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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화폐, 금융의 국경을 무너뜨리다

기존의 화폐 시장 전자 기반으로 재편 중 / “변동성 심해 발전 가능성 없다” 비관론도

김경민 기자 ㅣ kkim@sisapress.com | 승인 2015.12.02(Wed) 17:17:54 | 13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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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자널 포토

스페인을 여행 중인 미국인 제닌 슈나워(32)는 여행 마지막 날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다. 그는 오빠 켄트릭이 살고 있는 한국에서 보름간 여행을 할 예정이었다. 바르셀로나 시내에서 마지막 일정을 마친 제닌은 공항에 가기 위해 택시 정거장에 갔다. 택시를 잡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갑을 열어보니 역시 현금이 다 떨어졌다. ‘100유로 정도만 있으면 좋겠는데.’

마침 눈앞에 비트코인(Bitcoin·P2P 방식의 가상화폐) 현금자동입출금기(ATM)가 보였다. 스페인은 캐나다나 미국만큼 비트코인 거래가 활성화돼 있지는 않지만 마드리드·바르셀로나 등 일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비트코인 ATM이 설치돼 있다.

제닌은 비트코인 ATM에 자신의 비트코인 월렛(전자지갑) 코드를 입력했다. 코인 잔액은 고작 0.02BTC(비트코인 화폐단위). 유로화로 6.27유로 정도다. 공항까진 16㎞. 택시비로는 부족한 잔액이다. 제닌은 모바일메신저 텔레그램을 통해 오빠 켄트릭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켄트릭, 나0.5BTC만 보내줄래? 돌아가서 갚을게.’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켄트릭은 동생 제닌의 메시지를 받고 자신의 스마트폰 속 비트코인 거래 앱을 실행했다. 현재 비트코인 시세를 보니 1BTC당 38만9000원. 0.5BTC면 19만4500원이다. 그는 ‘비트코인 구매’를 눌렀다. 0.5BTC가 곧 그의 비트코인 월렛으로 들어왔다. 그는 ‘비트코인 송금’ 창에 전자 코드 형식으로 나오는 제닌의 월렛주소를 입력해 비트코인을 전송했다.

‘띠링~.’ 바르셀로나의 비트코인 ATM 앞에 서 있는 제닌의 스마트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켄트릭이 보낸 비트코인이 도착했다는 신호였다. 제닌은 ATM에 자신의 전자지갑 코드를 입력했다. 오늘의 EUR-비트코인 판매 시세는 1BTC당 313.84유로. 0.5BTC면 156.92유로였다. ‘비트코인 판매’ 버튼을 누르고 전액을 선택했다. 인출기로 출금 수수료 4.7유로를 제한 152.22유로가 나왔다. ‘ATM이라 수수료가 좀 세네. 그래도 달러화를 직접 유로화로 바꾸려면 훨씬 번거롭고 수수료도 많이 나오는데 그것보단 낫지.’ 한국에 있는 켄트릭의 원화가 비트코인으로 전환돼 스페인에 있는 제닌에게 현금 152유로로 들어가기까지 걸린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가상화폐, 시가총액 5조5000억원

“미래의 아이들은 지폐가 뭔지 모를 것이다.” 팀 쿡 애플 CEO(최고경영자)가 지난 11월11일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칼리지에서 만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래의 금융 거래는 오직 숫자에 의해서만 이뤄질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비록 팀 쿡의 이날 발언은 애플의 모바일 간편 결제 서비스 애플페이를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는 미래 금융환경에 대한 의미심장한 예측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지폐를 기반으로 한 기존의 화폐 시장이 오로지 숫자만 남는 전자 기반으로 재편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그리고 이런 전망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비트코인은 운영자가 없는 가상화폐다. 각국 중앙은행이 화폐 발행권을 독점하며 통화량과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것과 달리, 비트코인은 화폐를 발행하는 운영 주체가 없다. 중앙 서버 없이 개별 주체들끼리 화폐를 주고받을 수 있는 P2P 방식이다.

비트코인은 ‘발행’ 대신 ‘채굴(min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네트워크 사용자들이 각자 컴퓨터를 이용해 한 개의 비트코인 ‘블록(block)’에 할당된 수학 문제를 풀고, 이 문제가 풀리면 해당 네트워크에 참여했던 모든 사용자에게 1BTC가 지급되는 방식이다.

2009년 1월3일 첫 블록 채굴이 이뤄진 이래 지금까지 채굴된 비트코인은 1488만 4625BTC(11월26일 오후 3시 기준. 비트코인 가격은 채굴량과 네트워크 참가자 수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기사에서 언급되는 비트코인 가격은 모두 이 시간을 기준으로 산정했다)이다. 1BTC의 원화 가치를 381만원(332.28달러)으로 뒀을 때 지금까지 채굴된 비트코인은 56조7104억 2125만원에 달하는 셈이다. 11월26일 현재 비트코인의 시가총액은 약 5조6800억원(약 49억 4356만 달러)에 달하며, 시간당 평균 매매거래량은 6620BTC, 즉 252억2220만여 원에 달한다.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는 국경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외환 송금을 하는 데 드는 수수료가 제로에 가깝다. 때문에 직업 특성상 해외 이동이 잦거나 해외 소액 거래가 필요한 사용자들이 결제수단으로 애용하고 있다. 현재 아마존·이베이·익스피디아·애플앱스토어 등 세계적인 온라인 쇼핑몰에서 비트코인을 사용해 결제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을 포함해 미국, 중국, 유럽, 일본, 호주 등 전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다.

비트코인 가능케 한 기반 기술 ‘블록체인’

비트코인은 ‘블록체인(blockchain)’ 기술을 적용한 최초의 화폐다. 블록체인은 일종의 P2P 방식의 공공거래장부 기술이다. 전 세계 비트코인 사용자들이 비트코인으로 거래한 모든 내역을 기록해둔 거래장부 역할을 한다. 블록체인에는 거래 대상의 개인정보는 기록되지 않지만 거래를 주고받은 가상 계좌 주소와 거래 일시가 발생 즉시 기록되며, 네트워크에 참가한 모든 사용자에게 해당 거래 내역이 전송된다. 특정 가상계좌의 모든 거래 내역을 누구나 쉽게 조회할 수도 있다.

블록체인의 강점은 거래 기록의 위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한국비트코인거래소 코빗의 김진화 이사는 “기존 서버 중심의 중앙 집중 관리형이 아닌 분권형 네트워크 시스템이기 때문에 해당 가상화폐 네트워크에 참가하는 모든 사용자에게 전송된 거래장부를 동시에 조작하지 않는 이상, 위조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다” 고 설명했다. 또한 블록체인의 분권형 시스템은 데이터 전송 속도를 높이고 시스템 관리비용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다.

“가상화폐의 핵심은 지금의 비트코인을 가능케 한 기반 기술, 바로 블록체인이다.” 가천대 전성민 교수(글로벌경영학)는 “현존하는 가상화폐는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며 “블록체인이 미래 금융 거래의 판도를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월드 테크놀로지 어워드의 IT소프트웨어 부문 수상자였던 스무 살 청년 비탈릭 부테린은 전 세계 IT업계가 이 기술에 대해 품은 기대감을 보여준다. 비트코인 매거진 창업자이자 해커인 그는 블록체인을 응용한 애플리케이션 ‘에테리움’을 개발해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를 제치고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 9월15일 골드만삭스·JP모건 등 9개 글로벌 투자은행은 블록체인 기술을 금융서비스 분야에 확대 적용하기 위한 공동표준을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R3’란 이름의 이 은행 연합체는 이후 22개 은행으로 확대되며,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와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한 증권·파생상품 개발 작업을 본격화했다.

국내 은행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KB금융그룹이 블록체인 시스템 활용을 검토 중이며, 비트코인 거래소 코인플러그에 15억원을 투자했다. 신한은행은 블록체인을 활용한 외환 송금 시스템을 개발하는 스타트업 스트리미와 협업 중이다. NH농협은행은 비트코인 거래소 코빗과 제휴를 맺었고, KEB하나은행은 핀테크기업육성센터 ‘원큐랩’에 블록체인 플랫폼을 구축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이 금융업에 본격 도입된다면 기존의 통화 서비스와 지급 결제 시스템에 한 차례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란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LG경제연구원 김건우 선임연구원은 “현재 국내 금융기관들이 도입하는 블록체인 기술은 기존의 결제시스템을 효율화하는 보완적 차원”이라며 “금융질서가 뒤집히는 변화까지는 나타나지 않겠지만 장기적으로 비트코인과 같은공공재 성격이 강한 가상화폐가 상용화된다면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2013년 뉴욕타임스에 ‘비트코인은 유해하다(Bitcoin Is Evil)’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이 칼럼에서 “비트코인은 변동성이 심해 화폐로서의 발전 가능성이 없다”며 비트코인을 포한한 가상화폐의 비관적 미래를 전망했다.

가상화폐의 미래를 두고 업계의 의견은 분분하다. 가상화폐로 인해 전통적인 화폐경제가 사라질 것이라는 낙관론과 가상화폐가 결코 실물경제를 주도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첨예하게 갈리는 양상이다.

비관론을 뒷받침하는 가장 주된 근거는 가상화폐가 가지고 있는 높은 투기성과 디플레이션 가능성이다. 비트코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모든 가상화폐는 채굴 총량이 정해져 있다. 비트코인의 총량은 약 2100만 BTC로, 코인 공급량은 매 4년마다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한다. 공급량이 그 목표에 다다르면 생산량이 ‘제로(0)’가 되면서 가격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이 경우 화폐 가치는 상승한다. 한때 1BTC당 1200달러를 넘었던 비트코인의 가치는 주요 국가의 가상화폐 관련 정책에 따라 200~400달러대로 내려앉기도 했다. 국내외 가상화폐 전문가들은 “이런 불안정성을 극복해야 실질적으로 화폐의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투기성·음성 거래 악용 가능성 해결해야

철저한 익명성을 보장하는 가상화폐가 음성 거래에 악용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비트코인과 같은 가상화폐는 거래코드와 시간만 장부에 남는다. 실제로 ‘실크로드’ 등 유명 온라인 마약 거래 사이트에서 결제 수단으로 비트코인을 사용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PC 내 각종 파일을 암호화하거나 스마트폰을 잠궈버리는 ‘랜섬웨어’ 해커들이 피해자들에게 해독 코드를 받는 대가로 50만~60만원 상당의 비트코인을 지불할 것을 요구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경찰청 관계자는 “비트코인을 사용하더라도 추적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며 “전 세계 경찰수사국들이 비트코인을 사용한 범죄 가능성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가상 화폐 거래가 확산된 후 대규모 피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 가상화폐 거래 관련법이 없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김건우 선임연구원은 “기존의 법을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새로운 시장”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이 같은 시장상황을 반영하기 위해 전자등록만으로 증권을 발행·유통할 수 있게 하는 ‘주식·사채 등의 전자등록에 관한 법률안(전자증권법)’이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비관론이든 낙관론이든 가상화폐가 앞으로의 화폐경제 지형을 크게 바꿀 것이라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새로운 화폐질서가 우리 경제생활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지, 부정적 미래를 불러올지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결론이 날 것이다. 전성민 교수는 “가상화폐 거래소의 보안·도덕성 문제 등 가상화폐를 기반으로 한 금융시스템이 자리 잡기 위해 선행돼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며 “현재는 전혀 규제가 없지만 가상화폐 시장이 커지면 금융 당국의 규제가 강화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점점 더 빠르고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화폐 시장이 규제에 발목 잡힌다면 우리나라가 가상화폐 주도권 싸움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선제적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베일에 싸인 비트코인 개발자 ‘사토시 나카모토’

비트코인의 대표 이미지. 실제로 이런 화폐가 통용되진 않는다. 비트코인은 가상화폐로서 전자 코드로만 존재한다. © DPA 연합

비트코인은 인터넷상에서 발행 기관의 통제 없이 이용자들 사이에 익명으로 P2P 거래가 이뤄진다.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의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만든 가상화폐다. 그가 2008년 발표한 논문을 통해 주장한 가상화폐 시스템 가설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금융 거래에서 기존처럼 중앙은행을 통하지 않고서도 온라인상으로 즉각적인 거래가 가능하며, 이로써 수수료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비트코인 작동 방식은 오픈소스로 공개됐다. 때문에 누구든지 비트코인 채굴·거래 애
플리케이션 및 비트코인 월렛 등 관련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누구인지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사람 이름인지, 집단 이름인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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