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를 변방도시에서 국제도시로 도약시키다
  • 김경준 |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 (.)
  • 승인 2015.11.26 20:56
  • 호수 136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수의 신전 조성·상수도 정비·아크로폴리스 등 공공 건축물 개·보수

신화시대의 왕정으로 출발해 기원전(B.C.) 7세기 후반 귀족정이 수립됐으나 평민과의 사회·경제적 갈등이 격화되면서 폴리스 존립의 위기를 맞은 아테네를 솔론은 개혁으로 진정시켰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에서 “평민들에게 필요한 힘을 모두 주었다. 그렇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도 유지했다”는 평가를 내린 절묘한 균형점이란 또 한편으로 깨지기 쉽다는 속성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그리스 반도의 폴리스들에서는 정치·경제적 무질서 극복을 위해 강력한 리더십을 확보하는 현실적 대안으로 참주(僭主, tyrannos) 통치가 확산되고 있었다. 오늘날 참주는 ‘독재자’ 또는 ‘폭군으로 번역되나, 고대 그리스에서는 ‘왕’ 바실레우스(Basileus)와 같은 의미였고 B.C. 4세기 플라톤 이후에 바실레우스는 세습적·합법적인 왕을, 티라노스는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획득한 강력한 지배자를 지칭하게 됐다. 다만 기존 귀족정의 질서를 부정하고 평민들의 지지에 힘입은 정변으로 수립된 단일 지도 체제의 특성상, 참주의 능력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 연합뉴스

페이시스트라토스, 솔론의 후원으로 성장

아테네 평민들은 솔론에게 참주가 되기를 요구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10년 동안 외유에 나선다. 떠나기 전 솔론은 귀족과 평민에게 개혁법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조정자가 없어지자 최고 공직인 아르콘 선출을 둘러싸고 당쟁이 재발했다. 심지어 통치자인 아르콘이 없는 상태(anarchia)도 나타났는데 이는 오늘날 무정부주의의 어원이 됐다. 과거 귀족-평민의 구도는 평야파(귀족과 대지주), 해안파(신흥 상공인), 산지파(농촌 빈민과 광산 노동자) 3개 세력의 대립으로 전개됐다.

페이시스트라토스(B.C. 561~528)는 친척인 솔론의 후원 속에서 성장했고, 메가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명성을 얻은 후 솔론과 결별해 과격한 산지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대중심리를 활용하는 정략적 재능이 탁월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는 중앙광장으로 달려가 반대파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선동해 흥분한 평민들로부터 50명의 호위병을 붙이도록 했다. 이후 호위병을 활용한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하지만 5년 후 해안파와 평야파 연합 세력에 축출당하고 망명한다. 이후 해안파와 평야파의 내분을 활용해 귀국하게 되자 또다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아테나 여신과 함께 돌아온다는 소문을 퍼뜨린 후 미모의 소녀를 고용해 아테나 여신상의 갑옷과 무장으로 치장해 함께 전차를 타고 아테네로 입성한다. 빤한 사기극이었지만 운집한 군중은 환호했고, 단숨에 인기를 회복했다.

그러나 반대파들에 밀려 두 번째로 망명하게 되자 낙소스와 사모스의 참주들로부터 빌린 자금으로 병력 1000명을 모아 B.C. 546년 아테네로 진군해 참주정을 수립한다. 그의 통치는 오늘날 입헌군주제에 비유된다. 자신은 초법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기존 체제와 법질서를 유지했고 솔론이 창설한 기구를 존속시켰다. 순회재판제도를 실시해 지방 귀족의 사법적 관행에 제동을 걸었고, 평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참주가 됐지만 평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보다 생업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 종교와 체육, 문화 행사에 주력했다. 학자들로 하여금 호메로스의 시를 편찬케 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읽는 호메로스의 원본이다.

B.C. 7~6세기 다른 폴리스들이 지중해 전역으로 진출할 때 아테네는 내부 혼란으로 여력이 없었으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집권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 활동에 집중하게 되자 올리브유·도자기의 생산과 수출이 급증하면서 흑해 연안으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인근에서 개발한 금광과 은광으로 막대한 수입원까지 확보했다. 늘어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규모 건축 사업도 벌였다. 제우스·아테나를 비롯한 다수의 신전을 조성하고 상수도를 정비했으며, 아크로폴리스 등 공공 건축물도 개·보수했다. 이는 아테네의 번영을 상징하는 한편 자신의 세력 기반인 빈곤한 평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해외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함대를 정비하고 전투력을 강화했지만 신중하게 처신해 전쟁에 휩쓸릴 분쟁에 일절 말려들지 않았고, 흑해 연안에 미리 진출한 다른 폴리스들과 평화를 유지했다.

평민이 생업에 집중토록 종교·문화 행사 주력

그는 권력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권모술수에 능했지만 기본적으로 포용력이 있었고 유능했다. 정적에 대해 관대했고,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도시를 정비했고 법을 준수했다. 문화를 진흥시키고 체육을 장려하면서 빈민을 구제했고 무엇보다 전쟁과 내란에 휘말리지 않았다. 점차 아테네는 일개 변방도시에서 일류 국제도시로 발전했다. 자유가 줄어든 대신 평화와 질서, 경제적 번영을 가져온 그의 20년 치세는 신화적 황금시대로 지칭됐다.

B.C. 528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히피아스가 참주를 승계했으나 축출됐고, 이후 반(反)참주 세력은 스파르타와 연합해 B.C. 510년 참주체제를 전복시킨다. 참주정의 기반이었던 산지파가 무너지자 평야파(부농과 귀족)와 해안파(신흥 상공인)가 각축을 벌였고, 해안파의 지도자 클레이스테네스는 약화된 산지파와 연계해 승리를 거뒀다(B.C. 508년).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의 개혁을 이어받아 평민의 (데모스) 정치 참여를 확대하는 민주정(데모크라시)으로 체제를 변혁했다. 전통적으로 소속 부족-씨족으로 구분하던 행정 체제를 거주지에 따라 재편하는 행정 개혁으로 혈연에 기반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평민 집회인 민회를 강화하고 참주정치의 부활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제(유력자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써서 10년간 국외로 추방)를 도입하는 정치 개혁으로 세계 역사상 최초로 일반 평민이 참여하는 정치 체제를 탄생시켰다.

아테네가 왕정으로 시작돼 귀족정, 금권정, 참주정을 거쳐 민주정으로 변천했던 요인은 대외 교역을 통한 상인 계급의 성장과 대지주였던 귀족 세력의 약화, 경제력 격차 확대에 따른 평민들의 불만과 정치참여 요구 등이었다. 이것들이 어우러져 표출된 사회·정치적 갈등이 유·무혈 혁명과 개혁을 통해 해소되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솔론은 평민의 권리 확대를 통해 폴리스 통합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를 수립했고, 뒤이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정치적 혼란을 진정시키고 평화와 경제적 번영을 가져온 모범적이고 유능한 독재자로서 시대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클레이스테네스는 전(前)세대 솔론의 정치 개혁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평민이 정치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민주정을 수립했다. 강력한 경제력에 높은 수준의 사회적 통합을 이룬 아테네는 이후 B.C. 5세기 페르시아의 두 차례 침공에 맞선 그리스 폴리스 연합군의 전쟁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고대 그리스 세계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