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새벽에도 “내 이긴다”
  • 김현일 대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5.11.30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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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마저 기회로 만든 YS…사람 보는 눈과 기르는 리더십 탁월
1969년 11월8일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출마를 선언하는 김영삼 의원. 그의 나이 42세 때다. 그러나 이듬해 전당대회 결선투표에서 김대중 의원에게 패배했고, 1992년 제14대 대선 승리로 설욕했다. © 연합뉴스

김영삼(YS)·김대중(DJ) 두 전직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이다. 그러나 DJ를 추종하는 동교동계와 오늘의 야당 주류 쪽 얘기는 다르다. DJ만이 진정한 민주화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군사정권과 손잡은 YS는 정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일방적 편견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 즉 3당 합당을 감행한 YS는 ‘호랑이’를 잡았고 군부가 정치를 넘보는 패악을 종식시켰다. 문민 시대를 열었고, 민주화 씨를 퍼뜨렸다. YS는 그의 생애를 일관한 ‘민주주의’에 충실했다. YS가 길을 닦지 않았더라면 DJ 대통령, ‘국민의 정부’도 없었을는지 모른다. 따라서 굳이 따진다면 YS가 반 발짝이나마 앞선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부질없는 알량한 명분·우열 논쟁은 삼가는 게 낫다. 때론 반목하고 때론 경쟁했지만 위기의 상황에선 합심해 한국의 민주화를 정착시킨 큰 지도자로 기록하면 충분하다.

정치인 YS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누구나 예외 없듯 결점도 많았지만 정치인의 최우선 덕목으로 꼽는 결단력·추진력은 엄청났다. 그 곱상한 얼굴에서 어떻게 그런 힘과 열정이 솟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었다. 상황을 읽고 대처하는 능력은 탁월했다. 특히 위기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반전시키는 순발력과 돌파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정치에 관한 한 뛰어난 ‘동물적 감각’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과장이 아니다. 그는 위기를 기회 삼아 대권 고지에 오른 타고난 승부사였다.

열정과 인내, 순발력·돌파력이 대권 가능케

그에게서 좀 더 주목할 대목은 ‘고집’ ‘뚝심’으로 일컬어지는 끈기다. YS는 ‘미래 대통령 김영삼’이란 경남중 3학년 시절의 책상머리 표어를 50여 년이 지난 1992년에 구현해냈다. 1954년 26세 나이로 국회의원 배지를 단 이래 40여 년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 동안 흔들리지 않고 반독재 투쟁이라는 외길을 달려왔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이처럼 무서운 인내심이 결단력·추진력과 상승 작용을 일으켜 대권고지에 이르게 했음 직하다. 청와대의 주인이 되자마자 밀어붙인 하나회숙청과 금융실명제는 그런 캐릭터의 산물일 것이다.

그는 용인(用人)·용병(用兵)술의 대가였다. 꼼꼼하게 따져 사람을 고르고 적소에 배치한 추종자들이 있었기에 장기간의 박해를 견디고 막판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제16대 노무현, 제17대 이명박 대통령은 그가 정치에 입문시킨 인물이다. 지금 새누리당의 쌍벽을 이루는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최고위원은 상도동 직계다. YS의 사람 보는 눈과 ‘그릇’의 크기가 짐작된다. 개각·공천 때의 꼼꼼함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 밖에도 정치인으로서 빼어난 요소는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덕목들의 총화가 되레 사달을 일으키기도 했다. 막판 최대 실책이자 그에 대한 평가를 그르치게 한 외환위기(IMF)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친화력 있는 YS였으나 청와대 주인이 된 뒤로는 예전의 그가 아닌 측면도 컸다. 본인의 강한 개성에다, 갖가지 개혁 추진에 대한 국민적 지지로 YS의 카리스마는 넘쳐났었다. 자연스레 상도동 핵심들조차 범접과 충언이 여의치 않게 됐다. 이런 즈음에 현직 대통령 아들(차남 현철) 구속이라는 헌정 사상 유례없는 사태로 대통령 YS는 충격에 빠졌고 때문에 외환위기라는 경고음이 제대로 발동되지도, 닿지도 않았다. 악재들이 뒤엉켜 IMF 사태라는 국가부도 비극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땅에 ‘민주’라는 가치를 굳건히 뿌리내리게 한 YS는 11월22일 88세로 생애를 마쳤다. 도하 언론은 그의 아호(雅號) 거산(巨山)에 걸맞은 평가를 실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YS에 대한 대접이고, 나아가 현대 한국 정치사를 제대로 읽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게다. 시사저널이 각급 언론들이 잊고 있는, 미처 간파하지 못한 관련 비화를 소개하는 것도 이래서다. 담긴 스토리는 필자가 40년 넘게 YS를 취재하고 교유하면서 직접 경험하거나 확인한 것들이다. 여기엔 ‘정치인 YS’뿐 아니라 ‘인간 YS’에 대한 것들도 다수다. YS와 DJ의 관계나 언론관, 스타일(인사·정책 결정) 등 공적인 영역 외에 돈·말(언어)·운동·식습관 등 사생활 부분이 포함돼 있다. 다만 ‘여자 문제’는 제외했다. 자칫 큰 산 YS의 진면목과 실체를 조망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을 저어해서다. 곁가지로 인해 YS를 폄하하는 결과나 초래할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어떤 위기도 ‘민주’ 확신으로 버텨

신군부가 ‘1980년 서울의 봄’을 끝장내기 위해 행동 개시에 나선 5월17일 밤, 상도동 YS 자택은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집 안에는 YS 내외와 홍인길·장학로 비서, 그리고 방금 전 DJ의 동교동 자택을 빠져나와 달려온 중앙일보 김현일 기자(필자)가 전부였다. 전경들이 집을 에워싸고 있었으나 들이닥치지는 않았다. 수경사 군인들이 짓밟은 동교동과 달랐다. 자정이 막 지났을 때 옥색 한복을 차려입은 YS가 거실에 들어섰다. 기자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하다간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 상황에서 차마 더 이상 묻기가 곤란해서다. 잠시 침묵하던 YS가 던진 말은 “내(가) 이긴다”였다. 기자와 악수를 나눈 YS는 2층 침실로 돌아갔다. 밤이 길 것 같다면서 양손에 들고 왔던 양주 2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이후 YS는 상도동 자택에 연금됐다. 앞마당을 거니는 것 외에 달리 소일거리가 없던 YS는 붓글씨 쓰기로 울분을 달랬다. 그때 쓰고 또 쓴 글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대도무문(大道無門)’이다. YS는 ‘올바른 길에는 거칠 게 없다’는 의미의 대도무문 네 글자를 써 방문객들에게 줬다. 연금 기간에 쓴 글씨는 이전의 글씨와 경지가 다르다.

민주화 투사로서 YS를 상징하는 말은 역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절규다. 1979년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의원에서 제명된 후 외친 ‘새벽’은 그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확실한 구호였다. 5·18새벽의 ‘내 이긴다’는 그 후속편인 셈이다.

YS는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1975년 4월 철학과 학생들이 4·19 기념탑 앞에서 개최한 민주기원제에 초청돼 연설을 했는데 그때의 주제도 ‘독재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였다. ‘무너진다’가 아닌 ‘망한다’였다. 그의 연설들에는 ‘민주’가 ‘신앙’처럼 일관되게 자리하고 있다. 1991년 지방선거 패배로 당 대표 책임론이 제기되자 그는 대선 후보 조기 가시화 요구로 정치지형을일거에 뒤바꿨다. 이런 순발력과 핵심을 찌르는 어법은 특장 중의 특장이다. 2003년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 단식 중단을 종용할때의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는 말처럼 말 같기도, 같지 않기도 한 게 묘한 매력을 더하는 경우가 YS에겐 종종 있었다. 투쟁과 개혁을 줄기차게 외쳤던 YS가 최후에 남긴 말은 화합과 통합이다.

서울 상도동 자택에 연금 중이던 1980년 여름, 자택 거실에서 외신기자회견을 하는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 군사독재에 결코 굴복하지 않겠다고 역설했다. 왼쪽 두 번째는 일본 특파원들 사이에 섞여 잠입한 필자(당시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 시사저널 김현일

“언론은 최후 보루” 애정과 관심 지극

언론에 대한 YS의 애정과 관심은 정말 지극했다. 야당 시절 이원종 공보비서(후일정무수석) 등 가신들에게 늘 ‘기자들과 함께 지내라’고 당부했다. 권위주의 시대 언론의 한계를 알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의지할 마지막 보루는 언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발언을 ‘원문’ 그대로, 가능한한 ‘많이’ 보도해주는 기독교방송(CBS) 기자가 나타나야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 “내일 미국 특사가 온다카이.” 1968년 기자 5명과 술을 마시던 김영삼 신민당 원내총무가 입을 열었다. 북한이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를 납북한 사건과 관련한 얘기였다. 야당 총무가 무얼 아느냐는식의 힐난에 미국 대사에게서 귀띔받은 기밀을 흘린 것이다. 야당 총무지만 알 것은 안다는 존재 과시 노림수였다. YS는 한 신문이 3당 합당 당시 내각제 이면 합의를 보도하자 위약을 이유로 내각제 개헌 자체를 깨버렸는데 언론을 자기 편리한 대로 써먹는 실력은 가히 도사급이다.

#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인 1993년 2월 26일, YS는 청와대 본관 대접견실에서 신임 장관(급) 37명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임명장 수여를 마치고 초대 각료 전원과 기념사진을 찍으러 본관 앞뜰로 향하던 YS는 필자를 발견했다. “와 거기 서 있노?” 하며 반색하는 대통령에게 필자는 “풀 취재왔습니다. 축하드립니다”고 했다. YS의 말이 이어졌다. “어떻노?” 자기가 임명한 장관들 면면이 어떠냐는 YS식 물음이다. “좋은데요. 쬐끔이라도 알려주셨으면 고생을 덜했을 텐데…”라는 말에 YS는 “한 명 한 명에게 통보하면서 새나가면 없던 일로 하자고 다짐을 두지 않았나”(YS는 이상우 서강대 교수의 국가안전기획부장 임명 소식이 밖으로 알려지자 즉각 한국외대 김덕 교수로 교체했다)라며 철통 보안 결과를 흡족해했다. YS의 자랑이 또 이어졌다. “여성 장관 괜찮제?” 필자가 거리를 두며 머뭇거리자 황인성 신임 총리가 자리를 비켜줬다. 대통령과 총리가 나란히 앞서 가면 장관들이 따라가고,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보도용 화면을 촬영하는게 관례였다. 하지만 대통령이 필자의 소매를 잡아끌며 얘기를 계속하는 바람에 총리 위치를 기자가 차지한 채로 현관에 다다랐다. YS의 언론관·보안의식 등이 확연히 드러나는 에피소드다.

고집이 유다른 YS지만 언론 지적이 합당하면 바로 시정했다. 초대 내각 장관 여러 명과 서울시장을 며칠 만에 갈아치우기도 했다. 그가 주저한 것은 딸의 부정 입학시비에 휘말린 박희태 법무부장관 하나다. 이런 YS 자세는 세론에 휘둘리고 영합하는 요즘 포퓰리즘과 다르다. 앞뒤가 분명하면 주저 않고 단안을 내리는 게 YS였다.

#“서청원, 그 사람 괜찮습니다. 더욱이 바로 이 동네 국회의원인데 안아주셔야지 내치면 어쩝니까.” “김 동지가 그렇게 말하니 한 번 만나보지.” 여간해서 고집을 꺾지 않던 YS가 서청원 민한당 의원(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면담을 승낙했다. 1980년 상도동 자택에 연금돼 있던 YS의 민한당에 대한 미움은 군부에 대한 반감 못지않았다. 민정당 2중대, 배신자로 매도하고 있었다. 바로 이웃한 유치송 민한당 총재 집이 문전성시를 이룬 것도 YS의 심기를 더 건드렸다. 이런 YS였기에 서 의원의 대학 후배인 장학로(후일 청와대 제1부속실장) 비서가 면담을 주선하려 했으나 “씰데없이”라는 핀잔만 들었던 참이다. 그래서 서 의원 부탁을 듣고 나선 필자가 설득하자 그제야 문을 열어준 것이다. 핵심 가신 김동영 의원의 비서로부터 보고를 듣고 있던 YS는 필자가 “서청원 의원 왔습니다”고 하자 “어, 그래요” 했다. 긴 말이 필요 없었다. 서 의원은 그 길로 상도동계가 됐다.

#1979년 12월12일 저녁, 모처에서 나오던 YS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YS는 평소 친분 있는 D신문 H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H기자는 상황을 간략히 설명한 후 YS가 방금 나왔다는 B의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고, YS는 당장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B는 YS가 챙겨온 인물이다. YS가 생각하는 기자는 단순히 보도를 하는 ‘기자’ 그 이상의 ‘동지’였다.

현철은 역린…YS도 감당 못해

YS의 차남 현철은 건드리면 죽임을 면키 어렵다는 역린(逆鱗)이었다. 아킬레스건이었다. 때문에 그를 건드렸다간 누구건 온전치 못했다. 박관용 청와대 비서실장(후일 국회의장)이 그의 비위(非違)를 종합, 보고했다가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한 메이저 신문은 칼럼을 통해 소통령 현철의 발호를 지적했다가 홍역을 치렀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언론을 존중해준 YS였지만 현철을 시비한 것은 용서치 않았다.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현철 문제는 묻지말라’는 게 청와대가 출입기자실에 요구한 우선이었다. 비록 으름장이긴 했으나 현철얘기를 꺼낼 바에는 아예 회견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YS 청와대답지 않은 호소가 나올 정도로 금기시(禁忌視)됐다. 말 그대로 현철은 ‘소통령’이었다.

#최형우 의원과 더불어 YS의 최측근인 김동영 정무장관은 YS 집권 1년 전 암으로 사망했다. 김 장관이 숨지기 3개월 전 노태우 대통령이 김 장관을 호출했다. 노 대통령은 완쾌를 빈다는 말과 함께 현철 얘기를 꺼냈다. “YS는 왜 아들 현철이와 정치를 합니까? 잡음도 많고…결국은 YS의 부담으로 돌아올 텐데.” 노 대통령은 YS의 심복인 김 장관에게 마지막 충언을 기대한 것이다. “암 투병 막바지의 김 장관이 나를 불렀다. (대통령과의 만남을 설명한) 김 장관은 현철이를 잘 주시하라고 당부했다. 그 정도로 현철 문제는 심각했다”. 김 장관 보좌관 L씨의 회고다.

현철이 왜 ‘소통령’으로 군림했는지에 대해선 주위의 관측이 일치한다. 정치자금 등 YS의 가장 은밀한 부문을 관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철은 몸이 성치 않은 장남과 달리 부친을 가까이서 도왔다. 정보부의 감시 눈초리가 번득이는 가운데서 가장 내밀한 자금을 담당한 데다 외모마저 자신을 빼닮았기에 YS의 믿음과 기대가 컸다. 조(兆) 단위의 거액을 퍼부은 대선을 치르고 나자 대통령의 아들이자 특등 공신인 현철의 위세는 뻗칠 대로 뻗쳤다. “정·관·재계 인사들이 앞 다퉈 현철에게로 달려갔다. 장차관 임명, 의원 공천을 그가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현철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장됐다. 돈과 정보가 덩달아 집중됐다. 안기부 핵심 간부는 대통령에게 보고되기 전의 중요 정보를 현철에게 알렸고, 안기부 보고를 받은 후 대통령은 현철의 혜안과 능력에 감탄했다. 그러니 현철을 비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박관용 실장이 날아가는 판이니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당시 관계자들의 진단은 한결같다.

“YS께서 엊그제 서거하셨는데 그 원인(遠因)은 현철 구속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게 맞다. 영부인 손명순 여사는 울고불고하며 대통령을 원망했다. 청와대 수석이 검찰총장에게 ‘각하께서 울고 계시다’고 했었는데 YS의 쇼크가 어떠했을까는 짐작이 가지 않나. 무너졌다고 하는 게 적확할 것이다. 자부심으로 똘똘뭉친 거물이 손가락질을 받으며 쫓기듯 청와대를 떠나는 심정이 어땠겠는가.” YS 상가에서 상도동 가신이 토로한 푸념이다.

“퇴임 몇 개월 후 칩거하다시피 한 YS가 오랜만에 경호원 2명을 포함, 7~8명을 대동하고 등산을 갔다. 이때 마주친 등산객 5명이 ‘당신 아무개 아니냐. 나라를 거덜내고 무슨 낯으로 산에 오느냐’며 대들었다. 경호원들이 가까스로 제지해 그 이상의 상황은 없었지만 YS는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였다. 퇴임 후 16년 동안 겉으론 멀쩡한 듯했지만 속은 멍들었던 어른이다.” 역시 상도동계 측근의 아픈 회고다. 그는 필자가 2013년 1월2일 새해 인사차 들렀을 때 YS와 팔씨름을 했는데 힘이 대단하시더라는 말에 “문제는 속병”이라고 대꾸했다.<YS는 매년 정월 초하루 다음 날 옛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오찬을 함께 해왔다. YS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감사 기도를 주관했고 기력이 넘치신다는 필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팔씨름을 하자고 제의했었다. 팔씨름을 이긴 YS는 자신이 등산·배드민턴 뿐 아니라 예전에는 권투와 수영선수였다며 노익장을 과시했다. 우리 맹순(손명순 여사)이가 몸이 불편해 이 자리에 못 나왔다면서 맹순에게 아침저녁으로 ‘충~성~’하고 거수경례를 한다며 껄껄 웃었다.>

어떤 이는 YS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돈’이라고 단언한다. 비록 야당 생활을 했을지라도 불가불 적잖은 돈(정치자금)을 만지기 마련인데 YS는 개인 주머니에 넣지 않았고, 들어온 돈보다 더 지출했다는 것이다.

“YS가 정치자금에 관한 한 나름의 평가를 받는 점은 수긍이 간다. 기업에 손을 벌리는 일이 없었음은 대개가 인정한다. 하지만 YS 개인이 깨끗하다고 해서 문제가 그치는 것은 아니다. ‘대신’해서 돈을 받을 주변 권력은 있기 마련임에도 YS는 크게 착각했다.” 결국 YS 개인에게는 아닐지라도 들어갈 돈은 다 흘러들어갔다는 원로 정객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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