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생모 고영희 집안 친일 행적 부담
  • 이영종│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6.01.27 18:29
  • 호수 1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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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희는 북송 재일교포 출신…외조부는 일본 군복 공장 간부
KBS는 2012년 6월 북한에서 제작한 이란 선전영화를 일본을 통해 입수했다고 밝혔다. 영화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나란히 선 고영희의 모습. © KBS 제공

국가주석 김일성의 급작스러운 사망(1994년)과 잇단 대홍수로 북한 체제에 위기가 몰아닥쳤던 1990년대 후반.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인 고영희는 유럽을 자주 오갔다. 스위스 베른에 조기 유학 중인 막내아들 김정은(현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을 보살피고, 프랑스 파리에 들러 유선암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김대중정부 초기 한 국가정보원장이 평양의 김정일과 파리 호텔에 머무르던 고영희의 은밀한 대화를 감청한 내용을 사석에서 발설했다가 대통령으로부터 혼쭐이 난 것도 이즈음이다. 연인 사이에 오갈 정도의 농도짙은 국제전화 통화를 여과 없이 입에 담았다며 김 대통령이 진노했다는 후문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추진 중이던 상황에서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려 판을 깰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한·미 정보 당국은 당시 고영희에 주목했다. 평양 로열패밀리의 멤버가 국제사회에 주기적으로 노출되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는 점에서다. 베일에 싸여 있던 김정일 위원장이나 그 가족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정보 당국의 최고위급 인사들은 고영희에게 접근해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수집 정보인 휴민트(humint)를 확보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선택된 건 고영희가 탑승한 유럽행 비행기 일등석에 대북 정보요원이 동승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상황에 밝은 정보 당국 고위 관계자는 “바로 옆자리는 부담스러웠고 한두 칸 건너에 미리 티케팅을 해 고영희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했다”고 귀띔했다. 비교적 장시간 운항하는 유럽행 비행기에서 북한 최고지도자의 부인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대북정보 수집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공작이었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고영희는 매우 품위 있게 행동했고, 승무원 등에게도 친절하고, 배려하는 모습이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잠을 자거나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꼿꼿이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포착됐다는 얘기다.

정보 당국, 김정일-고영희 은밀한 대화 감청

당시 고영희의 유럽 동선을 추적하며 확보된 정보 가운데는 유용한 ‘시인 첩보’(사실로 확인된 정보 사항)가 많았다고 한다. 김정은과 형 정철, 여동생 여정이 모두 베른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평양 로열패밀리들이 오가는 동향 등을 통해 북한 고위층들의 움직임이나 관련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해당국과의 협조를 통한 국제전화 감청도 알토란 같은 정보였다. 국가정보원과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출생 시점을 ‘1984년 1월8일’이라고 확정하고 있는 것도 당시 해당 유럽 국가 정보 채널을 통해 확보한 여권 정보 때문이라고 한다. 한·미 정보 당국의 이 같은 추적 작업은 김정은이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며 수그러들었고, 생모 고영희가 2004년 파리에서 유선암 수술을 받다 숨지면서 사실상 마무리됐다. 정보 당국자는 “고영희가 숨지자 북한 김정일은 특별기와 고급 관(棺)을 파리에 보내 운구해 갔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은 국교가 없는 프랑스에서 퍼스트레이디에 해당하는 고영희가 사망하자 매우 당혹해하며 사태 수습에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은 현지 우리 정보망을 통해 서울에 보고됐다. 첫 정상회담 이후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던 시기라 우리 정부가 북한과 프랑스 사이에서 고영희의 시신 이송을 위한 절차를 도왔다는 후문이다.

그로부터 6년 후인 2010년 9월. 김정은은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로 추대된다. 26세의 막내아들을 전대미문의 3대 세습 방식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로 낙점한 행보와 스타일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예상보다 안정적으로 북한 체제를 이끌고 있다는 분석과 함께 좌충우돌식의 모험주의적 리더십이 결국 파국을 맞을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올 초 감행한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한·미 등의 대북 관련 당국자와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 이런 논쟁을 둘러싼 시각차가 더욱 커지는 양상이다. 핵 능력 증대를 통해 내부적으로 체제 결속을 도모하고 대외적으로 ‘핵보유국’으로서의 위상 확보를 통한 외교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는 지적은 긍정적 시각에서의 분석이다. 경륜이 짧은 김정은이 국제 정세의 흐름을 읽지 못한 채 미국과 중국 등을 상대로 무모한 도박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우리 대북(對北) 부서의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김정은의 성향과 통치 스타일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 4년 동안의 대내(對內) 정책과 외교 전략을 꼼꼼히 짚어보면 김정은 체제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고, 어떤 종착점에 다다를지를 가늠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김정은이 10대 시절을 보낸 스위스 베른의 유학생활을 되짚어봄으로써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주장도 제기된다.

사실 김정은은 집권 초기 생소하고 독특한 리더십을 보였다. 돌출적인 행동으로 대북 관측통들에게 당혹감을 주기도 했다. 그만큼 17년간 북한 체제를 이끌어온 선대(先代) 수령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 김정일과 판이한 양상을 보였다는 얘기다. 할아버지의 카리스마를 빌린 통치술을 구사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옆머리를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과 검은색 코트 같은 외양뿐이 아니다. 군인·주민들과 손잡고 얼싸안고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김정은의 모습은 쌀가마니에 털썩 앉아 협동농장원들과 환담하던 김일성의 젊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 이미지의 차용일 뿐 통치스타일에서는 김일성·김정일과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하려는 정황도 드러난다.

북한 조선중앙TV가 2014년 4월21일 오후 8시30분쯤부터 방영한 제1차 비행사(조종사)대회 참가자를 위한 모란봉악단 공연 영상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어린 시절 모습이 처음으로 공개돼 눈길을 끌었다. © 연합뉴스

“즉흥적인 기분에 따라 간부들 운명 결정”

김정은은 권력을 거머쥔 첫해인 2012년에는 ‘미숙한 리더십’이란 우려를 불식시키는 데 치중하는 듯했다. 20대에 집권한 청년 지도자라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인민 친화적’인 리더십을 통해 주민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행보도 드러냈다. 같은 해 4월 첫 공개 연설에서 “다시는 우리 인민들이 허리띠를 조이지 않고 사회주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겠다”고 언급한 것도 민생 챙기기를 통한 초기 권력 안정이란 노림수가 깔린 움직임이란 분석이 나온다. 평양에 문수물놀이장과 초고층 아파트를 건설하고, 강원도 문천에는 마식령스키장을 짓는 등 대형 건설 프로젝트에 공을 들였다. 막대한 돈을 쏟아부어 김정은 시대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란 찬양을 관영선전 매체들이 쏟아내게 했지만 민생과 동떨어진 데 대한 볼멘소리가 주민들 사이에서 나왔다. 김정은 시대의 핵심인 핵·경제 병진 노선은 과도한 핵개발과 미사일 시험발사 비용으로 인해 아직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정은, 노동당과 군부 대상 공포 정치

노동당과 군부 간부를 대상으로 한 공포정치도 김정은 정권의 향배를 좌우할 요소로 꼽힌다. 무자비한 숙청과 해임·강등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평양 권력의 핵심부는 꽁꽁 얼어붙었다.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까지 처형하는 상황에서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경직성이 극한에 달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김정은의 인사 기준이나 용인술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 같은 점은 3개월의 공백을 보이다 1월 넷째 주 권력 전면에 복귀한 최룡해 노동당 비서의 경우를 봐도 잘 드러난다. 지난해 10월 김정은의 모란봉악단 공연 관람때 수행한 후 행방이 묘연했던 최룡해를 두고 우리 정보 당국은 “지방 협동농장에서 혁명화 교육 중”이라고 밝혔다.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 건설이 부실하게 이뤄진 데 대해 청년 사업 담당자인 최룡해가 책임을진 것이란 설명이었다. 일각에서는 최룡해가 숙청당했거나 권력의 전면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반역죄로 몰려 처형당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과 같은 운명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1월20일 북한 TV에 등장한 최룡해는 김정은과 화기애애한 모습까지 보였다. 김정은은 최룡해를 최측근으로 수행토록하면서 농담을 건네는 등 손가락으로 최룡해를 가리키며 파안대소하거나 눈맞춤을 하기도 했다. 정부 대북 부처관계자는 “솔직히 말하면 김정은의 즉흥적인 기분에 따라 간부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듯한 상황이라 정보 분석이나 예측이 어렵다”고 말했다.

김정은이 최룡해나 황병서 총정치국장같은 노련한 간부들을 다루기 위해 나름으로 용인술을 발휘하는 것이란 시각도 있다. 또 젊은 지도자답게 군부대나 공장·기업소 방문 때 실용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긍정적이란 평가도 나온다. 아버지 김정일은 미리짜인 일정이나 동선에 따라 휘둘러보고 브리핑을 받는 식의 통치활동을 했다. 하지만 김정은은 농구 코트를 방문하면 직접 손으로 바닥을 만져보며 간부들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린다. 김정일은 과거 만경대혁명 학원 방문 기록영화에서 어린 원생들이 꽃다발을 주자 곧바로 수행원에게 넘기고는 곧장 걸음을 재촉했다. 아이들은 안중에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김정은은 아이들을 감싸안고 볼을 만져주며 식당까지 찾아가 아이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김정은의 통치 스타일과 관련해 주목되는 점은 김정은의 대남관이다. 현재까지 드러난 면모를 볼 때 김정은은 호전적인 대남(對南)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김정은은 2012년 2월 연평도 포격 도발부대인 북한군 4군단을 방문한 자리에서 남한을 ‘적(敵)’으로 수차례 적시했다. 그는 “적들이 침범한다면 원수의 머리 위에 강력한 보복 타격을 안기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김정은은 새로 지은 군가 악보를 보고받고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남진(南進)의 길을 가자’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탱크사단을 방문한 김정은이 직접 탱크에 올라 남한의 도시 지명을 새겨놓은 푯말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장면이 북한 TV에 드러난 적도 있다. 이런 언행 때문에 김정은이 대남 도발을 실행에 옮기는 데 김정일보다 신중하지 못한 과정을 거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북한 관영 매체들이 ‘준비된 지도자’로 내세우고 있는 것과 달리 김정은의 권력 기반은 취약한 측면이 있다. 불과 3년 안팎의 후계 수업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1974년 2월 노동당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후계자로 내정돼 20년간 권력 승계 준비를 한 것과 차이가 난다. 김정은의 일천한 후계 수업 경력과 부족한 카리스마는 김정은을 ‘위대한 영도자’로 찬양하는 영상물의 화면 곳곳에 의문의 공백을 남긴다. 집권 이후 첫 김정은 생일인 2012년 1월8일에 맞춰 방영한 첫 번째 김정은 기록영화 <백두의 혁명 위업을 계승하시여>에서 북한은 김정은이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하루 3~4시간만 잠자며 공부했다던 재학 시절 사진은 한 장도 제시하지 못했다. 스위스 베른의 국제학교를 다닌 청소년 시절 모습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이 후계자 시절 김일성종합대학 졸업 사실을 자랑스럽게 공표하며 졸업 논문과 재학 시절의 사진을 여러 장 공개했던 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최고지도자가 실은 해외 조기 유학에 병역 기피란 걸 주민들에게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2012년 공개된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과 부인 리설주(왼쪽)의 모습. © 조선중앙통신 연합

김정은 부인 리설주, 청담동 며느리 패션

이런 점은 김정은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미화하는 가계 우상화에 나서야 하는 북한지도부에 부담이다. 김정은의 생모가 북송재일교포 출신이란 점도 주민들 사이에 입소문이 날 경우 부정적 효과를 낼 수 있다. 제주 출신인 외할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가 군복을 만드는 공장의 간부를 맡았다는 점도 친일 행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김일성의 ‘항일 혁명’을 정권 수립의 기본 줄기로 제시하고 있는 북한의 후계자이자 최고지도자의 외가가 친일 논란에 휩싸인다면 곤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북한이 김정은 가계 우상화에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과거 은둔을 강요받던 평양 로열패밀리의 여인들이 김정은 시대 들어 속속 공개석상에 등장하고 있는 건 눈여겨볼 대목이다. 김정일가(家)의 오랜 금기가 깨진 것이다. ‘평양판 신데렐라’ 리설주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김정은은 2012년 7월 리설주를 동반하고 평양 능라인민유원지 개관식에 나왔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부인 리설주 동지’라고 불렀다. 파격은 이어졌다. 김정은의 팔을 부여잡고 팝콘을 먹는 리설주는 북한 주민들은 물론 외부 세계에도 충격이었다. 샤넬풍 패션에 크리스천 디오르 클러치백을 든 평양 안방권력의 새 사모님을 두고 ‘청담동 며느리 패션’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출산 등으로 인한 공백을 빼고는 김정은을 수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여왔다는 게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도 주목거리다. 김정일 장례식 때 오빠 뒤에 서서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노동당 부부장(차관급)으로 자리하면서 오빠를 밀착 수행하고 있다. 선전선동부에서 일하며 오빠의 이미지 메이킹과 스타일 관리를 책임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는 한때 북한 권력의 키를 잡고 있는 여걸로 간주됐다. 하지만 남편 장성택이 반역죄로 처형당하면서 외부 활동을 접고 은둔에 들어갔다. 일각에서 그의 사망설이 종종 제기되지만 관계 당국은 신변에는 이상이 없는 상황이라고 밝히고 있다.

김정은은 2016년 벽두부터 대북 압박의 거센 파고(波高)를 만났다. 연초 ‘수소폭탄’ 실험 성공을 주장하면서 자초한 상황이다. 지금 김정은과 평양 지도부의 관심은 5월 초로 잡힌 노동당 제7차 대회에 쏠려 있다. 36년 만의 당 대회를 ‘승리자의 축전장’으로 만들자는 게 북한이 들고나온 구호다. 집권 5년 차를 핵 카드로 시작한 김정은이 어떤 다음 승부수를 준비하고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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