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구 없는 나라’ 아랑곳하지 않는 정치권
  • 유창선 시사 평론가 (.)
  • 승인 2016.01.20 21:26
  • 호수 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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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때마다 선거구 획정 지각 사태 습관처럼 반복

4월13일이 제20대 총선일이다. 이제 80여 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선거구가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 국회가 선거구 획정 협상을 2015년 12월31일까지 타결하지 못하면, 현재의 선거구는 무효가 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따른 것이다. 선거구가 몇 개나 될 것인지, 어떻게 나뉠 것인지 정해지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선거운동을 할 수가 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어쩔 도리 없이 선거구 획정이 법제화될 때까지 예비후보들의 등록도 받고 선거운동도 일시 허용키로 하는 궁여지책을 내놓았지만, 물론 편법이다. 그렇게 해도 통폐합이나 증설이 예상되는 선거구 출마 예정자들은 혼란이 심각한 상황이다.

오죽하면 이 사태에 대해 헌법소원까지 제기됐겠는가. 한 예비후보자는 선거구 획정이 안 된 상태에서 4월13일에 선거를 치르는 것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냈다. 선거구 획정이 안 돼 최소한의 선거운동마저 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세 달 후에 선거를 치르는 것은 정치 신인과 예비후보자들의 참정권, 유권자의 선거권과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취지다. 총선 일정을 변경했을 경우의 대혼란을 감안하면 헌법재판소가 이 후보자의 손을 들어줄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이 항변 자체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면서 예비후보로 등록하지 못한 조형철 전 전북도의원이 1월11일 전북 선관위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선거구 획정이 이렇게 표류하게 된 데는 우선 선거구획정위원회의 책임이 컸다. 획정위는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중앙선관위 산하의 독립기구로 설치됐다. 일부러 국회 산하에 두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중앙선관위 추천 1인 이외의 획정위원 8인을 여야 4 대 4의 추천으로 임명하다 보니 쟁점을 둘러싼 논의가 언제나 4 대 4의 대결이 돼버렸다. 획정위의 독립성은 실종되고 획정위원들은 자신을 추천해준 정당의 대변자가 돼버렸다. 급기야 정의화 국회의장이 획정 기준까지 제시해가며 1월5일까지 선거구 획정안을 제출해달라고 획정위에 요청했지만, 그 후에도 획정위원들은 여야 진영 간 대결만 벌이다가 결국 획정안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독립성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획정위원들의 모습이었다. 결국 책임을 지고 김대년 선거구획정위원장과 가상준 획정위원이 사퇴를 했지만, 이들의 뒤늦은 사퇴는 획정위의 마비만 가져왔을 뿐 책임 있는 행동이 되지 못했다. 획정위원들의 사퇴는 획정위의 안을 마련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획정위는 그 존재 이유를 묻게 만든 최악의 사례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이 같은 파행을 낳은 획정위원회 구성 방식은 개선이 필요하다. 이래가지고는 앞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미 국회에는 의결 방식을 현행 3분의 2의 동의에서 과반으로 변경하는 안, 현행 ‘여야가 8명, 중앙선관위가 1명’ 추천하게 돼 있는 획정위원을 ‘여야가 6명, 중앙선관위가 3명’ 추천하는 안이 발의돼 있다. 이보다도 여야 추천 몫을 더 줄여 획정위의 정당 예속을 탈피하는 방향 모색이 필요해 보인다.

선거구획정위원회 김대년 위원장이 1월2일 열린 전체회의에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 연합뉴스

돌아보면 사실 이번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16대 국회의원 선거는 65일, 17대는 37일, 18대는 47일, 19대는 44일을 남기고서야 선거구가 결정됐다. 총선 때마다 선거구 획정 지각 사태는 습관처럼 반복돼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경우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됐다. 헌재 결정에 따라 모든 선거구가 무효가 되는 헌정사 초유의 사태를 정치권이 기꺼이 감수하는 용기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선거구 부재 사태에 들어간 이후에도 여야는 조금도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치 신인들의 발이 묶이고 이러다가 총선을 치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는 상황에서도 여야는 버티기만 계속했다. 마치 우리는 알 바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여야 두 당은 각기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서로 상대가 요지부동인데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고 억울함을 호소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경우 우리는 정치권, 즉 여야 모두의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특히 여당의 책임을 더 무겁게 묻게 된다. 이는 정국 운영의 최종 책임이 원내 과반수 의석을 갖고 있는 여당에 있음을 감안할 때 그러하다. 정의화 국회의장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당의 경직된 협상 자세를 지적하고 좀 더 유연한 태도로 협상을 타결할 것을 주문한 사실도 그러한 맥락이다. 그런데 그동안 진행돼왔던 협상의 내용을 뜯어보면, 그래도 여러 차례 입장을 수정하며 제시했던 것은 오히려 야당이었다. 그와 달리 한 발짝도 양보하지 않았던 여당의 태도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대표적인 것이 ‘이병석 중재안’에 대한 입장이었다. 여당 소속인 이병석 정개특위 위원장은 현행 246석인 지역구 의석수를 260석으로 늘리고, 그만큼 줄어드는 비례 의석에 야당이 주장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부분적으로 적용하는 중재안을 제시했다. 여당이 요구하는 비례대표 축소와 야당이 요구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 도입을 절충하는 묘안이었던 셈이다. 정의화 의장도 이 중재안에 대해 “정말 지혜를 모아낸 이상적인 안”이라고까지 격찬했지만, 정작 여당 지도부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여당 의석 수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여당의 거부로 야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정당 득표율 반영 비율을 더 낮추는 수정안을 다시 제시했지만, 여당은 요지부동이었다. 협상의 한 당사자로서 야당의 책임 또한 큰 것이지만, 양보할 것은 하면서 좀 더 유연한 태도로 타결을 주도했어야 할 집권 여당이 보인 태도는 무척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선거구 획정 협상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 보니 철저히 밥그릇 지키기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치개혁 차원의 선거제도 개편은 고사하고 판단의 기준이 오직 자기 당 의석 수가 늘어나느냐 줄어드느냐에 있는 한, 무슨 정치 발전을 위한 선거구 획정이 가능하겠는가. 야당 또한 여당과 함께 자기 당 농어촌 지역구 의원들의 선거구 지키기에 내내 매달리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정치 개혁은 실종되고 밥그릇 지키기만 남은 선거구 획정 협상이었다. 총선을 치르려면 선거구 획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협상 타결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여전히 기약이 없다. 무슨 배짱인지 이해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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