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유독 ‘세습 부자’가 많은 이유
  • 김윤태 | 고려대 교수·사회학 (.)
  • 승인 2016.01.14 18:14
  • 호수 1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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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원 이상 재산 ‘상속 부자’ 84% 미국 33%, 일본 12%, 중국 1%

2015년 말 블룸버그가 ‘세계 부호 400명’을 발표했다. 이 중 259명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다. 838억 달러(약 99조3300억원)의 재산을 소유한 MS(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1위를 차지했다. 인디텍스의 아만시오 오르테가, 버크셔 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페이스북의 저커버그, 구글의 레리 페이지 등 세계 최고의 기업가들이 뒤를 이었다. 상속 재산으로 400대 부호가 된 사람은 전체의 3분의 1뿐이었다.

한국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83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154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191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302위), 최태원 SK그룹 회장(374위) 등 5명이 400대 부호에 들었다. 모두 재벌 2·3세라는 공통점이 있다.

블룸버그가 발표한 ‘세계 부호 400명’에 이름을 올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위부터). ⓒ 시사저널 임준선, ⓒ 사진공동취재단

한국에서 최고의 부를 쌓아올린 사람들은 세습 부자들이다. 자수성가 부자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재벌닷컴의 조사에 따르면, 2014년 기준 상장사 주식 부자 100명 가운데 창업한 사람은 25명뿐이었다. 75%가 상속 부자였다. 세계 400대 부호에 125명이 포함된 미국은 71%가 창업자이다. 자본주의가 늦게 발전한 중국도 29명 가운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수성가한 부자다.

유독 한국에 세습 부자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재벌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됐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20대 기업집단에 포함됐던 STX그룹은 도산했고, 네이버·카카오·넥슨·엔씨소프트 등 신생 기업들은 최근 정체 중이다. 재벌의 탐욕은 끝이 없어 중소기업을 하청기업으로 만들 뿐 아니라 빵집 등 골목상권까지 통제한다. 재벌 대기업이 사실상 한국 시장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벤처기업이 생존하기 힘든 환경이다. 좋은 사업 계획이 있어도 성공 확률이 낮아 젊은이와 학생들은 창업을 포기한 채 공무원이나 공기업 취업 등 안정적인 일자리만 찾는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의 칼럼에 따르면, 1조원 이상 재산을 가진 ‘한국 부자’ 가운데 84%가 부모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은 것이었다. ‘상속 부자’의 비율은 미국의 경우 33%, 일본은 12%에 불과하며 중국에서는 1% 미만이다. 한국의 재벌 대기업은 ‘세습 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다. 재벌 2·3세 세습에 이어 4세 세습까지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와 정치권은 재벌의 세습을 묵인한다. 50% 세율의 상속세가 있지만 사실상 사문화됐다. 재벌 대기업은 종이회사를 설립한 후 주식 상장을 통한 몰아주기 등 편법과 변칙으로 상속세를 회피한다. 기업 상속에 대한 공제도 세습을 합리화한다.

재벌 3·4세의 재산 세습은 마법사를 능가한다. 이들이 가진 재벌 대기업의 주식 가치는 수십 배, 수백 배로 커진다. 심지어 수조 원의 재산이 늘어나기도 한다. 2015년 한겨레가 경제개혁연구소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30대 기업집단에서 창업주의 3·4세가 임원인 15개 재벌 계열사 34곳에서 16명이 증식한 재산이 무려 19조원이었다. 초기 투자에 비해 약 65배가 늘어났다. 편법에는 주로 저가 주식 취득, 무기명 채권 이용, 일감 몰아주기 등 실로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동원된다.

재벌들의 변칙 상속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정부가 2014년 가업상속공제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매출 5000억원 이하 기업에 1000억원까지 상속세를 면제해주는 법안이다. 같은 해 이미 상속세를 감면하는 개편안을 확정했는데 다시 개정안을 제출한 것이다. 최대주주 지분과 상속의 조건도 대폭 완화됐다. 기업상속공제법 개정안은 여야 합의로 통과 직전이었다가 막판에 가까스로 부결됐다. ‘부자 감세’ 논란으로 반감이 커진 국민 여론을 의식한 결과였다.

지금도 청와대와 여당은 ‘자녀가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하도록 혜택을 주면 기업을 발전시켜 고용이 늘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기업 세습이 고용을 증가시킨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국민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업 세습을 옹호하는 부자들의 노력이 청와대와 여당을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조세정책은 ‘금수저’ ‘은수저’를 든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만, 대다수 ‘흙수저’들에게는 좌절감만 안겨줄 수 있다. 2013년 현대경제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하거나 부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25%에 그쳤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위협받고 있다. 점점 자신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자식 세대가 더 가난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반면 미국의 부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상속세 폐지를 반대하는 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다. 2001년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조세 감면을 위해 1조6000억 달러 규모의 상속세 폐지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자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상속세 폐지를 반대하는 청원을 주도했다. 미국의 최고 부자들이 고율의 상속세를 유지하라고 주장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상속세 폐지를 반대한 부자 명단에는 워런 버핏과 함께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 회장, 석유왕 록펠러의 후손인 데이비드 록펠러 2세,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의 부친인 윌리엄 H. 게이츠 2세도 포함됐다.

뉴욕타임스에서 워런 버핏은 상속세 폐지에 대해 “마치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의 장남을 뽑아 2020년 올림픽팀을 구성하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상속세 옹호자들은 억만장자들이 조세 회피를 위해 자선단체와 공익재단에 기부하는 문화도 사라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윌리엄 게이츠 2세는 “상속세를 폐지하면 갑부의 자식들만 살찌게 하고, 힘겹게 생계를 꾸려가는 가정들에 납세 부담을 가중시킬 뿐”이라면서 “사회보장과 의료, 환경 보호 등 중요한 사회 프로그램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줄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평등 심화 막는 장치 필요

최근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전 세계 부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 기사를 게재했다. 바닥은 넓고 위는 뾰족한 피라미드 형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위 1% 부자는 전 세계 부의 43%, 상위 10%는 83%를 차지하고 있다. 소득 하위 50%는 단 2%의 부만 보유한다. 소득 분배의 불평등지수를 나타내는 지니계수를 보면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하지만 조세를 통한 빈부 격차 완화 효과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국제구호단체인 옥스팜이 발표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의 조세제도로 인한 빈부 격차 개선 효과(지니계수 감소율)를 보면, 핀란드·네덜란드·오스트리아·덴마크 등은 지니계수 감소율이 40%를 상회하는 데 반해, 한국은 OECD 평균의 4분의 1에 불과한 9%를 기록했다. 꼴찌 수준이다. 빈곤층이 점점 증가하는 한국에서 빈부 격차를 오히려 심화시키는 부자 감세는 중단해야 한다. 오히려 교육·의료 등 공적 투자와 사회 투자를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18세기 미국 독립선언문을 쓴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이 말한 대로 “빈곤의 확산과 부의 집중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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