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들 정서적으로 유대할 공동체 가져야”
  • 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3.03 18:13
  • 호수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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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역 재건 과정 연구한 이인자 도호쿠 대학 교수 국내 최초 인터뷰

2011년 3월11일. 일본 도호쿠(東北) 지방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臺)시 인근 해역에서 진도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그 여파로 센다이시 해안 지역에는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고, 수많은 인명·재산 피해가 났다. 이 자연재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평생을 일궈온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4년 4월16일. 한국의 전남 진도군 병풍도 앞바다에서 476명의 선원과 승객을 태운 선박이 침몰했다. TV 생중계를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된 이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로 3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실종자가 발생했다. 당시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경기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이 탑승한 상태였다.

 

2월19일 한국을 찾은 이인자 도호쿠 대학 교수는 “3·11 대지진과 세월호 등 대형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넋을 기리는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재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

“세월호 사고가 나던 날, 일본 방송을 통해 그 모습을 봤다. 참을 수 없이 비통한 가운데 피해자 가족들, 특히 자녀를 잃은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걸어야 될 3년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가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난 지 3년이 지난 시기였는데, 내가 만난 도호쿠 지역 시민들은 여전히 앞이 안 보이는 혼란스러운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기에 안타까움이 더했다.”

 

지난 2월19일 한국을 찾은 이인자 도호쿠 대학 교수(문화인류학)는 서울 광화문광장에 조성된 세월호 추모공간을 찾아 조용히 묵념을 올렸다. 그는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후 그해 5월부터 지금까지 피해지역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연구를 해오고 있다. 재앙에 가까운 재해 발생 후 희생자 유족과 생존자들, 그리고 일상의 재건 과정을 제3자로서 누구보다 가까이서 오랜 시간 지켜봐왔다.

 

그가 연구한 지역은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이시노마키(石?)시 하구 마을 가호쿠(河北)초다. 초(町)는 한국의 동(洞)에 해당한다. 이시노마키시는 미야기현에서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도시다. 동부 해안가에 접해 있어 2011년 대지진과 쓰나미로 도시의 약 46%가 침수됐다.

 

이 마을의 오카와(大川) 초등학교에서는 재학생 108명 중 68%에 달하는 74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3·11 대지진으로 인해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교육시설이다. 이인자 교수는 “오카와 초등학교 사고는 구할 수 있는 시간과 방법이 있었음에도 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인재(人災)로 보는 사람도 많다”며 “재난 직후 인명 구조에 문제가 있었기에 세월호 사건과 흡사한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희생자 시신 수습이 선행 과제


“사고 이후 일상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일이다. 실제로 피해지역을 연구·관찰한 결과, 넋을 기리는 행위가 그 자체로 피해자들의 정서적 중심을 잡아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인자 교수는 황폐해진 마을을 재건하고 무너져내린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는 모든 행위를 ‘넋을 기리는 행위’라고 표현했다. 그는 “쓰나미가 할퀴고 간 마을을 청소하고 귀하게 여기던 것들을 찾아내는 모든 작업이 중요하지만, 가장 선행돼야 할 것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찾는 일”이라고 말했다.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고, 묘를 만들고 제사를 지내는 모든 과정이 희생자를 기억하기 위한 의식이라는 설명이다. 3·11 대지진 발생 이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오카와 초등학교 희생자는 4명이다. 쓰나미 위험지역으로 분류된 학교 주변의 4개 마을에서도 32명이 여전히 행방불명인 상태다. 일본 정부는 이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정기적으로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는데, 지난해 11월부터는 정부 주도의 수색 작업에 유가족이 참여할 수 있게 됐다.

“광화문광장에 조성된 세월호 분향소 역시 넋을 기리는 행위다. 그러나 일단은 사람을 찾는 게 중요하다. 시신을 찾아 넋을 기림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를 잡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시노마키시 가호쿠초의 피해지역에 대한 이인자 교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가 처음부터 계획됐던 것은 아니었다. 2000년 도호쿠 대학에 교수로 부임한 그는 원래 도호쿠 지방으로 국제결혼을 해 온 외국인 여성들을 연구했다. 석사 시절부터 이어져 온,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이주 여성들에 대한 관심의 연장선이었다. 그러던 중에 도호쿠 대지진이 발생했다. 그는 “지진 소식을 듣고 평소 알고 지내던 연구 정보 제공자의 생사가 너무 걱정이 돼 위안차 방문하게 된 지역이었다”라며 말을 이어갔다.

 

“지진이 일어난 지 2개월이 지났을 무렵 가호쿠초를 방문했다. 현장에 가보니 생각보다 더 처참한 상황에 제 연구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외부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쓰나미 앞에 서니 재일 한국인이고 일본인이고, 남자고 여자고 그런 게 의미가 없는 거다. 앞집보다 부지가 1㎝ 높았다는 것만으로 뒷집은 무사하고 앞집은 다 쓸려가고….”

 

대지진 발생 직후 일본 사회는 각자의 위치에서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이인자 교수는 “도호쿠 지방에서 가장 큰 대학에 재직 중인 학자, 특히 인류학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했다”며 “이 현상과 앞으로의 재건 과정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을 남기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민족지(民族誌·현지조사에 바탕을 둔 여러 민족의 사회조직이나 생활양식 전반에 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술한 자료) 작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가족과 생활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 모습을 기록에 담는다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피해 가족들의 정서적 거부감도 컸거니와 재난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정치 세력들과 거리를 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피해 주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피해지역을 하루가 멀다 하고 오갔다. 주로 간 지역은 쓰나미 위험지역으로 지정된 오노사키(尾崎·54가구)·나가쓰라(長面·150가구)·가마야(釜谷·140가구)·마가키(間垣·60가구) 등 4개 마을이었다. 이 지역은 대부분 침수됐으며 대다수 주민이 정부가 제공한 100여 개의 가설 주택에서 살고 있다.

 

연구소에서 피해지역까지 왕복 300㎞의 거리였지만 정작 피해지역에 도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오카와 초등학교 주변을 둘러보거나 묘지만 보고 오는 날도 많았다. “처음에는 사진을 찍기도 어려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정말 조심스럽게 다녔다. 그들이 말하고 싶을 때 듣고 기록하고 그런 시간이 3년이었다.”

 

공동체 단결력 강할수록 사상자 적어


이인자 교수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그들 스스로의 마음을 추스르는 방식을 관찰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의식과 피해자 규모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공동체적인 단결력이 강할수록 사상자의 수가 적다는 점이었다. 공동체 단결력이 강한 마을은 단 한 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새로 조성돼 마을 공동체가 거의 형성돼 있지 않았던 마을에서는 구성원의 60%가 사망하기도 했다.

 

“쓰나미 위험지역이 된 4개 마을 가운데 평상시에 단결이 잘되던 마을일수록 사상자의 수가 적었다. 정보 전달이 효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피해지역 사람들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학자로서 차마 할 수 없었지만, 무서울 정도로 그 상관관계가 보였다.”

 

이런 공동체의식의 중요성은 사고 당시뿐만 아니라 사고 이후 마을을 재건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아무리 많은 가족을 잃었어도 주변에 위로와 도움을 줄 수 있는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는 사람은 희망을 놓지 않고 삶을 재건해나갔다. 반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어 보여도 사회적·정서적으로 고립된 사람은 때때로 삶 자체를 포기하기도 했다.

 

“관찰자 중 한 명인 남성분은 여섯 가족 가운데 어머니와 부인, 자녀 셋을 한꺼번에 잃었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곧 자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울한 상태였다. 그러나 평소 그의 아버지로부터 은공을 입은 사람들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이 남성을 도와줬다. 지금 그는 3년 전 새로 마련한 집에 쓰나미로 잃은 가족들을 모시는 불단(佛壇)을 놓고 매일 지극정성으로 불단을 지키며 생의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결국 그를 살린 것은 아버지 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끈끈한 인간관계였다.”

 

이인자 교수의 관심을 끈 또 다른 요소는 바로 마을 축제 마쓰리(祭)였다. 하구에 위치한 나가쓰라 마을은 쓰나미로 인해 끊겼던 마쓰리를 그해(2011년)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만 1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상처받은 서로의 마음을 보듬으며 모두를 위한 축제의 기반을 다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이 마을에서는 마쓰리를 준비하고 수행하면서 살아남은 사람들 간의 연대가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내 연구는 ‘평소에 잘하자’는 빤한 진리를 경험적으로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과거 이주민에 대한 연구에서도 그랬듯 지난 5년간의 현지조사 결과가 말해주는 바는 어떤 사람 혹은 사회가 위기에 부닥쳤을 때 그 뿌리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내 연구는 향후 5년간 더 이어질 것이다. 앞으로는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많은 것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은 무엇이고 용기 있는 부분은 무엇이며,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그들이 어떻게 보여주는지에 대해 알기 쉽게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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