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화 국회의장 ‘제2의 유승민’ 되나
  • 김현│뉴스1 기자 (.)
  • 승인 2015.12.24 18:50
  • 호수 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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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 법안 직권상정 불가 입장…청와대·새누리당 일제히 비난

경제 활성화 법안 등 쟁점 법안 처리를 둘러싼 ‘직권상정’ 정국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의 행보가 눈길을 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와 새누리당 지도부의 연일 거듭되는 직권상정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 의장이 이를 거부하면서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 의장의 ‘친정’인 여권 내에서는 정 의장을 향한 불만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지만, 야권에선 정 의장에 대해 칭찬 일색인 묘한 상황도 연출되고 있다. 일각에선 정 의장을 국회법 개정안 사태로 집권 여당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대권주자로 부상한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비교해 ‘제2의 유승민’이 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새누리당 강경파, 정 의장 해임건의안 거론

청와대와 새누리당 지도부는 여야 간 협상에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테러방지법, 북한인권법, 노동개혁 5대 법안 등 쟁점 법안 처리에 진전을 보지 못하자, 정 의장에게 ‘직권상정’ 결단을 촉구하면서 압박수위를 높이고 있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12월16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선거구 획정 및 쟁점법안과 관련해 “국가 비상사태 주장에 동의할 수 없어 직권상정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시사저널 이종현

박 대통령은 12월8일 국무회의에서 “국회가 이념과 명분의 프레임에 갇힌 채 기득권 집단의 대리인이 돼 청년들의 희망을 볼모로 잡고 있다”고 비판한 데 이어, 12월16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 관계 장관회의에선 “국민이 간절히 바라는 일을 제쳐두고 무슨 정치 개혁을 한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라며 쟁점 법안 처리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이보다 앞서 12월15일 현기환 청와대 정무수석이 국회를 찾아 정 의장에게 “선거법만 (직권상정을) 한다는 것은 국회의원들 밥그릇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라고 항의한 데 이어,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12월17일 정 의장을 향해 “주요 쟁점 법안에 대한 여야의 합의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비정상적인 국회 상태를 정상화시킬 책무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직격했다. 최근 원유철 원내대표와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 등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는 당 소속 의원 전원 명의로 직권상정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정 의장과 고성을 주고받는 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새누리당 일부 강경파들은 해임건의안까지 거론하고 있다.

여권의 이 같은 압박에도 정 의장은 이미 법정 처리 시한을 넘겨 ‘선거구 부존재’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예견되고 있는 선거구 획정안의 직권상정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과 달리, 쟁점 법안에 대해선 직권상정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나아가 정 의장은 12월16일 기자간담회에서 현 수석의 ‘밥그릇’ 발언에 대해 “밥그릇 챙기기란 표현은 저속할 뿐 아니라 합당하지 않다”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고, 12월17일 청와대 대변인의 언급에 대해선 “삼권분립이 돼 있는 대한민국 민주 체계에 의심이 가는 여지가 있는 말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고 응수했다.

정 의장이 쟁점 법안의 직권상정을 거부하는 배경엔 헌법과 국회법이 자리하고 있다. 정 의장은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 등과의 회동에서 “로펌 등으로부터 자문을 해봤더니 국회선진화법(개정 국회법) 아래에서는 여야가 합의하지 않으면 직권상정을 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현재 개정 국회법상 직권상정 규정인 제85조에 따르면, 각 상임위원회에 회부하거나 회부된 안건에 대해 △천재지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와 합의한 경우엔 국회의장이 심사 기간을 지정할 수 있고, 위원회가 그 기간 내에 심사를 마치지 않은 때엔 바로 본회의에 부의할 수 있다. 정 의장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비상사태’를 거론하며 처리를 요구하는 쟁점 법안이 관련 규정의 어떤 요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는 셈이다.

국회의 한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지금의 문제는 의장의 개인적 입장이나 소신을 떠나 법적인 문제”라며 “법은 국민들의 상식 위에 있어야 하는데, 국민들이 국가 비상사태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쟁점 법안 직권상정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의장의 측근들은 정 의장의 이 같은 행보가 ‘의회주의자’로서 소신의 발로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정 의장의 한 측근은 “정 의장은 세월호특별법 처리 때부터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서 의장이 흔들리면 안 된다는 소신을 보여줬다”며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압박에도) 부담을 전혀 느끼지 않고, 의회주의자이자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법을 지키면서 가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실제 정 의장은 국회의장직 취임 직후 이완구 국무총리 인준안 등 굵직한 현안들이 있을 때마다 중재에 나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등 의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왔다.

“대통령이 왜 자꾸 국회를 나쁘게 얘기하나”

입법부 수장으로서 ‘통법부(通法府)’라고 불리는 오명을 씻겠다는 강한 의지가 깔려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여권의 한 관계자는 “입법부 수장으로서 청와대와 행정부를 상대로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정 의장은 일부 사석에서 “내 카운터 파트너는 박 대통령”이라며 “지난번에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키고 싶었다면 대통령이 직접 (나한테) 연락해서 ‘자리를 비우는데 이것은 꼭 좀 부탁한다’고 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최근 들어 ‘국회 심판론’을 제기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왜 자꾸 대통령이 국회를 나쁘게 얘기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후문도 있다.

또 다른 일각에선 “(정 의장이) 자기 정치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역대 국회의장이 총선 불출마를 해왔던 관례상 정 의장의 최근 행보는 향후 자신의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논거에서다. 이는 정 의장이 대권 주자로서 입지를 구축하기 위한 게 아니냐는 관측과도 맥이 닿아 있다. 정 의장의 행보가 유승민 전 원내대표와 비교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정 의장이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제2의 유승민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정 의장은 각종 인터뷰를 통해 차기 대선 출마와 관련해 “나는 입법부 수장으로서 명예를 다 가져본 사람이다. 대선까지 욕심내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면서도 “나는 천지인의 조화인 민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민심이 그렇다면 나가볼 수 있다”며 가능성을 완전히 닫진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정 의장 측은 “정 의장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움직이는 분은 아니다. 만약 정 의장이 정치적 미래를 생각했다면 지금처럼 할 수 있겠느냐”라고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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