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갈이 못하면 총선 이겨봤자 남는 건 레임덕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11.19 19:27
  • 호수 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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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사람’으로 본격 개입 신호탄 쏜 대통령

 

단임 대통령에게 레임덕은 숙명이다. 권력의 속성이, 인심이라는 게 본래 그렇게 생겨먹어서다. 야박하든, 얄팍하든 어쨌든 그렇다. 하지만 아무리 세태가 그렇더라도 임기 초반 대통령의 위세는 대단하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초반의 서슬은 퍼렇다. 그래서 가장 독한 정적들조차 이때만은 입을 닫고 꼬리를 내리게 마련이다. 영(令)이 제대로 서는 임기 3년 차까지가 대통령의 황금기인 셈이다. 치적을 쌓거나 쌓을 기반을 구축하는 호기인 것이다. 이게 단임 대통령제에서 나타나는 대체적인 정치판 그림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일반적 모습에서 벗어나 있다. 청와대 스스로 점수를 매겨봐도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들이 널려 있다. 임기 절반을 훌쩍 넘긴 시점임에도 인사·업적 등에서 ‘이것’이라고 내세울 게 별로 없는 처지다. 최대 공약인 4대 개혁과 경제 활성화 정책은 답보 상태다.

박근혜 대통령은 11월10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에게 정치권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당부했다. “진실한 사람만 선택해달라”고 했지만 실은 여야 정치권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 연합뉴스

권위 하락이 ‘총선 심판론’ 개진 배경 됐나

야당이 사사건건 물고 늘어진 이유가 크지만, 그를 가능케 한 것이 대통령 자신이 다수 여당 대표 시절 통과시킨 ‘국회선진화법’이어서 탓을 해도 한계가 있다. 인사 부문은 대통령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 만하다. 첫 총리 지명자부터 여론의 뭇매를 맞고 낙마한 데 이어 장관 후보자들이 줄줄이 탈락했다. 새 정부의 산뜻한 출발에 재를 뿌린 것인데 이 대목은 접어두더라도 대통령의 의중이 실린 인물이 여권 내부 경쟁에서 패퇴한 점은 심각했다.

통상 대통령의 권위가 최고조에 달한다는 임기 2~3년 차에 벌어졌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2014년 김황식 서울시장 후보, 황우여 국회의장 후보, 서청원 새누리당 대표 후보가 비박(非朴) 후보에게 모두 패했다. 상대 ‘정몽준(서울시장)-정의화(국회의장)-김무성(당대표)’과의 표차도 압도적이었다. 당 대표 경선 때는 대통령이 직접 현장에 나가 ‘독려’했음에도 그랬다. 상징적 제스처 하나만으로도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는데 하물며 ‘내부’에서, 예전 같으면 큰 변고일 ‘항명’ 사태가 이어진 것이다. 변고는 올해 2월 새누리당 원내대표에게서도 벌어졌다. 우려한 대로 친박계 이주영 후보를 꺾은 유승민 원내대표는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속을 긁더니 결국 ‘세월호법’ 협상 때 일을 냈다. 당의 수장이 된 후 개헌 발언과 ‘차기 대권’ 행보로 청와대를 어지럽힌 김무성 대표 행보와 흡사했다. 게다가 그런 원내대표를 도중하차시켰더니 본인은 철퇴를 맞은 게 아니라 되레 차기 대권 후보로 부상하는 등 청와대가 실색할 사태가 거듭된 게 저간의 상황이다. 여기에 청와대 권력 비선 소동, ‘성완종 리스트’ 소동 등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와중에 떠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취임 한 달 만에 하차한 이완구 총리의 경우야 인사의 다른 측면이지만 어쨌거나 ‘사람 복’이 없었던 것은 틀림없다. 현행 헌법 체제에서 최초로 과반 이상의 득표(51.6%)를 한 대통령에 걸맞은 호사는 고사하고 타기할 사태만 감수해야 했다는 측면에서다. 별 ‘감동’ 없이 끝난 포스코그룹 비리 관련 수사도 역대 정권에 힘을 실어줬던 전례에 비춰 국정 운영 전략 내지 역량에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런 것들이 여야 정치권을 초긴장케 한 박 대통령의 11월10일 ‘진실한 사람’ 발언 배경으로 보인다.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감이 대통령의 여의도 정치권에 대한 불신·불만과 상승 작용을 일으킨 결과로 풀이된다. 우국충정을 모토로 하는 대통령에게 정치 현실이 어떻게 비쳤을지는 불문가지다. 가뜩이나 배신 트라우마가 강한 대통령에게 어떤 영감을 줬을지는 충분히 이해된다. 박 대통령은 “진실한 사람만 선택해달라”고 했다.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민을 향해 총선 심판론을 개진한 것이다. 제16대 노무현 대통령은 ‘순진하게’ “국민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고 했다가 탄핵소추를 당했지만 박 대통령은 ‘원론적’ 표현으로 제재를 피해갔는데, 사실 행간에 담긴 메시지 강도는 노 전 대통령의 그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국무회의라는 자리를 활용한 것도 절묘하다. 준비된 원고로, 말꼬리를 잡히지 않으면서 강력하게 뜻을 전하는 대통령에게서는 치밀한 계산과 강단을 넘는 결기가 읽힌다. 

박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를 하차시킨 6월 국무회의 때는 ‘배신의 정치’를 언급했었다. 바로 이어 대구 방문 시 대구 출신 의원 행사 참석 배제, 이에 대비되는 인천 방문, 유승민 의원 부친상에 조화 ‘생략’ 등으로 청와대의 의지를 만천하에 공지했다. ‘배신의 정치’ 제기가 주로 여당을 향한 총선 공천 물갈이 신호탄이라면, ‘배신의 정치’ 2탄인 11월10일의 ‘진실한 사람’ 발언은 여야 정치권 모두를 겨냥한 것이다. 여당뿐 아니라 야당 인사들의 금품 수수  등  ‘총선 대목’에 즈음한 비리는 물론 그간 확보한 비위 자료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엄중한 메시지다. 대통령의 10일 발언에 야당의 비협조와 방해에 대한 힐난과 각성 촉구가 담긴 게 분명하지만 아무래도 직격탄을 맞을 곳은 여당이다. 대통령의 입김이 직접 닿기 때문이고, 총선을 앞둔 시점이라 공천이라는 구체적인 지렛대도 있다. 차기 대권을 최종 목표점으로 하는 김무성 대표로서는 작심하고 나선 청와대와 예각을 세우기가 무리일 것임은 명약관화하다.

청와대, 손해 없고 최소 친위부대는 건져

대통령의 강공 드라이브를 담보해주는 요소는 이 밖에도 여럿이다. 지난해 말 권력 비선 파동으로 일시 주춤했던 지지율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반면, 여권의 잇단 악재에도 불구하고 야당 지지율이 20% 전후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빈둥거리는 국회’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매우 고조돼 있다는 점 등이다. 과거 자신들처럼 ‘친박연대’를 만들 여당 내 세력이 없음도 확신한다. 서울 강남, TK(대구·경북) 유권자들이 당을 보고 후보 얼굴 보고 투표하지 않는 행태도 여유를 더한다. 또 이런 강공 드라이브가 어떤 선거 결과를 가져오건 손해 날 게 없다는 계산이 서기 때문이다. 손 놓고 있다간 김무성 체제가 총선 승리를 하더라도 남는 것은 레임덕이 전부일 뿐이라는 셈법의 결과다. 반대로 적극 개입하고 주도할 경우 최소 견고한 친위부대는 확보한다는 것.

“노무현 대통령 재임 당시 열린우리당 소속이면서도 청와대에서 차 한잔 못한 국회의원이 적지 않다. 비노(非盧) 의원들이 그랬다. 반면 대통령과 뜻 맞는 이들은 전례 없이 편히 청와대를 드나들었다. 대통령의 호오(好惡), 낯가림이 당의 분열을 가속화시켰고 이후 선거에서 현재의 야권이 ‘연전연패’당하는 참담한 결과를 낳게 했다. 그러나 친노 그룹은  제17대 대선 이후의 폐족(廢族) 위기를 넘긴 후 현재 야권의 중추 세력이 됐다. 이념으로 뭉친 친노와 견줄 것은 아니지만 보수 진영에도 친위부대의 필요성은 확실하다.” 여권 원로의 진단이다. 청와대가 어디까지 기획·조율했는지는 미지수이지만 실리적 측면에서도, 후일을 위해서라도 정당 자율이라는 명분에 묶여 주저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장관, 청와대 수석들에게 딴생각(정치하고 싶은)하려면 물러나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요즘 움직임은 정반대다. 총선 승리, 보다 정확하게는 친위 세력을 심기 위한 장관·수석들의 차출은 거침없다. 국정 공백이니, 누더기 개각이니 하는 세간의 비아냥거림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총선 승리’ 건배 스캔들로 인해 누가 봐도 볼썽사나웠던 정종섭 행자부장관도 동원했다. 그나마 조화도 안 보낸 유승민 전 원내대표 부친상 즈음의 일요일에 사퇴 성명을 발표케 했다. 기획 발표 여부는 불확실하나 그의 대구 출마가 예고된 처지여서 뒷공론을 낳기에 충분했고, 대통령의 ‘집념’이 더 무섭게 회자된다.

이래저래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물갈이라는 이름의 공천 피바람이 몰아칠 것으로 관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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