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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의 음식인류학] 정월대보름 음식이 전해주는 통합의 메시지

사람 신분 간의 경계, 인간과 신의 경계를 허무는 해남 산정리의 ‘헌식(獻食)’ 문화

이진아 | 환경·생명 저술가 ㅣ . | 승인 2016.02.25(Thu) 19:09:14 | 13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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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지나고 두 주가 지나면 정월대보름이 오기 마련이다. 부럼·나물·귀밝이술로 대표되는 정월대보름 음식은 겨울철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과 미네랄을 보충해주는 영양·생리학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인간 사회의 음식문화에는 이런 생물학적 차원만 있는 게 아니다. 음식을 매개로 한 인간관계 같은 사회적 요소도 음식문화에서 중요하다.

 

음식의 사회적 의미가 발현되는 양상은 다양하지만 크게는 음식을 이용해 사회적인 차별을 두는 측면과 그런 차별을 넘어서 통합을 시도하려는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사람들은 음식 먹는 자리와 음식의 종류를 구분해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경계를 만들어왔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이런 차별이 극심했다. 남성인 가장, 특히 양반집 주인은 가장 좋은 자리에서 가장 예를 갖춘 방식으로 가장 좋은 음식을 독상으로 받아 먹었고, 사회적 스펙트럼으로 보아 그 반대편 극에 위치했던 상민 집안 여성은 남성 가족 성원들 다 차려주고 남은 음식을 상도 없이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후딱 먹어치우곤 했다. 차별은 더 세부적인 부분까지 분화되어서, 같은 상에 앉아서도 음식의 종류와 그것을 먹는 차례, 그릇이나 수저의 종류와 크기까지, 음식은 실로 사회적 구분을 보여주는 좋은 매체로 작동해왔다.

 

해남에서 열리는 헌식제는 주민들이 직접 준비한 ‘헌식’을 모두가 함께 나눠 먹는 200년 된 전통 제례행사다. ⓒ 연합뉴스

 


잡곡·나물 섞어 비벼 먹는 문화, 통합 메시지

 

명절은 이런 일상적인 음식문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계기를 제공하는 때였다. 평소에 잘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을 실컷 먹게 해주는 것 외에도 평소에 늘 작용하고 있었던 차별의 경계를 없애주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나라 정월대보름 음식이다. 대보름엔 여러 가지 잡곡을 한데 섞어 짓는 오곡밥에 갖가지 나물 반찬을 한데 넣어 비벼 먹는 비빔밥을 먹는다. 이렇게 한데 섞어 비벼 먹는다는 것 자체가 ‘어동육서(魚東肉西)’ ‘홍동백서(紅東白西)’ 하면서 구별의 질서를 따지는 것보다는 통합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전통사회의 대보름 풍속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의 대보름 음식문화를 들여다보면 음식이 어떻게 사회적 통합에 기여하는지 한층 더 이해하기 쉽다.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산정리. 600년 이상 살아온 은행나무가 마을 지킴이 당나무로 아직도 사랑과 보호를 받고 있는, 보기 드문 마을 중 하나다. 해마다 정월대보름 전날부터 이 나무를 중심으로 1년 중 가장 큰 행사가 벌어진다. 해가 기울 무렵 마을 군고패(사물놀이 패를 가리키는 이 지역 용어)들이 마을 끝 골목에서부터 지신밟기를 시작한다. “두두둥둥, 채채챙챙!” 북과 꽹과리 소리가 마을을 울리기 시작하면 집집마다 아주머니들은 미리 장만해두었던 음식을 작은 소반이나 큰 함지에 담아 집 앞 길목에 내놓는다. 오곡밥·나물·조기구이·과일·한과 등 간소하지만 전형적인 대보름 음식 차림새다.

 

골목골목 지신밟기를 하는 군고패들을 따라 마을 사람들도 덩실덩실 춤추며 판에 합류한다. 충분히 지신밟기를 한 군고패들이 당나무 앞 공터에 이를 때쯤이면 온 마을 사람들과 구경하러 온 외부인들로 상당한 관객이 형성된다. 밤이 깊어지면 공터에 모닥불이 피워지고 은행나무 가지 너머로 보름달이 떠오르면 마을 사람들은 숙연해지면서 또 한 해가 풍요롭고 평화롭기를 기원한다. 이어서 놀이판의 신명은 열기를 더해간다. 600년 넘게 그 모습을 지켜봐온 은행나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배큰애기 할머니’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배큰애기는 임신을 한 젊은 여성을 가리킨다. 다산(多産)의 상징이며 동시에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다.

 

놀이가 끝나고 모닥불이 사그라지면 마을 사람들은 그 모닥불을 뛰어넘어(재앙을 털어버린다는 의미가 있다) 바로 옆 마을회관으로 향한다. 회관에서는 마을 아주머니들이 길목길목마다 놓였던 소반의 음식을 모아 그곳에 오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음식을 준비한다. 수십 그릇의 오곡밥과 나물을 큰 함지박에 모두 모아 비벼서, 오는 사람들에게 한 그릇씩 대접한다.

 

미국의 음식인류학자 제임스 왓슨도 이와 유사한 현지 조사 사례를 발표한 적이 있다. 홍콩 농촌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는 가을걷이 후 잔치를 벌이는데, 마을 앞 너른 터에 큰 솥을 걸어놓고 모든 집에서 내온 음식을 한데 섞은 다음 비벼 익혀서 촌장부터 제일 하찮은 신분의 머슴까지 똑같은 음식을 덜어 한자리에서 먹는다. 그는 ‘같은 솥에서(From the Common Pot)’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런 음식 나눔의 과정이 갖는 사회적 차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관습이 마을의 단결력을 높이고 분화된 계급 사이의 위화감을 완화해준다”는 것이다.

 


음식 통해 하나 됐던 대보름 문화 점차 퇴색


이렇게 사람들이 신분 등 사회적 구분의 경계를 넘어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일을 인류학에서는 ‘공식(共食, commensality)’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함께 먹는다는 뜻이다. 산정리 마을 사람들은 이런 풍습을 ‘헌식(獻食)’이라고 부른다. 음식을 바친다는 뜻이다. 원래 산정리에서 대보름날 길목에 내다놓은 상차림은 사람이 아니라 신적(神的) 존재에게 바치는 음식이었다. 특히 결혼을 못하고 세상을 떠났거나 자손이 없어서 제사를 통해 음식을 얻어먹지 못하는 배고픈 영혼들을 위해 대보름 전날 저녁에 제대로 한 상 차려서 실컷 드시라고 바치는 음식이라는 게 마을 사람들의 설명이다. 이렇게 바치고 난 음식을 마을 사람들이 한데 섞어 한자리에서 나누는 것이다.

 

한두 세대 이전만 해도 산정리 마을처럼 대보름을 통합의 계기로 삼는 마을들이 상당히 존재했다. 이제 그 의미는 희미해져 마트에서 파는 대보름 ‘부럼 세트’, 혹은 ‘오곡밥 짓기 세트’ 정도로 축소되었다. 칸칸이 구분된 아파트 안에서는 가족끼리 대보름 저녁을 먹는다 하더라도, 혹은 평소에 자주 가는 직장 옆 식당에서 흰밥 대신 오곡밥이 나와 그제야 오늘이 대보름인 줄 알았다 하더라도, 오곡밥과 비빔밥을 먹는 동안만큼은 원래 그 음식이 말해주었던 통합의 메시지를 한 번쯤 되새겨보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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