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모인 사람들 액운 싹 다 가져가게!”
  • 전남 해남=김경민 기자 (kkim@sisapress.com)
  • 승인 2016.03.03 18:15
  • 호수 1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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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어와 만선 기원하는 정월대보름맞이 해남 용왕제

선창(船艙)에 징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바다에서 육지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 두껍게 껴입은 옷 사이로 파고들었다. 해는 이미 저물어 빛이라곤 선창가의 주황빛 가로등 세 개와 사람들 손마다 들려 있는 스마트폰에서 뿜어져 나오는 LTE 불빛이 전부였다.

“이보게, 허 생원~ 자네 나랑 한 판 붙어서 자네가 이기면 내가 자네 소원 들어줄게, 대신 내가 이기면 자네가 여기 모인 사람들 액운을 싹 다 가지고 가줄 텐가?”

 

“뭐? 이렇게 술을 멕이고? 흠… 에라이 모르겠다! 그러지 그래, 자 들어오라고!”

 

20여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와 환호 소리가 터져 나왔다. 2월21일 밤 10시, 이미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땅끝마을 정월대보름맞이 용왕제가 열리는 현장의 분위기는 살가웠다. 만선(滿船)과 풍어(豊漁)를 기원하고 액땜과 진혼(鎭魂)을 하는 의례다.

 

2월21일 전남 해남 땅끝마을에서 열린 정월대보름맞이 용왕제가 끝난 후 의례에 사용된 허수아비가 짚단·용왕기와 함께 소각되고 있다. ⓒ 시사저널 김경민

 


액운 짊어진 허수아비 바닥에 패대기쳐

 

동서남북 사해(四海) 용왕들에게 드리는 기도로 시작한 이날의 용왕제는 허수아비 의례가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허수아비 의례는 짚단으로 만든 허수아비인 ‘허 생원’과 바람잡이로 나선 ‘박수무당’이 벌이는 씨름 한 판으로, 박수무당이 1인 2역을 맡아 진행한다. 행사의 진행자 격인 박수무당이 미리 막걸리와 소주를 잔뜩 먹인 허수아비 허 생원과 씨름을 하다가 마침내 허 생원을 등 뒤로 넘기면서 끝난다. 마을 사람들의 액운을 짊어진 허수아비는 모든 의례가 끝날 때까지 바닥에 패대기쳐진 채로 방치된다.

 

“허수아비는 ‘나’를 투영한 존재다. 의례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허수아비 허 생원을 통해 자신을 대상화시키는 경험을 한다.”

 

여느 의례와 마찬가지로 용왕제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위에는 종교적·철학적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용왕제를 지내는 동안 허수아비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그리고 의례가 끝날 때쯤 허수아비를 바닷가 한구석에 내동댕이치는데, 지역에 따라 그대로 방치해두거나 아예 태워버리기도 한다. 이런 행위는 결국 ‘나를 버리는 행위’의 의식화인 셈이다. 이날 용왕제를 이끌어간 박필수 해남민예총 기획위원장은 “허수아비는 허인(虛人)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들의 액(厄)을 다 가져갈 존재”라고 설명했다.

 

2월21일 오전부터 땅끝마을 곳곳에서는 정월대보름 전날 마을마다 열리는 당제와 이에 앞서 열리는 용왕제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됐다. 물론 마을 단위의 행사로서 20~30명 안팎 정도가 참가하는 소규모 행사였지만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해 행사를 도왔다. 의례에 사용되는 식기와 음식들을 싸오고 영하 5도의 추위에도 자리를 지키며 제를 올렸다. 용왕제에 사용되는 허수아비와 바다를 향해 띄워 보낸 액바가지(바가지 안에 액운을 담아 바다로 띄워 보내는 의식) 역시 주민들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세월호 희생자들 위한 제사상도 차려

과거 전국에 일반적으로 분포하던 제의(祭儀)였던 용왕제는 현재 동해·남해 일부 지역과 바다를 생업 터전으로 삼는 어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땅끝마을은 용왕제와 지역 주민들 사이의 긴밀한 유대감이 남아 있는 지역 중 하나다.

 

용왕제는 지역과 마을에 따라 ‘갯제’ ‘용신제’ ‘해신제’ ‘풍어제’ 등으로 불린다. 배나 어장을 가진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는 고사·푸닥거리, 마을에서 무당을 불러서 하는 풍어굿과는 성격과 형식이 다르다. 한국민속신앙사전은 용왕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용왕제가 바다의 용왕신에게 어로의 안전과 풍어를 비는 의례인 만큼 어민들의 생계활동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고, 지역에 따라 연행 방식이나 시기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용왕제는 마을 제사인 동제(洞祭)에 부수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고, 당산제(堂山祭)와는 별도로 행해지는 곳도 있다. 당제가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에게 올리는 제의인 반면에, 용왕제는 어로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의이다.”

 

정월대보름을 이틀 앞두고 치러진 땅끝마을의 용왕제는 전통적인 의미의 용왕제와 거리굿이 결합된 형식이었다. 거리굿은 동해안 및 남해안 일부 어촌에서 행하는 별신굿의 맨 마지막 거리로, 각 굿거리에서 따로 모셔지지 않은 잡귀잡신들을 불러서 대접해 돌려보내는 무당굿놀이다. 헌식(獻食) 및 진혼의 의미가 담겨 있으며 조난을 당해 떠밀려온 시신, 자손이 끊긴 죽음, 객사(客死), 전쟁·난리 통으로 억울하게 죽은 혼들을 어루만지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박필수 기획위원장은 “사해 용왕들을 향해 지내는 제사상 외에 2년 전 비극적인 선박 사고로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제사상도 따로 차렸다”며 “차후에 기회가 된다면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미래 세대들이 그날의 일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사고 인근 지역에 해신당(海神堂)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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