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 입대하겠다!”
  • 최정민│프랑스 통신원 (.)
  • 승인 2015.12.03 21:09
  • 호수 136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랑스, ‘파리 테러’ 이후 신병지원센터에 문의 폭주

 

검은 금요일. 2015년 11월13일은 프랑스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의 날이 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 본토에서 벌어진 자살 테러와 총격으로 13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파리는 여전히 그날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축구, 콘서트, 카페에서의 맥주 한잔’. 프랑스인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즐기던 것들에 테러의 상처가 배어들었다. 사건 일주일 후인 11월20일 저녁, 테러 발생 시각이었던 오후 9시20분, 레퓌블리크(공화국) 광장에서는 군중들이 인간 띠를 만들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정됐던 추모제는 안전 문제로 취소됐다. 시위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파리 지역엔 여전히 집회나 군중들의 운집이 금지돼 있다. 프랑스의 모든 유아학교와 초등학교에서는 등하교 시 학부모조차도 교내 출입이 통제됐다. 중등학교 이상은 가방 검사와 대피 훈련을 내용으로 한 교육부장관령의 보안 시스템을 공고했다. 거리의 군과 경찰은 익숙한 풍경이 됐고, 노트르담 성당과 에펠탑과 같은 파리의 주요 관광지뿐만 아니라, 톨루즈의 생세르낭 성당을 비롯해 리옹, 보르도 등 거의 모든 대도시에 군 병력이 배치됐다.

프랑스 군인들이 11월22일(현지 시각) 파리 노트르담 성당을 순찰하고 있다. ⓒ AP 연합

우파 “군 복무제 전면 부활시켜야”

이러한 변화를 두고 11월24일 프랑스 민영 카날 플뤼스의 ‘르 프티 주르날’에 출연한 마뉘엘 발스 총리는 “새로운 국면에 직면했다”고 말하며  “테러의 위협과 공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강화된 안보 인력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불안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다. 11월19일 프랑스  무료 일간 ‘20미뉴트’는 테러 이후 불안과 불면증을 호소하는 파리 시민이 늘어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일간지 ‘르 피가로’의 보도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가 테러 직후 설치한 전화신고센터에는 11월23일까지 열흘 동안 무려 1만3240통 이상의 신고 및 증언이 접수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안보에 대한 불안과 새로운 테러의 가능성으로 군 복무를 부활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우파 공화당의 자비에 베르트랑 전 노동장관과 중도 우파의 에르베 모랑 전 국방장관은 14년 전에 폐지된 군 복무제를 전면 부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군 인력 감축에 대한 계획을 모두 백지화했지만 군 복무 문제까지 언급하진 않았다. 한편 정치권의 논란과는 별개로 파리에 위치한 뱅센 연대의 신병지원센터에는 지원 문의전화가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에릭 드 라프레슬 연대장은 “하루 평균 200건 정도였던 문의가 테러가 일어난 주말에 하루 평균 1500건으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이번 파리 테러는 프랑스 역사상 초유의 사태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예견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극단주의자가 돼 시리아로 떠난 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 출간됐는가 하면, 11월23일에는 테러와 관련된 영화 두 편이 개봉돼 눈길을 끌었다. 극단주의자들이 파리에서 테러를 저지른다는 내용과 시리아로 떠난 딸을 찾는다는 내용이다. 이번 테러와의 유사성 때문에 개봉 여부를 두고 진통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돼도 관객의 발길을 모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현재 파리 지역을 비롯한 프랑스의 극장과 공연장은 테러에 직격탄을 맞은 상황이다. 11월24일 공연업계는 정부 측에 지금까지의 경제적 타격과 앞으로의 상황을 고려해  5000만 유로의 자금 지원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관객은 감소한 반면, 보안 요원들은 확충해야 하는 이중고에 처해 있다며 지원을 호소한 것이다. 이미 이번 테러 발생 직후 프랑스 문화부는 장관령(令)으로 400만 유로를 지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마크롱 장관 “프랑스의 경직성·폐쇄성이 원인”

비단 공연업계뿐만이 아니다. 파리 호텔의 경우 테러 직후 57%에 이르는 해약률을 보이고 있으며, 대표적인 겨울 행사로 매년 20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스트라스부르의 ‘성탄 장터’는 테러 직후 취소가 논의됐으나, 예정대로 개최하되 기존 일정보다 축소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리옹의 ‘빛 축제’는 테러 직후 취소가 결정됐다.

11월25일 프랑스 재경부의 에마뉘엘 마크롱 장관은 파리 라데팡스 지역의 대형 쇼핑몰을 직접 방문했다. 라데팡스 지역에 추가 테러 계획이 있었다는 수사 결과가 발표된 다음 날 직접 라데팡스를 찾은 것이다. 안전에 대한 불안과 경기에 대한 우려를 동시에 잠식시키려는 행보였다.

한편 마크롱 장관은 ‘경기 살리기’뿐만 아니라 이번 테러의 원인에 대해 프랑스 사회의 책임론을 거론하며, 프랑스 사회의 경직성과 폐쇄성이 이번 참사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는 12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는 프랑스 정계는 이전의 선거전 모드로 다시 돌아서는 분위기다. 전대미문의 테러로 좌우를 불문하고 모든 정당 대표 주자들은 일제히 선거운동을 중단했었다. 재개된 선거운동에서 우파 공화당은 테러에 대한 정부 비판은 자제하고 경제에 집중하기로 당론을 모은 반면, 이번 테러로 확실한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극우 정당인 국민전선은 표정 관리를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마린 르펜 당수는 11월15일 엘리제궁에서 올랑드 대통령과 회동을 갖기도 했다.

역사상 최저를 기록하던 올랑드 대통령의 지지율은 테러 직후 7~9% 급반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랑드 대통령의 강경한 방침에 대해 비판 여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벨기에의 소설가인 데이비드 반 레이브룩은 ‘올랑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부시와 같은 실책을 저지르지 말 것”을 당부하며, “국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전 세계를 위험에 빠트리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는 “호전적인 행동은 두려움의 표현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넷 언론 미디어파트의 블로거인 이브 트리폰은 ‘당신의 전쟁,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글을 통해  올랑드 행정부의 대응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11월22일 벨기에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있다. ⓒ AP 연합
파리를 덮친 테러의 광풍(狂風)은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 건너갔다. 유럽연합(EU)의 행정수도임을 자임해온 브뤼셀이 유령도시가 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이번 파리 테러로 인해 브뤼셀은 유럽 대륙의 ‘지하디스트(성전주의자)의 사관학교’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요원이 부족하다.”  북유럽 이야기가 아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벨기에 이야기다. 벨기에의 네덜란드어권 일간지인 ‘데 로므헨’은 이런 상황이 테러리스트들이 몰렌베이크를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라고 보도했다.

행정적 구조를 들여다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브뤼셀의 경우 19개의 지방자치체로 구성돼 있고, 경찰 담당 구역은 여섯 개 구역으로 나뉜다. 안전 문제 전문가이자 지난 정부에서 정책자문이었던 브라이스 더 뤼버는 “대(對)테러 작전이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벨기에 사회당 SPA 소속 한스 본트 의원은 “브뤼셀은 안전 문제에서는 조직화된 카오스(혼돈)의 전형적인 예”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파리 테러와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선 여섯 개 경찰 구역의 통폐합을 통해 5000명의 경찰 인력이 한 몸이 돼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브뤼셀의 행정 시스템이 복잡한 것은 단순한 도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벨기에 자체가 두 지역과 세 개의 언어로 복잡하게 나뉜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연합정부가 필수 불가결한 정치 시스템으로 늘 혼란과 공백을 겪어왔다. 2011년의 경우 무려 220일 이상 내각이 구성되지 않아 브뤼셀 시민 2만여 명이 시위를 벌여야 할 정도였다.

브뤼셀과 벨기에의 오명에 대해 벨기에 정부의 고위층이 전 방위적으로 해명에 나섰다. 디디에 렌더스 벨기에 외무장관은 11월25일 프랑스 민영 방송 카날 플뤼스에 출연해 “테러리스트들은 프랑스  국적자였다”고 반박하며 “2014년 브뤼셀의 유대 박물관 총격 테러 직후 즉각적으로 프랑스와 공조가 이뤄졌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극단주의자들을 양산한 것은 정부의 실패라고 ‘인정’하며 “이것은 단순한 보안의 실패가 아니다. 교육·취업 등의 문제를 풀지 못해 몰렌베이크가 게토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차후로도 적극적인 공조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번 테러리스트들이 몰렌베이크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밝혀지자 프랑스의 정치 칼럼니스트인 에릭 제무르는 “(IS(이슬람국가)의 수도 격인 시리아) 라카를 폭격할 것이 아니라 몰렌베이크를 폭격해야 한다”고 발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벨기에 내각이 모두 자신감에 차 있는 것은 아니다. 쿤 겐스 법무장관은 “브뤼셀에는 미확인된 외국인이 너무나 많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아랍어를 할 줄 아는 요원이 부족하다는 비판에 대해선 이미 지난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태 직후 14명의 요원을 채용했으며 11월에 34명의 추가 인력을 충원한 상태라고 밝혔다.

벨기에 정부와 브뤼셀 시는 테러 위협이 감지된 11월20일 가장 확실한 대응에 나섰다. 학교는 물론 지하철까지 모두 폐쇄한 것이다. 무려 4일 동안 이어진 경계 상황으로 벨기에 브뤼셀은 유령의 도시가 됐다. 프랑스 경기가 테러로 된서리를 맞았다면 브뤼셀엔 빙하기가 찾아온 셈이었다. 중심 광장인 그랑 플라스엔 주말 내내 군·경과 방송기자만이 눈에 띄었다. 프랑스 마르세유 출신으로 브뤼셀에서 11년째 식당을 경영하는 세드릭 위트윌러는 프랑스 방송2와의 인터뷰에서 “광장에 사람이 없는 것은 11년 만에 처음 보는 모습”이라며 “낯설다”고 말했다. 테러 이후 열흘간 브뤼셀은 75%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고 프랑스2는 분석했다.

최고 수준의 경보는 11월25일을 기점으로 해제되기 시작했다. 지하철은 운행을 재개했으며 학교들도 문을 열었다. 테러의 위험이 감소했다기보다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취해진 조치였다. 같은 날 튀니지에서는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유럽을 강타한 테러의 공포가 북아프리카로 건너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