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없이 ‘민주’ 간판만으론 못 버틴다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12.17 18:21
  • 호수 1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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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와 ‘민주’로 갈라설 위기의 제1야당…봉합돼도 제대로 굴러갈지 의문

 

한국의 야당사(野黨史)는 반목과 분열의 흔적이다. 찢어졌다가 뭉치고, 다시 싸우는 이합집산(離合集散)과 대립을 거듭했다. 그리고 이들 배경엔 헤게모니 장악이 자리하고 있다. 대권 후보 자리, 공천권 확보를 위한 세 다툼 때문이었다. 1966년 한일협정을 둘러싼 민중당과 신한당의 선명성 경쟁이나 1985년 내각제 개헌 수용을 놓고 다툰 신한민주당과 통일민주당 간의 이념·정책 대결의 경우도 없지 않으나, 이 역시 바탕엔 헤게모니 차지가 깔려 있었다. 온갖 명분을 둘러대고 분칠을 해도 본질은 감춰질 수 없다. 김영삼(YS)·김대중(DJ) 대통령의 집권으로 부정적 인식이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반목과 분열이라는 근본적 평가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여당과 합당해 ‘호랑이를 잡은’ YS나 대선 낙방과 정계 은퇴·복귀를 반복하며 4수(修) 신화를 이룬 DJ는 반목과 분열을 정당화하는 측면마저 없지 않다. 당장의 명분 훼손보다는 실리가 앞선다는, 욕을 먹더라도 버티는 게 낫다는 교훈을 강하게 새겨서다.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안철수·박지원 의원(오른쪽부터). 대립 중인 요즘은 상종 자체를 않기 때문에 서로 외면하는 장면조차 볼 수 없다. ⓒ 연합뉴스

‘민주’ 하나로 연명해온 야당은 한계

반목과 분열상은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숨 가쁘다. 정치 기상도를 바꾼 사례들만으로도 기록은 넘쳐난다. 정계에 복귀, 1987년 YS가 이민우의 신한민주당과 결별하고 차린 통일민주당의 고문이 된 DJ는 평화민주당을 차려 분가(分家)했다. 자신으로의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 대선에서 떨어진 DJ는 1992년 이기택 총재의 ‘꼬마 민주당’과 합당한 민주당 후보로 대선에 도전했다가 낙방하고 정계 은퇴 선언을 했다. 그러나 이내 복귀, 서울시장 당선 등 지방선거 승리로 잘나가던 민주당 내 동교동계 의원 전원을 탈당시킨 후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1995년)했다. 가깝게는 임박한 총선 공천권을 행사하고 1997년 대선 발판을 다지려는 계산이었다. DJ의 분당(分黨) 구상들은 대개가 맞아떨어졌었다. 1987년 대선에선 실패했지만 1988년 총선에서 YS의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등극했으며, 1995년 민주당을 버리고 나온 다음 해 총선에서 그의 새정치국민회의는 제1야당이 됐다. 1973년 양일동 의원이 제1야당 신민당을 박차고 나와 통일당(민주통일당)을 차렸다가 실패한 경우 등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확을 올렸다. 역시 DJ요, YS였다. DJ나 YS 이외의 무수한 딴살림 시도가 무위에 그친 것은 양당 체제로 굳어진 정치 지형을 깨뜨릴 파괴력이 부족했던 탓이다.

새누리당 전신인 신한국당이나 한나라당의 야당 시절도 예외는 아니다. 이회창 총재가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중진 물갈이’를 감행했을 때 반발하고 튀어나온 ‘킹메이커’ 김윤환 의원은 이기택·이수성·조순·김광일·신상우 등 내로라하는 거물들과 민주국민당을 만들어 도전했으나 자신을 포함해 거의 전원이 몰사하는 참담한 지경에 몰렸다. 훗날 국무총리가 된 한승수 의원 1명 외에 전국구 1석을 건진 게 전부였다. 민국당에 박찬종 전 의원과 재야운동가 장기표, 새천년민주당 탈당파 김상현 전 의원 등 쟁쟁한 중진이 가세했었음에도 그랬다(민국당은 17대 총선에선 단 1명의 당선자를 못 내 등록 취소). 2년 후 ‘박근혜 의원(현 대통령)’은 당 총재와 대통령 후보를 분리하자는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기도 했다(그해 지방선거에서 참패 후 한나라당에 흡수).

분당이 야당가의 전유물은 아니다. 하지만 본가(本家)의 보복 등 구심력이 강한 여권에서는 간단치 않다. 2008년 18대 총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계열의 공천 학살에 분개해 이탈한 친박연대나 ‘친박 무소속 연대’는 대표적 사례다. 당시 128명 현역의원 중 50명이 탈락했고 그 대부분이 친박계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대목은 39%의 교체율(16대 31%, 17대 36%)보다 이 난리 통에도 ‘박근혜 의원’이 당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친박연대를 주도한 서청원 의원(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감옥에 간 것은 우연이 아닌데 공천 헌금이 문제라지만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없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창당은 다르다. 새천년민주당 후보로서 청와대 주인이 된 노 대통령의 탈당 및 ‘친노 중심’의 열우당 창당은 그가 현직이었기에 당장의 ‘큰 탈’은 없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그 ‘업보’로 호남권의 미움을 샀고,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호남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비노 진영의 일제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반목과 분열이라는 공식을 확인이라도 하듯 제1야당 새정련이 분당을 향해 질주하는 모양새다. 많은 정치 전문가의 관측처럼 문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친노 그룹은 ‘분당은 자멸’이라는 경험칙, 그래서 비주류가 악다구니를 쓰지만 결국은 주저앉으리라 계산했는데 이게 빗나갔다. 최대 변수인 안철수 의원이 예전처럼 ‘간만 보다가’ 물러날 것이라는 판단도 어긋났다. 의원들이 금배지 향방에 결정적인 공천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린다는 점을 간과한 것도 오판을 키웠다. ‘물갈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명하기 때문에 비주류 중진, 호남 출신 의원들이 총궐기 중이다. 19대 총선 때 친노 한명숙 대표가 휘두른 시퍼런 공천 칼날이 되살아날 수 있음을 절감해서다. 안 의원에게 DJ나 YS와 같은 독자적 파괴력은 없다. 두 사람 같은 카리스마는 고사하고 리더십도 턱없이 달린다. 그러나 공천 위기를 느끼는 다수의 호남권과 중진 의원들의 탈당을 결행케 하는 기폭제로서의 저력은 보유하고 있다.

여당 접촉하는 야당 의원도 생겨

문 대표나 안 의원 각기 무슨 말을 해도 설득력이 없는 것은 결국 ‘밥그릇(공천권) 뺏기’라는 의구심이 상호간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또 이처럼 인신공격성 공방도 마다않다보니 감정의 골만 깊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총선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있기 때문에 어찌어찌 봉합되리라는 예측과 함께 문대표가 결국 양보하리란 전망도 있다. 거듭된 ‘간보기’ 중도하차로 우스개가 된 안 의원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큰 이유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여권에 ‘의탁’ 가능성을 타진하는 의원들도 나타나고 있다. C·L 의원 등은 여권 핵심과 접촉, 둥지를 옮길 경우 공천을 보장할 것인지를 물은 것으로 알려진다. 여권 고위층에서는 자칫 정치공작이라는 오해나 살지 모른다며 전면 중지를 지시했다는 후문인데, 총선을 앞둔 즈음의 이런 움직임은 비단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철새’라는 비판까지 감내할 만큼 공천은 그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다. 지난 19대 총선 당시에도 여당으로의 이적을 숙고한 의원은 여럿이었다. 아무튼 서로 지지 않겠다고 막판까지 치닫는 유치한 치킨게임 국면이어서 장담은 금물이지만 분명한 몇 가지가 있다. 그중 첫째는 설령 ‘문·안’ 두 사람이 권한을 반반씩 행사하는 ‘공동선대위원장’ 절충이 이뤄져 당내분이 봉합되더라도 당이 제대로 굴러갈지는 미지수라는 점이다. 상대에 대한 불신이 원체 크기 때문이다.

안 의원 등의 탈당 가능성이 가시화되면서 우선 나온 게 당명에서 ‘새정치’ 삭제다. 이는 단순한 간판 바꿔달기가 아니라 그 상징성 때문일 터다. 안 의원 없이도 내 길을 가겠다는 의지천명인 셈이다. ‘새정치’를 정당 이름에 처음 도입한 이는 ‘DJ 총재’인데 오늘의 새정치민주연합에 ‘새정치’가 붙은 것은 안 의원의 합당 시 요구에 따른 것이다. 안 의원은 구태의연한 기성 정당과 합치는 선택의 합리화, 즉 명분 축적을 위해 ‘새정치’를 강력히 주장했었다. ‘새정치’는 그의 혁신 주창과 동의어인 것이다.

따라서 분당으로 귀결된다면 기존의 새정치민주연합은 ‘민주당’, ‘신당’은 ‘새정치~’로 낙착될 소지가 농후하다. 구태가 상대적으로 많은 호남의 중진들에게 ‘새정치’는 다소 어색하지만 ‘새정치’의 연원이 DJ라는 측면에서 매우 현실적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상가에서 마주한 권노갑 전 의원(오른쪽 가운데) 등 동교동계와 김수한 전 국회의장(맞은편) 등 상도동계 주역들. 이들이 무대 뒤로 물러나면서 ‘민주’만으로도 인정받고 행세하던 시절은 끝났다. ⓒ 시사저널 포토

사실 ‘민주(民主)’만큼 야당에 절실한 단어는 없다. 칭찬받을 구석이 별로 없음에도 ‘민주’ 하나로 표를 얻고, 연명해온 감마저 없지 않다. 정치를 하려는 분들의 간판에 빠지지 않는 게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헤어졌다가 다시 뭉칠 때도 ‘민주’를 빼먹지 않았다. 사실 그 뛰어난 의미 때문인지 민주를 붙이는 데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1961년 쿠데타로 국가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PP)의 공화당 이래 전두환 정부의 민정당, 1991년 합당으로 태동한 민자당에 이르기까지 군 출신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30년 집권 정당들의 풀네임에는 민주가 들어 있다.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이다. 이 밖에도 노동자 정당으로 헌정 사상 처음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했던 민노당이나 김종필(JP)의 자민련(자유민주연합)에도 ‘민주’가 있고, 기타 군소 정당들에도 ‘민주’는 감초처럼 달려 있다.

이런 게 엄연함에도 ‘민주’는 역시 ‘정통 야당’의 후예임을 자랑하는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의 몫으로 치부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념이나 정책, 구성원 등이 원래의 ‘민주’와는 상관없어도 그렇다. ‘민주’와 ‘야당’을 동일 개념화하는 경향은 오랜 기간 집권 세력과 싸워온 이들이 ‘민주’라는 타이틀과 슬로건을 들고 맞서온 데서 비롯한다. 건국 초기의 한국민주당(한민당) 이래 민주국민당, 민주당, 민주통일당, 민주한국당,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 평화민주당, 새천년민주당 등등 한이 없다. 편의상 약칭으로 불려 잊을 따름이지 거의 모두에‘민주’가 들어 있다. 앞서 YS와 DJ 등의 분당·창당을 예시할 때 확인된 것처럼 ‘민주’가 없으면 정당으로 행세하기 어려울 정도의 단골로 등장한다. 1945년 해방 사흘 후 얼굴을 내민 고려민주당에서 시작된 ‘민주’가 한민당이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과 싸우면서 야당을 대신하는 단어가 됐기 때문이다. 아무 수식어나 딸린 말 없이 ‘민주’만 넣은 ‘민주당’도 숱하다. 이런 ‘민주당’만도 너무 많아서 구별용 수식어를 붙인 ‘꼬마 민주당’도 3개나 된다. 하지만 ‘민주’를 구현한 정당은 찾아보기 힘들다. 수시로 싸움질하고 헤집기나 하는 게 민주가 아님은 당연하다. 장사가 안되거나 비위를 저질러 영업정지 조치를 받은 업소가 문패나 바꿔 다는 식이라면 곤란하다는 지적이 공감을 얻는 것도 그래서다.

뭉치건 헤어지건 자기 혁신 없으면 허사

지난 8년 동안에도 당명을 수시로 바꿨으니 거기에 몸담은 본인들조차 제대로 기억할지 의문이다. 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 헷갈리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또 이 기간 동안 대표만도 17차례나 교체됐다. 그간의 당 안팎이 어떠했을까를 웅변해주는 수치다. 대선·총선, 재·보궐 선거 어디에서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증좌이고 실제 그랬다.

‘통합’과 ‘민주’로 대충 버무린다고 무능과 치부가 감춰지지 않는다. 상대인 여당의 무수한 패착에도 불구하고 그 절반의 지지에 함몰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식상한 ‘민주’ 구호나 간판으로 어물쩍 표를 얻는 시대는 지났다. 눈가림으로 사태가 호도되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럼에도 성원을 보내는 것은 ‘제대로 선 야당이 있어야 국정이 제 길을 간다’는 확신 때문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원로 정치인들의 ‘진부한’ 충언이 되레 새롭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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