당시 24세)는 육군 제2군단사령부 정보처 선임하사(중사)로 복무 중이었다. 그는 이날 친구 김 아무개씨와 춘천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김씨의 차를 무면허로 음주운전하다가 사고를 냈다. 박씨의 인생은 이때부터 크게 꼬이기 시작한다.

이 사고로 동갑내기 친구인 김씨는 큰 부상을 입었고, 박 중사는 얼굴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었다. 이들은 치료를 위해 사고 지점에서 가까운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으로 갔다. 그런데 병원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멀쩡하게 걸어 들어간 박 중사가 이곳에 머무르는 도중 크게 다치고, 정신까지 잃었던 것이다.

박 중사는 11일 후에 깨어났으나 교통사고 이후의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그의 몸 상태도 심각했다. 갈비뼈와 척추의 골절로 인해 내장 파열까지 됐다. 양측 발목에도 출혈이 심했다. 박 중사는 왜 다른 곳도 아닌 병원에서 이처럼 큰 부상을 당한 것일까.

군 헌병의 수사 자료에 의하면, 박 중사는 병원으로 친구를 데려온 후 병원 10층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15m 아래로 투신했다. 박중사가 3층 옥상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병원 수위장 홍 아무개씨가 처음 발견했다. 그때의 시각이 1994년 12월18일 0시30분쯤이었다. 그 후 헌병이 도착했으며, 박 중사의 자살시도 이유는 ‘교통사고의 책임감 때문’이라고 적혔다.

군 수사 자료를 보면 박 중사는 이와 관련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투신했다는 것도 “어머니가 ‘병원 10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해서 그렇게 알고 있다”고 답변했다. 박 중사는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이 없었지만 군이 내민 수사 자료를 보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박 중사는 이듬해인 1995년 전역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온 후에도 박준기씨의 불행은 계속됐다. 다리의 염증이 심해지면서 1996년 가을 왼쪽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 5년 후인 2001년에는 나머지 한쪽 다리도 절단하면서 두 다리를 모두 잃었다. 그런데 1999년부터 준기씨의 잃었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기억이 살아날 수록 의문은 더 커졌다. 그의 기억은 군 헌병의 수사 내용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부터 박씨는 자신의 사고가 조작됐다는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그는 “병원에서 투신한 것이 아니라 헌병 수사관에게 폭행당했다. 이로 인해 큰 부상을 입었고 헌병은 이를 은폐하려고 자살 시도로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박씨는 군 수사기관의 초동 조사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당시 수사를 진행했던 2군단 헌병대, 성심병원, 군 병원 등을 돌며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확보해 비교 검토했다. 교통사고 시간, 발견 장소, 투신했다는 병원창문의 폭, 떨어진 높이, 방충망의 상태 등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박씨는 군 당국에 재조사를 요구했고 지금까지 우여곡절 끝에 네 번에 걸쳐 재조사가 이뤄졌다.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2002년 2군단 헌병대와 2006년 육군 수사단은 “초동 수사에 문제가 없다”며 기각했다. 박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2007년 국민권익위(당시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 권익위는 7개월 정도의 조사 기간을 거쳐 군의 초동 조서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니 육군본부가 재심의해서 공상(公傷)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국방부장관에게 시정권고를 했다. 특히 박씨가 투신했다는 병원 창문으로는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 2008년 군 검찰단이 조사에 나섰으나, 당시 병원 당직자의 말을 빌려 “창문 개방폭이 최대 30cm까지 가능하다”며 초동 수사에 문제가 없다고 통보했다. 2010년 육군법무실도 재조사를 진행했으나 “헌병 수사관의 폭행 혐의는 없다”며 헌병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군 수사 자료에는 적지 않은 오류가 눈에 띈다.

박준기 중사가 투신한 것으로 발표된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왼쪽). 병원 창문(오른쪽 위)과 투신 장소의 혈흔. © 박준기씨 제공

군 수사 자료에서 불거지는 의혹들

첫째, 교통사고가 일어난 시각이 다르다. 군수사기관의 조서를 보면 교통사고 시각이 1994년 11월17일 오후 10시30분쯤으로 돼 있다. 하지만 올해 준기씨와 만난, 사고 당시 차량에 동승한 친구이자 차주인 김 아무개씨와 그의 어머니는 “당시 사고 시각이 오후 8시를 약간 넘긴 때”라고 말했다. 군 수사기관의 조서와는 2시간 30분의 차이가 난다.

교통사고 시각이 중요한 이유는 헌병의 출동 시각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박 중사는 2차 상해가 헌병의 폭행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군은 투신 이후여서 헌병과는 관련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러나 사고 정황을 따져보면 교통사고 시각은 오후 8시30분 전후라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둘째, 성당 창문(반 개방형)의 개방 폭이 조서에 기록된 것과는 다르다. 군 초기 조서에는 창문의 개방 폭, 즉 창문 열리는 너비가 21cm로 기록돼 있으나, 한림대 성심병원 초기부터 시설을 담당했던 반장에 따르면, 창문의 개방 폭은 13cm 남짓이다. 군 조서와는 무려 8cm가 차이 난다. 성인 남자 그것도 체격이 큰 박 중사가 13cm밖에 열리지 않는 창문 아래로 뛰어내릴 수 있는 확률은 0%에 가깝다.

셋째, 박 중사가 뛰어내렸다는 10층 창문에서 3층 옥상까지의 높이도 차이가 난다. 군 조서에는 높이가 15m로 돼 있다. 실제 그 길이를 재보니 22m로 7m의 오차가 발생한다. 1~2m도 아니고 높이 7m 정도면 눈으로도 가늠할 수 있는 높이다. 국민권익위가 조사 당시 외래병원에 의뢰한 결과, 22m에서 떨어졌을 경우 사망하거나 박 중사가 입은 상해보다 훨씬 더 심한 중상을 입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넷째, 박 중사가 추락해 발견된 장소도 다르다. 군 조서에는 발견자인 병원 수위장 홍씨의 최초 진술은 10층 창문 아래쪽 3층 옥상출입문 바로 옆이라고 했다. 그런데 박 중사가 지인들과 홍씨를 만났을 때의 말은 달랐다.

박 중사는 “1999년 지인들과 현장을 방문해서 홍씨를 만났다. 그에게 물어봤더니 ‘직하 지점에서 14m 정도 떨어져 있는 지점에원내 급수펌프가 있었고, 그 바로 옆에서 발견했다’고 확실하게 진술했다”고 말했다. 군조서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고 당시 병원 당직의사도 추락 지점과 발견 지점을 다르게 증언하기도 했다.

그 밖에 박씨가 병원 10층에서 뛰어내린 것을 본 목격자도 없다. 군이 관련 사진이라고 공개한 것에서도 여러 의문점이 발견된다. 여기에는 사고 현장 바닥에 피가 흥건한 것처럼 나와 있으나 형인 박준호씨의 말은 다르다. “사고 후 군에서 동생이 입었던 옷을 집에 우편으로 보내왔다. 거기에는 피 한점 묻어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군에서 제시한 사진이 박 중사가 흘린 피가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혈흔에 대한 DNA 검사를 한 기록도 없다. 박 중사가 투신했다는 창문에는 손자국이 있었다. 이것에 대한 지문감정을 해보면 박 중사가 실제 이곳을 통해 투신했는지를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군은 지문감식을 하지 않았다. 이게 박 중사의 손자국인지, 아니면 제3자의 손자국인지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박준기씨는 2009년 춘천경찰서에 자신을 폭행한 것으로 확신하는 헌병 김 아무개씨 등 2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소재지 불명’이라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사실상 사법적으로 면죄부를 준 것이다.

박준기씨의 삶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결혼을 약속한 여성이 있었으나 두 다리를 절단한 처지를 비관해 스스로 멀리했다. 불편한 몸으로 취업을 하는 것도 어렵게 됐다. 그동안 들어간 병원비만 해도 억대가 넘는다. 그로 인한 고통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다. 형인 준호씨는 생계를 포기한 채 동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나섰다. 그런데도 군은 의문을 풀기보다는 애써 무시해왔다. 이런 군대에 누가 자식을 보내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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